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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리더에게 필요한 것[제422호]


관리자   조회 : 392, 등록일 : 2017/05/16 11:38

 

모든 리더는 가끔씩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한다. 그러나 리더이기에 자신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따르는 이들을 성공의 자리로 이끌어야 한다. 리더이기에 많은 장애물도 있다. 돌부리에 걸려 주춤할 수 있지만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혹시라도 넘어지면 다시 일어난다. 언제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성공으로 가는 길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한다. 리더는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서 포기라는 사치를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의 리더를 주님을 섬기려고 하다가 자주 실패했던 베드로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주저앉고 포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 그였지만 주님이 회복을 위해 마련하신 만남의 장소에서 그는 다시 일어나 주님이 부르신 리더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베드로 안에 있던 상당한 잠재력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발견하셨다. 그래서 그를 게바라고 하셨다. 좌충우돌이 반복되는 상황이 그에게서 많이 연출되었지만 수동적인 다른 동료 제자들에 비해 언제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갔던 자였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결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그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디베랴 호숫가에 나타나신 주님을 발견했을 때도 주저하지 않고 주님께로 가기 위해 배에서 뛰어내렸던 그는 가능성이 참으로 많았던 리더임이 분명했다. 그는 실패가 끝이 아니라 실패 뒤에 새로운 시작을 이어갔다. 실패마저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삶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았다. 마치 자신의 스승이셨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우리의 주님은 참으로 탁월한 리더이시다. 우리의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적으로 기회를 주시며 결국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시며 지속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늘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떠한 자세와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자리에서 회복되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몇 가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삶을 교정할 필요성을 인지해야 한다.

주님의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떤 제자들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들의 노력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은 개입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이러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21:5)라고 질문하셨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21:6)라고 명령하셨다. 사람들은 종종 모든 것이 실패한 다음에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데 제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하자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서 배 위로 끌어올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둘째, 주님은 우리 삶 가운데서와 우리 곁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요한은 주님이 자신의 곁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신속하게 그분의 임재를 깨닫는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21:7)라고 고백했다. 주님의 역사를 스스로 깨닫는 요한과 같은 이도 있지만 주님의 역사를 누군가가 해석해 주어야만 되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있다. 우리의 삶에 분명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주님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와 속도, 더 나아가 상황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며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신다는 것이다.

셋째, 말과 행동 모두에서 그리스도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주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방금 잡아 올린 고기를 불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 일에 이바지했다(21:10). 그러나 행동만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이번에는 반대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세 번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며 과정을 밟으셨다.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밝히자 예수님은 그에게 더 많은 사역을 맡겨 주셨다.

넷째, 다른 부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자기 앞에 주어진 임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요한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복된 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히 갔다.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한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너무도 많아 만일 그것을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 같다고 말했다(21:35).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20:31)”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것을 걸러냈다. 넓게 펼치며 많은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리더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교정하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리더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리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자리에 있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으면서 말이다. 그럴 때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신뢰를 가진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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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기쁨, 영원한 사귐[제478호]
201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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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기쁨, 영원한 사귐   B.C. 4세기경, 시라쿠사의 도시 국가에 다몬과 판티아스가 있었다. 이들은 피타고라스파 철학자로서 죽마고우였다. 젊은 학자였던 핀티아스가 시라쿠사의 왕인 디오니시우스 1세를 분노하게 하는 가르침을 하였기에 왕은 그를 잡아들였다.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형에 처하게 된 핀티아스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집에 가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오도록 청원을 하지만 왕이 들어 주지 않는다. 그때 친구인 다몬이 대신 옥에 있기로 하고 핀티아스는 집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오기로 한 약속의 날이 다가왔음에도 핀티아스는 나타나지 않는다. 왕이 약속대로 다몬을 처형하려 할 때, 뜻하지 않은 강도를 만나 부상을 당한 핀티아스가 상한 몸을 이끌고 나타났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고, 친구와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신뢰의 모습을 본 왕은 핀티아스를 사면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돈독한 우정과 친구간의 사귐을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목숨을 내어 주는 진한 우정, 아름다운 사귐의 이야기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는지 모르지만 이것과는 결코 비교가 되지 않는 놀라운 사귐의 이야기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소개된다. 그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시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것만큼 값진 것이 없다고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친구인 제자들과 인류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으신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결코 유효 기간이 없는 영원한 사귐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 그로 인해 그분과의 사귐,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 주님과의 사귐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수님과 우리의 사귐이 시작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사도 요한은 그분이 나타나셨기 때문이라 말한다(요일 1:2). 사도 요한은 나타나신 예수님을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자세히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요일 1:2)라고 고백한다.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한 앎과 경험, 사귐이 얼마나 확실했는지를 사도 요한은 밝히고 있다. 사도 요한은 이미 몇 년 전에 요한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을 소개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면서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의해 복음이 왜곡되며 너무도 다른 복음이 판을 치게 되면서 성도와 교회 공동체 안에는 기쁨이 사라지게 된다. 진짜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닌 왜곡된 예수님을 배우고 붙잡고 살아감으로써 부작용이 심했던 것이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한일서 2:18)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향한 여정에 최선을 다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최선을 외면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선이자 사랑의 확증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분과의 사귐에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잘 안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가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왜곡이 가져오는 심각한 부작용이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에 대한 관심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며 외도를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누군가를 사귀면 모든 관심이 그 사람에게 쏠린다. 그 사람을 알아간다. 모든 것을 그 사람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기쁘고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함께 동거하는 삶을 소원한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사귐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가?서로 간의 사귐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귐과 교제(Fellowship, Koinonia)는 고대 헬라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가장 깊은 인연인 결혼 관계를 묘사할 때 즐겨 사용되던 표현이었다. 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 이 단어는 ‘공통분모’ 혹은 ‘공동 소유’라는 뜻의 더 넓은 의미로 쓰였다.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서로 간의 사귐이 있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1)라고 말한다.  주님과의 사귐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서로 간의 사귐은 당연히 있어야 하며 이 사귐은 확장되어 한다. 서로를 향한 사귐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누군가가 내게 그러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서 각자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다가오셨듯이  주님과의 사귐이 있는 우리는 먼저 적극적으로 다른 성도를 향하여 다가가야 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적극적인 모습으로 속해 있어야 한다.다른 사람이 주님과의 사귐이 시작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나타나신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다른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관계의 회복은 더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더 넓어지며 사귐이 확장되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결국 주님과,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위한 복음의 중매쟁이가 되어야 합니다.사도 요한은 자신과 다른 사도가 보고 들은 바를 우리에게 전함은 우리가 그들과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요일 1:3). 자신과 예수님과의 사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며 듣는 이들 또한 그러한 사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전한다’는 말은 ‘증거한다’는 것과는 비슷하지만 이 말에는 ‘위임받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귐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나눠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증거를 넘어 주님에게서 위임받은 일이다.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인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귐, 주님과 우리의 사귐, 우리 서로 간의 사귐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전하는 것이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의 의미이다. 듣는 이들이 이해를 못해도, 설득이 안 되어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행복하고 기쁨 사귐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시적인 소재들로 일시적인 기쁨을 찾고 누리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정도에 만족할 수 없다. 영원한 주님을 소유하였기에, 우리의 마음, 감정, 모든 소망을 만족시켜 주시는 주님과의 사귐이 있기에 충만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게 완성될 날을 소망하며 주님과의 사귐, 서로 간의 사귐,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이러한 진정한 사귐 가운데로 들어오도록 은혜를 구하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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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세상, 외로운 그리스도인 [제477호]
201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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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세상, 외로운 그리스도인캐나다 출신의 힙합 가수 드레이크가 부른 노래에 담긴 한 가사인데 한국 문화를 만나 더욱 유명해진 문장이 있다. You only live once(“인생은 한 번뿐이다” YOLO).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마법의 주문처럼 기업의 마케팅에 활용되면서 더욱 확장되고 왜곡되어 “한 번 뿐인 인생, 즐기면서 살자”라는 신조어로 둔갑했다. 욜로 햄, 욜로 빙수, 욜로 인테리어 조명, 욜로 모발이식, 낯선 땅에서 참된 행복을 만나는 욜로 여행과 같은 상품으로 말이다.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분들까지 가세하며 ‘쓰죽회’가 등장했다. ‘한 번 사는 인생, 다 쓰고 죽자’불안한 미래에 대한 준비보다는 현재 삶을 즐기는 것을 인생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기에 혼삶을 살며, 혼밥을 먹고, 휴가 때 지갑을 톡톡 털어서라도 해외로 긴 혼행(혼자하는 여행)을 한다. 집이나 물건은 사는 것이 아니라 렌트하며 다양한 경험을 위해 취미 활동에 적극 투자한다. 당장이 중요하고 당장을 즐기는 문화를 연출하면서 말이다.젊은 2030 성인 남녀 84%는 욜로 라이프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60.7%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 55.4%는 “자기 주도적 삶을 살 수 있어서”, 30.7%는 “실용적인 생각 같아서”, 23.5%는 “열정적인 것 같아서, 20.9%는 “도전 정신이 있어 보여서”이다. 통계를 볼 때면 함께하는 삶은 누군가에게 구속당하고, 자기 삶을 추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혼자사는 삶에 익숙하고 혼자가 편하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갈등도 없고, 자기 주도적인 삶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년기로 갈수록 혼자의 삶은 편함이 아닌 비극적인 모습임을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통계청은 전국적으로 1인 가구의 비율이 1위가 되는 시기는 2019년(29.1%)이 될 것이라 발표했다. 또 인구주택 총조사에 의하면 혼자 사는 50대 1인 가구 비율이 10년 동안 123%나 증가해 차후 1인 가구 대부분은 노인 세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 베이비붐 세대의 노년기 진입 그리고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서서히 해체되고 있는 사회 현상도 욜로 인생, 혼자 사는 인생을 부추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웃은 물론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다 고독하게 사망하는 사람들이 매년 급증하여 사망자가 최근 4년간 57%나 증가하여 2017년 한 해 2000명을 넘은 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이러한 이야기가 아직은 남의 이야기로 다가오지만, 혼자만의 욜로 인생을 즐기는 현재의 사람들이 직면하게 될 미래의 비극이라는 이야기이다. 현대인들은 혼자이면서 혼자인줄 모른다. 각종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SNS)에 연결되어 있어 가상 공간에서 소통하고 있으며, 포털(네이버, 다음 등)을 통해 세상 구석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손바닥 안에서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이러한 모습이 발견된다. 혼자로서 혼자만의 삶에 익숙해 간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진정 중요한 것이라 믿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삶은 반드시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로 나아가 그들과 연결됨으로써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한다. 함께하는 삶이 ‘갈등’이라는 피할 수 없는 불편함을 수반하지만, 함께하는 삶이 서로를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s)임을 잊지 말자. 혼자만의 삶은 하나님이 원래 디자인하신 인간다움의 삶이 아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함께’ ‘서로’ 라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다. 혼자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혼자가 익숙하기에 서로를 의지하고 도와주는 것이 불편한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혼자가 편하기에 신앙생활을 많은 사람이 모여 드리는 주일 낮 예배에만 살며시 참석하는 것으로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혼자가 익숙한, 별로 건강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외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 불편할지라도 혼자만의 삶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혹시 당신은 혼자가 아닌가? 혹시 외로운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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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제476호]
2018/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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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메마른 신학적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의 작용은 사실상 일상의 삶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주권이 현재 작용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지만 어떤 때는 몇 년이 지난 뒤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닫게 될 때도 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하는 실례가 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성경에는 많이 소개된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간섭과 통제에서(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벗어나 그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된다. 그러다가 이러한 그들의 타락은 사무엘이라는 지도자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라는 외침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의 요청을 들어주어 왕을 세우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무엘을 찾아올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시며 만남을 미리 알게 하신다. 하지만 왕이 될 사울은 암나귀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요청으로 사방팔방으로 그 나귀를 찾아다닐 뿐이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귀를 찾을 수 없어 포기하려 했던 사울은 동행했던 사환의 간청으로 누구인지도 모르던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저 암나귀 한 마리를 찾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결국 사울은 사무엘 앞에 서게 된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한다.사무엘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주권이 현재 작용하는 모습을 듣고 보고 있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나귀 한 마리를 위해 발걸음을 옮겼을 뿐, 사무엘을 만나고 기름 부음을 받는 어마어마한 일을 단지 일상의 삶에서 우연히 일어난 기적처럼 여겼다. 우리가 듣거나 듣지 못하거나, 알거나 알지 못하거나,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실행해 가시는데 작용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하나님의 주권을 사람들은 하나님의 폭정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에게서 결정을 내릴 책임을 빼앗지 않으시면서도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시며 우리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주권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 속에 찾아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이러한 일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적극적인 개입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한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개입은 나타나는 형식, 즉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매우 구체적이다.종종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하신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로봇으로 보거나 스스로 결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반응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오해는 주권적인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주권이란 하나님이 모든 순간을 통제하시기에 하나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먼 곳에 홀로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을 사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단의 능력을 주신다.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서로를 의탁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성을 억누르면서 우리를 함부로 다루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막대기처럼 다루시거나 로봇처럼 원격으로 조종하지 않으시며 변덕쟁이처럼 우리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격 대 인격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며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말씀하시며 우리가 사랑과 애정으로 반응하도록 이끄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을 바탕으로 인간을 다루시고 이끄시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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