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mmunity

Column

칼럼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리더에게 필요한 것[제422호]


관리자   조회 : 305, 등록일 : 2017/05/16 11:38

 

모든 리더는 가끔씩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한다. 그러나 리더이기에 자신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따르는 이들을 성공의 자리로 이끌어야 한다. 리더이기에 많은 장애물도 있다. 돌부리에 걸려 주춤할 수 있지만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혹시라도 넘어지면 다시 일어난다. 언제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성공으로 가는 길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한다. 리더는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서 포기라는 사치를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의 리더를 주님을 섬기려고 하다가 자주 실패했던 베드로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주저앉고 포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 그였지만 주님이 회복을 위해 마련하신 만남의 장소에서 그는 다시 일어나 주님이 부르신 리더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베드로 안에 있던 상당한 잠재력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발견하셨다. 그래서 그를 게바라고 하셨다. 좌충우돌이 반복되는 상황이 그에게서 많이 연출되었지만 수동적인 다른 동료 제자들에 비해 언제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갔던 자였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결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그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디베랴 호숫가에 나타나신 주님을 발견했을 때도 주저하지 않고 주님께로 가기 위해 배에서 뛰어내렸던 그는 가능성이 참으로 많았던 리더임이 분명했다. 그는 실패가 끝이 아니라 실패 뒤에 새로운 시작을 이어갔다. 실패마저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삶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았다. 마치 자신의 스승이셨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우리의 주님은 참으로 탁월한 리더이시다. 우리의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적으로 기회를 주시며 결국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시며 지속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늘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떠한 자세와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자리에서 회복되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몇 가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삶을 교정할 필요성을 인지해야 한다.

주님의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떤 제자들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들의 노력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은 개입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이러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21:5)라고 질문하셨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21:6)라고 명령하셨다. 사람들은 종종 모든 것이 실패한 다음에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데 제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하자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서 배 위로 끌어올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둘째, 주님은 우리 삶 가운데서와 우리 곁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요한은 주님이 자신의 곁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신속하게 그분의 임재를 깨닫는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21:7)라고 고백했다. 주님의 역사를 스스로 깨닫는 요한과 같은 이도 있지만 주님의 역사를 누군가가 해석해 주어야만 되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있다. 우리의 삶에 분명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주님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와 속도, 더 나아가 상황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며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신다는 것이다.

셋째, 말과 행동 모두에서 그리스도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주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방금 잡아 올린 고기를 불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 일에 이바지했다(21:10). 그러나 행동만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이번에는 반대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세 번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며 과정을 밟으셨다.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밝히자 예수님은 그에게 더 많은 사역을 맡겨 주셨다.

넷째, 다른 부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자기 앞에 주어진 임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요한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복된 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히 갔다.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한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너무도 많아 만일 그것을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 같다고 말했다(21:35).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20:31)”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것을 걸러냈다. 넓게 펼치며 많은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리더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교정하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리더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리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자리에 있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으면서 말이다. 그럴 때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신뢰를 가진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422호.jpg

(2017.05.16)_실수와_실패를_반복하는_리더에게_필요한_것.hwp



글쓴이 비밀번호
 
글수 451Page 1 / 151
창의적인 교회와 목회가 필요하다 [제456호]
2018/01/16
124


창의적인 교회와 목회가 필요하다

 

오늘날 ‘새롭고
다르다는 것’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독특하면서도 다른 차별성을 구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분위기 속에서 가장 위협받는 받는 곳이 교회이다. 늘
새로움과 차별성을 추구하며 창의적인 것을 요구하는 시대인데 교회는 늘 본질을 붙잡고 이러한 시대의 요구를 항상 저항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시대 착오적인 기관으로, 과거와 권위주의의
유물로 치부하며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냉소적 분위기도 한 몫을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세상 한가운데 세워진 교회의 유용성은
끝이 난 것인가? 하나님의 집으로서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며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움을 받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그리스도인들만의 리그에만 존재하고 그 안에서만 유용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인 것을 말이다.

급격한 변화와 혼돈 속에서도 교회는 새로운 미래를 선도하고
더 나은 시대를 꿈꾸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단어는 ‘창의성’이다.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그 시대 속에서 충분히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획일적이고 평범한
상태의 형식과 의식에만 머무르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온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그들을 감동시키며 변화시켰던 것과 같이 복음이 개인의 삶과 지역 사회 그리고 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당신과 교회는 더욱 창의적이어야
한다.

창의성은 모범적인 생활양식을 수반한다. 효과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창의성이 삶의 전 영역에 골고루 퍼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창의성은 배울 수 있다. 처음부터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개발과
훈련을 통해 배우게 된다. 배울 수 없다면 창의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창의적인 교회와 목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창의성이 사라지면 한편으로 매력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또한 창의성이 당신과 교회 공동체에 다음과 같은 것이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 배움을 지속시켜 준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배운다. 당신이 배우고 있다는 것이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된다. 배우기를
멈춘다면 성장을 멈추고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은 쇠할지라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창의성이 당신으로 하여금 지속적인 배움의 장으로 이끌 것이다.

 

둘째, 변화하는 사회와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충족시켜 준다.

성경적 진리는 불변한다. 결코 진리는 타협될 수 없다. 변화할 수 없다. 하지만 문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형성되고 발전한다. 이 문화의 형태는
타협되지 않는 진리를 기준으로 분별되어야 하고 걸러져야 한다. 때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진리의 적용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사회가 빠르고 폭넓게 변화할 때 우리의 방법 또한 변해야 한다. 복음의 내용이 결코 변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옷을 포기하고 버리지
않지만 옷과 관련된 패션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듯이 창의성은 당신으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 위에 견고히 서서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지속하며 사회와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

 

셋째, 신선함과 생동감으로 의사소통에 영향을 미친다.

진리를 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접근해 가시는 예수님의
창의적 접근 방식과 수사법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측 불가능한 창의적 방식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은
물론 그들의 발걸음을 끌어당겼다. ‘교회는 늘 그래’, ‘그리스도인은
다 똑같아’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반응과 호감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결국 당신의 창의성에서
시작된다.

 

한국 교회는 시대와 그 사회를 이끌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도리어 교회가 이 시대와 사회를 따라가기에
급급해 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교회가 시대와 사회를 따라가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와 사회를 이끌어갔던 이전의 교회 현장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것이 많이 존재했다.

창의적인 교회와 목회에 필요한 방법과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신과 교회는 존재하는 그 현장에서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창의적인 사역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이 당신과 교회가 창의적 목회와 사역의 디딤돌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의 주변에는 예수님이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본질과 그 의미를 담지 못한 것이나 형식과 옛 관습으로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고 고민하자. 혹시라도 그러한 것이 발견된다면 그 의미와 가치를 회복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창의적
교회와 목회로 나아가자.

Read More
주저하지 말고 '복'을 구하라 [제455호]
2018/01/09
163
주저하지
말고 ‘복’을 구하라

 

‘번영신학’은 복음이 아니다. 이것은 건강과 부유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부유함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도록 하며,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부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번영신학은 기독교의 기독교다움을 훼손시켜왔다. 그리고 이러한 번영신학과 한국의 샤머니즘의 교묘한 조화를 통해 기독교의 안팎에서는 ‘복’이라는 단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로 인해 ‘복’을 구하거나, ‘축복’을 해 주는 기도는 기복주의 신앙이라며 통째로 묶여서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치고 구하도록 해야 한다. 복의 가치는 단순히
물질에 있지 않고복을 구하는 것은 단순히 부자로 사는 것을 구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실 수도 있고, 가난하게 하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유하다고 복을 받은 것이라고, 가난하다고 복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질의 부유함이나 가난함, 이 모든 것은 단순히 도구에 불과하다. 이것을 이용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복을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16~17)

 

야고보는 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선한 것이 없고 우리가 사랑할 만한 것도 없고 우리의 아버지, 즉 빛의 아버지에게서 오지 않은 어떤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인생에서 선한 것을 찾는다면 어디서 찾겠는가? 이 세상 속에서 그것을 찾겠는가? 재물과 권력과 명성을 통해서 그것을 찾겠는가? 쾌락을 통해서 그것을
찾겠는가? 아니다.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오직
그분에게서만 우리는 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당신을 떠나서는 어디에도 선한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 이외에는
어디에도 복을 받을 곳이 없으며,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역대상 29:11~12)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다. 그러므로 주님 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복을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복을 허락하신다.

 

복은 하나님께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주어진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비보다 더 자비로운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주기를 기뻐하시기에 나누어 주신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하나님을 화내고 무섭고 인색한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러내도록 요청하였다. 그때에 하나님은 산에 둘러싸여서 서 있는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며 말씀을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애굽기 34:6)

 

이스라엘의초대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무관심과 어리석음으로 삶을 추락시킨 사울왕을 향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사무엘하 12:7b~8)

 

이미 많은 것을 주셨는데, 혹시라도 더 필요했다면 하나님께서 주셨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주시려는 분이다. 결코 인색하신
분이 아니다.

 

복은 간구하는자에게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복 주시기를 좋아하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복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의 저장고가 영원과 닿아 있음을 알고 있다.
또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만약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정말로 알고
있다면 구해야 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7~11)

 

우리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주시되 ‘하나님께 구하는 자들’에게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구하라. 도리어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교만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주시려고 하신다. 우리를 위한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 어떤 경우 우리 자신을 위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깨닫지 못할 때도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며, 주 안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할 만한 복을 간절히 구하라.
Read More
  
 
1 2 3 4 5  다음 5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