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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리더에게 필요한 것[제422호]


관리자   조회 : 359, 등록일 : 2017/05/16 11:38

 

모든 리더는 가끔씩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한다. 그러나 리더이기에 자신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따르는 이들을 성공의 자리로 이끌어야 한다. 리더이기에 많은 장애물도 있다. 돌부리에 걸려 주춤할 수 있지만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혹시라도 넘어지면 다시 일어난다. 언제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성공으로 가는 길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한다. 리더는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서 포기라는 사치를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의 리더를 주님을 섬기려고 하다가 자주 실패했던 베드로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주저앉고 포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 그였지만 주님이 회복을 위해 마련하신 만남의 장소에서 그는 다시 일어나 주님이 부르신 리더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베드로 안에 있던 상당한 잠재력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발견하셨다. 그래서 그를 게바라고 하셨다. 좌충우돌이 반복되는 상황이 그에게서 많이 연출되었지만 수동적인 다른 동료 제자들에 비해 언제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갔던 자였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결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그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디베랴 호숫가에 나타나신 주님을 발견했을 때도 주저하지 않고 주님께로 가기 위해 배에서 뛰어내렸던 그는 가능성이 참으로 많았던 리더임이 분명했다. 그는 실패가 끝이 아니라 실패 뒤에 새로운 시작을 이어갔다. 실패마저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삶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았다. 마치 자신의 스승이셨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우리의 주님은 참으로 탁월한 리더이시다. 우리의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적으로 기회를 주시며 결국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시며 지속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늘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떠한 자세와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자리에서 회복되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몇 가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삶을 교정할 필요성을 인지해야 한다.

주님의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떤 제자들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들의 노력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은 개입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이러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21:5)라고 질문하셨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21:6)라고 명령하셨다. 사람들은 종종 모든 것이 실패한 다음에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데 제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하자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서 배 위로 끌어올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둘째, 주님은 우리 삶 가운데서와 우리 곁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요한은 주님이 자신의 곁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신속하게 그분의 임재를 깨닫는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21:7)라고 고백했다. 주님의 역사를 스스로 깨닫는 요한과 같은 이도 있지만 주님의 역사를 누군가가 해석해 주어야만 되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있다. 우리의 삶에 분명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주님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와 속도, 더 나아가 상황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며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신다는 것이다.

셋째, 말과 행동 모두에서 그리스도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주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방금 잡아 올린 고기를 불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 일에 이바지했다(21:10). 그러나 행동만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이번에는 반대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세 번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며 과정을 밟으셨다.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밝히자 예수님은 그에게 더 많은 사역을 맡겨 주셨다.

넷째, 다른 부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자기 앞에 주어진 임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요한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복된 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히 갔다.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한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너무도 많아 만일 그것을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 같다고 말했다(21:35).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20:31)”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것을 걸러냈다. 넓게 펼치며 많은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리더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교정하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리더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리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자리에 있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으면서 말이다. 그럴 때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신뢰를 가진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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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제470호]
2018/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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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면 현재의 어려움 너머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일하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곧게 하기로 결정하실 때까지 우리 인생의 모든 구부러진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은 왜 곧게 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을 굽게 하실까?     첫째, 인생의 구부러진 것은 우리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참으로 신뢰하는지 결정하게 해 주는 테스트이다. 욥을 생각해 보라. 그는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고통과 시련을 당했다. 우리의 고난에도 동일한 목적이 있을 수 있다.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가 여전히 구원을 위하여 그분을 신뢰해야 함을 또한 알도록 도와준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이 헛된 세상에서 돌이키시고 내생의 행복을 찾으라고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가 이 땅의 운명에서 갖게 된 굴곡을 조심스레 디자인하신다. 고난은 영원에 대한 준비의 일부이다. 탕자를 생각해 보라. 그는 가진 것을 전부 잃기 전까지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고난은 그가 속했던 곳인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순례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인생의 어떤 것이 굽은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이 그것을 곧게 하실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하라.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사용하신다. 어떤 것이 구부러진 이유는 우리 자신의 죄를 포함하여 세상에 죄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운명의 굴곡을 양심을 건드리는 데 사용하신다. 우리가 고백해야 할 특정한 죄를 상기시키신다. 고난당할 때마다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일 수 있다. 하지만 각 시련을 계기로 고백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 역시 실수일 수 있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를 교정해 주시기 위해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사용하신다. 고난이 하나님의 공의의 도구로 사용되는 때가 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였을 때가 그랬다. 하나님은 그의 집에서 칼이 영원토록 떠나지 않을 거라고 정의롭게 판결하셨다(삼하 12:10 참조).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죄의 결과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이나 훈련 아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굽게 하시는 이유는 이런 것들만은 아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시기 위해, 혹은 내면에 너무 깊숙이 있어서 고통스런 시련을 겪어야 비로소 드러나는 죄악된 태도를 들추시기 위해 우리의 고난을 허락하신다. 혹은 시험 중인 우리의 신앙심을 통해 그분의 은혜를 보여 주시기 위해 우리의 운명에 굴곡을 두신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에서 굴곡을 가질 때 그것은 우리를 영적 선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믿음, 소망, 사랑, 자기(自己) 부인(否認) 그리고 다른 은혜의 행위들’을 많이 낳게 한다.     - 위의 글은 필립 G. 라이큰의 『헛된 세상, 헛되지 않은 삶』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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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취하라[제469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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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취하라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고 싫어하신다. 육신의 죄도 매스껍고 주의 사람들에게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교만에 대해 말씀하실 때처럼 맹렬한 노를 드러내시지는 않으신다. 교만은 하나님이 정말로 질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을 싫어하시고 또한 멀리하신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과 만날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그분은 상한 마음과 뉘우치는 심령을 물리치지 않으신다. 교만은 본질야고보서 4:6에 나오는 ‘교만’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 대한 범죄이다. 데오필락트는 “교만은 모든 악의 보루이자 절정이다”라고 했다. 교만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교만은 자신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다. 교만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것이다.교만의 특징은 하나님 없이 홀로 서려는 것이다. 교만은 아담이 저지른 범죄의 핵심이다. 그는 하나님께 의지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다. 그 결과 인류를 파멸로 이끌었다. 교만은 하나님과 인간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한다. 교만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교만은 스스로 이룬 것을 자랑한다.교만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멸이 깔려 있다. 교만은 다른 모든 존재를 하급한 것으로 여겨 내쫓아 버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뛰어남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으로 이용한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자기보다 열등한 소시민이며 하층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교만을 경멸하지 않고 자기보다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경멸을 쏟아 붓는다. 교만은 본질상 경쟁적일 수밖에 없다. 교만은 항상 더 나은 쪽에 호감을 갖게 만드는 비교를 포함하기 마련이다.교만은 건드리는 모든 것을 부패시킨다. 교만은 덕스러움을 사악함으로, 축복을 저주로 바꾼다. 아름다움이 교만과 만나면 허영이 된다. 열심과 교만이 한데 어울리면 독재와 무자비함이 된다. 인간의 지혜는 교만과 어우러져 불신앙을 만들어 낸다. 교만은 말 가운데 비판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비판은 언제든지 자신이 우월하다는 유리한 입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누구에게서나, 무엇에서든지 비판할 거리를 발견할 것이다. 교만은 자기를 높이고 이웃을 낮추는 것이다. 교만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인 면에서 착란에 빠진 상태이다. 교만의 치료     교만은 반드시 근본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교만을 치유하는 길로 나아가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인정이다. 우리는 자기의 진솔한 모습을 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간구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기 비하에 빠지게 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면 우리의 교만의 근거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둘째는 단련이다. 하나님은 교만을 지극히 싫어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한 예방 조치로 그들을 사랑으로 훈련시키신다. 우리가 무기력한 한계, 고통스러운 질병, 좌절된 야망 가운데 빠질 때 우리가 그보다 더 나쁜 교만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우리를 건지시려고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셋째는 금욕이다. 현명한 농부는 잡초가 어릴 때 그 싹을 뽑아버리듯이 우리는 교만한 생각이 있는지 살펴보고, 고백하고, 떨쳐버려야 한다. 교만한 생각을 가슴속에 품는 것은 마음속에 독사를 키우는 것과 같다. 교만은 육체의 일이며, 성령님은 우리가 그것을 없앨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롬 8:13).넷째는 비교이다. 우리는 자신을 자신과 비교하고는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자신을 온전하신 그리스도와 비교해야 한다.다섯째는 묵상이다. 그리스도를 묵상해야 한다. 자신을 발견하고 훈련하기 위한 우리의 최고의 노력도 이 암 덩어리를 뿌리째 뽑아내는 데는 부족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본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심령의 변화가 요구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오직 ‘주의 영으로’ 인하여 가능하다. 성령님은 자신의 교만을 미워하고 그리스도의 겸손을 흠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끝까지 함께하실 것이다. –  위의 글은 『영적 도약의 갈망』 (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하여 요약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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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들의 나라를 향한 편지 [제 468호]
201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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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들의 나라를 향한 편지 H.G 웰스의 『장님들의 나라』라는 소설은 “장님들의 나라에서는 눈을 하나 가진 사람이 왕이다”라는 오래된 속담을 인용한 뒤 이를 바꾸어 놓는다. 웰스는 수천 년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잊힌 부족을 발견한 탐험가의 이야기를 썼다. 이 탐험가가 일몰과 무지개의 찬란함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자 시력을 잃은 마을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생각하고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그들은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리스도인들도 종종 이 세상이 ‘장님들의 나라’인 것을 잊어버린다. 우리는 성경의 눈으로 복음의 참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세상은 복음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어리석어 보일 뿐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암흑 속에서 복음을 향하여 어리석은 반응을 보이는 자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들에게 분노보다 연민이 필요하며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앞을 못 보는 자가 우리의 발을 밟았다고 해서 화를 낼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또한 영적으로 앞을 못 보는 자와 같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요한일서 2:11)     이 말은 우리가 빛의 유익은 모두 누리면서도 여전히 어두움에 거할 수 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 사랑이나 동정 없이 그렇게 행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도 사랑이나 동정 없이 행하신 적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자들을 그와 같이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때가 우리가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잃어버린 사람들이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증거함으로써 앞을 보는 기적을 받아들이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빛을 따라 살며 어둠에 있는 자들을 위해 등불을 들어 주어야 한다. 장님들의 나라와 같은 이 세상 속에서 말이다.그리스도인의 비이기적인 사랑만큼 논의의 여지가 없고, 권위가 있으며,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는 것은 없다.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표지(標識)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결하게 하고 용서하는 능력을 느끼고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조건없이 오래 참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들 또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수만 번을 되풀이해도 질리지 않는 방법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편지가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보내야 하는,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받아야 하는 편지이다. 우리가 깊이 사랑할 때 결코 늙지 않는다. 깊이 사랑하는 자는 나이가 많아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늙어 죽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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