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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리더에게 필요한 것[제422호]


관리자   조회 : 148, 등록일 : 2017/05/16 11:38

 

모든 리더는 가끔씩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한다. 그러나 리더이기에 자신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따르는 이들을 성공의 자리로 이끌어야 한다. 리더이기에 많은 장애물도 있다. 돌부리에 걸려 주춤할 수 있지만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혹시라도 넘어지면 다시 일어난다. 언제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성공으로 가는 길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한다. 리더는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서 포기라는 사치를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의 리더를 주님을 섬기려고 하다가 자주 실패했던 베드로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주저앉고 포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 그였지만 주님이 회복을 위해 마련하신 만남의 장소에서 그는 다시 일어나 주님이 부르신 리더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베드로 안에 있던 상당한 잠재력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발견하셨다. 그래서 그를 게바라고 하셨다. 좌충우돌이 반복되는 상황이 그에게서 많이 연출되었지만 수동적인 다른 동료 제자들에 비해 언제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갔던 자였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결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그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디베랴 호숫가에 나타나신 주님을 발견했을 때도 주저하지 않고 주님께로 가기 위해 배에서 뛰어내렸던 그는 가능성이 참으로 많았던 리더임이 분명했다. 그는 실패가 끝이 아니라 실패 뒤에 새로운 시작을 이어갔다. 실패마저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삶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았다. 마치 자신의 스승이셨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우리의 주님은 참으로 탁월한 리더이시다. 우리의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적으로 기회를 주시며 결국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시며 지속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늘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떠한 자세와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자리에서 회복되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몇 가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삶을 교정할 필요성을 인지해야 한다.

주님의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떤 제자들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들의 노력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은 개입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이러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21:5)라고 질문하셨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21:6)라고 명령하셨다. 사람들은 종종 모든 것이 실패한 다음에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데 제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하자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서 배 위로 끌어올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둘째, 주님은 우리 삶 가운데서와 우리 곁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요한은 주님이 자신의 곁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신속하게 그분의 임재를 깨닫는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21:7)라고 고백했다. 주님의 역사를 스스로 깨닫는 요한과 같은 이도 있지만 주님의 역사를 누군가가 해석해 주어야만 되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있다. 우리의 삶에 분명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주님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와 속도, 더 나아가 상황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며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신다는 것이다.

셋째, 말과 행동 모두에서 그리스도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주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방금 잡아 올린 고기를 불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 일에 이바지했다(21:10). 그러나 행동만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이번에는 반대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세 번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며 과정을 밟으셨다.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밝히자 예수님은 그에게 더 많은 사역을 맡겨 주셨다.

넷째, 다른 부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자기 앞에 주어진 임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요한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복된 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히 갔다.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한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너무도 많아 만일 그것을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 같다고 말했다(21:35).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20:31)”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것을 걸러냈다. 넓게 펼치며 많은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리더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교정하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리더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리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자리에 있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으면서 말이다. 그럴 때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신뢰를 가진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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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_실수와_실패를_반복하는_리더에게_필요한_것.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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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울타리 제거하기[제423호]
2017/05/23
119


교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울타리 제거하기

  

마르틴 루터는 산에서 돌 하나를 빼내려고 하다가 뜻하지
않게 산사태를 일으킨 사람이다. 수세기 동안 딱딱하게 굳어진 전통으로부터 복음을 구출하려고 하다가 중세
교회 구조를 송두리째 허물어 버린 셈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열정으로 여러 전통에 대한 문제 제기를
이어갔다. 성경에 뿌리를 둔 신학이라고 확신하는 내용과 그 함의를 설명하기 위해 소책자와 책 집필에
맹렬하게 몰두했다. 루터는 “침묵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는 말해야 할 때이다”라고 밝히며 그의 저서 『독일 귀족들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통해 교황의 폭정을 폭로했다. “교황은 열매를 먹어 치우고 우리는 껍질만 가지고 논다”라는 교황을 향한 비난과 함께 그의 생각은 교황이 교회 개혁 의지가 없으므로 세상 권력이 공의회를 소집하고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데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이 부분은 여러 가지의 생각과 논쟁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교황과 교회는 스스로 개혁할 수 있는 의지나 능력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루터는 교회 지도자가 처벌받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세 가지 울타리에 관해 말했다. 교회 권력자들은 마음 놓고 “자유롭게 온갖 사기 행각과 악을 방자하게 저지른다. 여리고 성벽과
마찬가지로 이 세 울타리는(실제로는 ‘종이 울타리’인데) 무너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부패한 교회를 비호하는 첫 번째
울타리 : ‘영적 권력은 세상 권력 위에 있다’는 믿음이다.

 

루터는 만인제사장 사상에 호소함으로써 이 사상을 붕괴하고자
했다. 그는 “우리가 세상 권세에 감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통제가 없다면 인간은 공포 가득한 무법천지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 지배자는 제한 없이 자기 의무를 행할 수 있어야 하며, 교황이나 주교, 농노, 수도사, 수녀에게도 같은 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부패한 교회가 스스로에게 지나친 권력을 부여하며 세상 권세 위에 군림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악을 향하여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교회가 영적 권력을 무제한으로 휘두르며 성도들을 교회의 권력과 교회 안으로만
가두려고 하자 가장 평범한 일을 비롯한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확신한 루터는 “마귀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오로지 교회와 그 안에서 수행되는 일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편협한
개념보다 우리를 더 효과적으로 엇나가게 할 최고의 방법이다”라고 하며 비판했다.

 

교회가 자기 방어하는 두 번째 울타리 : ‘교황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중세의 교권은 자신들이 아무리 무지하고 사악할지라도
성령은 결코 자신들과 교황을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루터는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전통 뒤에 숨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공격했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임을 확신하는
루터였기에 만인이 제사장이라면 우리 모두 성경을 읽고 우리가 보기에 합당한 대로 해석할 권한을 가짐을 또한 확신했다. 그러기에 그는 남녀를 물론하고 보통 사람이 성경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했다.

종교개혁은 사제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돌려주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도록(딤후 3:16~17)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만드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말씀을 가까이하며 공부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자유를 포기한 채 종교 생활에 안주한다면 중세의
부패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허물어뜨려야 할 세 번째 울타리 : ‘오직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루터는 교황을 그리스도와 비교함으로써 교황의 수치를
드러냈다. 그는 해결되지 않은 분쟁이 있으면 ‘교회로’ 가지고 오라고 언급한 마태복음 18:16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공의회 소집은 교황의 배타적 권한이 아님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이 삼중 왕관이나 교황 발가락에
입맞춤 등의 관행을 접고 소박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주님의 몸 된 모든 교회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세계의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맞이하며 다양한 행사와 준비로 분주해지고 있다. 우리의
기독교와 교회들이 종교개혁의 주요한 기념지를 찾고 기념식을 마련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스스로 개혁의 의지를 다지며 중세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살피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부패하게 만들며 쳐 놓은
울타리는 없는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 위에서 개혁되고 회복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점검하며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개혁하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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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리더에게 필요한 것[제422호]
201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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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리더는 가끔씩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한다. 그러나 리더이기에 자신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따르는 이들을 성공의 자리로 이끌어야 한다. 리더이기에 많은 장애물도 있다. 돌부리에 걸려 주춤할 수 있지만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혹시라도 넘어지면 다시 일어난다. 언제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성공으로 가는 길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한다. 리더는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서 포기라는 사치를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의 리더를 주님을 섬기려고 하다가 자주 실패했던 베드로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주저앉고 포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 그였지만 주님이 회복을 위해 마련하신 만남의 장소에서 그는 다시 일어나 주님이 부르신 리더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베드로 안에 있던 상당한 잠재력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발견하셨다. 그래서 그를 ‘게바’라고 하셨다. 좌충우돌이 반복되는 상황이 그에게서 많이 연출되었지만 수동적인 다른 동료 제자들에 비해 언제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갔던 자였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결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그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디베랴 호숫가에 나타나신 주님을 발견했을 때도 주저하지 않고 주님께로 가기 위해 배에서 뛰어내렸던 그는 가능성이 참으로 많았던 리더임이 분명했다. 그는 실패가 끝이 아니라 실패 뒤에 새로운 시작을 이어갔다. 실패마저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삶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았다. 마치 자신의 스승이셨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우리의 주님은 참으로 탁월한 리더이시다. 우리의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적으로 기회를 주시며 결국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시며 지속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늘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떠한 자세와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자리에서 회복되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몇 가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삶을 교정할 필요성을 인지해야 한다.주님의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떤 제자들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들의 노력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은 개입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이러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라고 질문하셨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6)라고 명령하셨다. 사람들은 종종 모든 것이 실패한 다음에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데 제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하자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서 배 위로 끌어올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둘째, 주님은 우리 삶 가운데서와 우리 곁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요한은 주님이 자신의 곁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신속하게 그분의 임재를 깨닫는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요 21:7)라고 고백했다. 주님의 역사를 스스로 깨닫는 요한과 같은 이도 있지만 주님의 역사를 누군가가 해석해 주어야만 되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있다. 우리의 삶에 분명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주님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와 속도, 더 나아가 상황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며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신다는 것이다. 셋째, 말과 행동 모두에서 그리스도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제자들은 주님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주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방금 잡아 올린 고기를 불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 일에 이바지했다(요 21:10). 그러나 행동만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이번에는 반대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세 번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며 과정을 밟으셨다.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밝히자 예수님은 그에게 더 많은 사역을 맡겨 주셨다. 넷째, 다른 부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자기 앞에 주어진 임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요한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복된 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히 갔다.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한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너무도 많아 만일 그것을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 같다고 말했다(요 21:35).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요 20:31)”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것을 걸러냈다. 넓게 펼치며 많은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리더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교정하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리더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리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자리에 있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으면서 말이다. 그럴 때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신뢰를 가진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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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방황과 잘못된 목표[제421호]
201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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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목표는 길을 잃게 한다. 목표가 잘못 설정되면 인생은 방황할 뿐만 아니라 그 인생의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후회와 참담한 결과만 남기게 된다. 요한일서 2:17은 세상에 있는 많은 것은 지나갈 것이며 오는 세상에까지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사람이 지나갈 것을 영원한 것이라고 붙잡고 그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처음부터 잘못된 그 목표를 위해 소중한 삶을 낭비한다. 그렇다면 바른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근거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보다 위에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의 뜻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이며 영원한 가치라고 성경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구하고 있는 잘못된 목표는 무엇인가? 리플랙션선교회의 설립자이자 탁월한 성경 교사인 케네스 보아의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쾌락’이다. 쾌락 그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하면 올바른 것을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하여 결국엔 진짜 결박당하게 된다. 어윈 루처(Erwin Lutzer) 목사는 “죄는 제대로 상표를 붙인 채 우리에게 절대 다가오지 않는다. 죄는 언제나 다른 포장지에 싸여 나타나고 실제와 다른 어떤 것으로 소개되어 등장한다”라고 말한다. 잠깐의 감각적인 쾌락이 길고 긴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 잘못된 이유로 흥청망청 먹고 마시다가 중독에 이를 수도 있다. 사탄은 우리에게 쾌락 추구 혹은 극도의 자기 부인, 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을 즐기는 것을 막지 않으신다. 도리어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진정으로 풍성한 삶은 자기 탐닉의 방식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기에 이 부분을 경고하신다. 성경은 “연락(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잠 21:17)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피하라(딤후 3:4)고 말한다. 쾌락을 추구하면 결국 실망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기에 우리가 알게 될 가장 깊은 쾌락은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인정’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추구했다. 자신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일 자신이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고 있다면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갈 1:10)까지 말했다. 이와는 달리 항상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것을 의식했던 빌라도는 두 번에 걸쳐 예수님을 재판하는 동안 진실이 아닌 성난 군중을 달래며 그들에게서 인정받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를 쓰다가 그는 고난받는 메시야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님의 뜻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거나 인정받는 것을 추구한다면 결국에는 실패한다. 하나님에게서 인정받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일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일을 동시에 구할 수는 없음을 기억하며 늘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는 ‘명성’이다. 창세기 11장에서 놀라운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지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시날 땅에 모여든 사람들의 계획 속에 하나님은 전적으로 배제 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그 계획은 흩어져서 온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계획(창 9:1)과는 정반대의 계획이었다.사람들은 모두 중요하고 기억에 남을 무엇인가를 성취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들 또한 영원히 지속될 무엇인가를 성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성경은 성취에 대한 처방을 세상과는 완전히 반대로 이야기한다. 겸손해야 하며, 종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을 신뢰하라고 말한다(약 4:10). 만약 우리가 명성을 떨치는 것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산다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것이 사람에게 달려 있게 된다. 참으로 변덕스럽기만 한 사람에게 말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인기가 많았다. 유대교의 전면에 등장하여 온갖 좋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유명해졌을지라도 그들이 얻은 영구적인 명성은 수치와 망신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명성에 사로잡힌 우리의 자아가 무너져서 그분께 소망을 두기를 원하신다.     네 번째는 ‘부’이다. 세상에서 가난만큼 힘든 것도 없지만 부의 추구만큼 혹독한 비난을 받는 것도 없다.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100억을 준다면 25퍼센트의 사람은 모든 친구와 교회를 포기할 의향이 있다고 한다. 23 퍼센트의 사람은 일 주일에 한 번 매춘부가 될 의향이 있다고 한다. 16 퍼센트가 배우자를 떠날 의향이 있다고 하고, 7 퍼센트가 모르는 사람을 죽일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고 한다. 우리는 어떠할 것 같은가? 우리는 실제로 그처럼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00억이란 돈은 우리의 믿음을 스크루지의 황금 우상으로 대체하도록 유혹하기에 충분한 돈이다. 부하려고 하면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9). 그중에 가장 심각한 위험은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번영을 달성하게 되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져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처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탁월하면서도 부지런히 일하고 결과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의 내면을 이러한 믿음으로 닦아 가야 한다. 이것이 또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축적한 부가 아니라 믿음으로 기경된 우리의 성품이며 성령의 충만 속에 맺어지는 열매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는 부의 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대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섯 번째는 ‘권력’이다. 우리의 목표가 개인적인 권력을 키우는 것이라면 그 목표는 하나님의 목표와 충돌한다. 성경은 겸손하게 살라는 구체적인 가르침으로 가득한데 세상의 메시지는 그런 삶을 시간 낭비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의 힘으로 정상까지 올라가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높이실 수 있게 하라(벧전 5:6~8)고 하실 때는 그분이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두렵기 때문에 권력과 지위를 갈구하며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을 추구하는 데 강한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사람들이 권력을 쟁취하려는 과정에서 온갖 명분을 만들어 내며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권세 있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겸손하게 사셨다. 겸손 자체가 힘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 힘은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힘이다.     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조차 타락한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한 채 삶의 초점을 놓쳐 버린다. 우리는 세상이 설정해 준 목표와 성경에서 말하는 진실 사이에서 긴장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긴장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말하며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말하는 진실을 선택하도록 권한다. 우리는 현실에서 영원한 가치 체계를 붙잡고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으며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따라 사는 삶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의 몫이며 궁극적으로 펼쳐질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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