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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리더에게 필요한 것[제422호]


관리자   조회 : 226, 등록일 : 2017/05/16 11:38

 

모든 리더는 가끔씩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한다. 그러나 리더이기에 자신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따르는 이들을 성공의 자리로 이끌어야 한다. 리더이기에 많은 장애물도 있다. 돌부리에 걸려 주춤할 수 있지만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혹시라도 넘어지면 다시 일어난다. 언제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성공으로 가는 길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한다. 리더는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서 포기라는 사치를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의 리더를 주님을 섬기려고 하다가 자주 실패했던 베드로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주저앉고 포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 그였지만 주님이 회복을 위해 마련하신 만남의 장소에서 그는 다시 일어나 주님이 부르신 리더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베드로 안에 있던 상당한 잠재력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발견하셨다. 그래서 그를 게바라고 하셨다. 좌충우돌이 반복되는 상황이 그에게서 많이 연출되었지만 수동적인 다른 동료 제자들에 비해 언제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갔던 자였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결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그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디베랴 호숫가에 나타나신 주님을 발견했을 때도 주저하지 않고 주님께로 가기 위해 배에서 뛰어내렸던 그는 가능성이 참으로 많았던 리더임이 분명했다. 그는 실패가 끝이 아니라 실패 뒤에 새로운 시작을 이어갔다. 실패마저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삶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았다. 마치 자신의 스승이셨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우리의 주님은 참으로 탁월한 리더이시다. 우리의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적으로 기회를 주시며 결국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시며 지속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늘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떠한 자세와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자리에서 회복되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몇 가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삶을 교정할 필요성을 인지해야 한다.

주님의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떤 제자들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들의 노력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은 개입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이러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21:5)라고 질문하셨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21:6)라고 명령하셨다. 사람들은 종종 모든 것이 실패한 다음에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데 제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하자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서 배 위로 끌어올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둘째, 주님은 우리 삶 가운데서와 우리 곁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요한은 주님이 자신의 곁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신속하게 그분의 임재를 깨닫는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21:7)라고 고백했다. 주님의 역사를 스스로 깨닫는 요한과 같은 이도 있지만 주님의 역사를 누군가가 해석해 주어야만 되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있다. 우리의 삶에 분명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주님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와 속도, 더 나아가 상황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며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신다는 것이다.

셋째, 말과 행동 모두에서 그리스도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주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방금 잡아 올린 고기를 불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 일에 이바지했다(21:10). 그러나 행동만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이번에는 반대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세 번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며 과정을 밟으셨다.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밝히자 예수님은 그에게 더 많은 사역을 맡겨 주셨다.

넷째, 다른 부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자기 앞에 주어진 임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요한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복된 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히 갔다.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한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너무도 많아 만일 그것을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 같다고 말했다(21:35).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20:31)”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것을 걸러냈다. 넓게 펼치며 많은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리더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교정하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리더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리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자리에 있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으면서 말이다. 그럴 때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신뢰를 가진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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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균형과 성장 [제440호]
201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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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균형과 성장 신앙의 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단단한 음식을 먹을 만한 장성한 자로 자라가야 한다고 말했다(히 5:14).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선택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한다. 신앙의 성장을 인위적으로 거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성장을 원하지만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가로막혀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본질을 교묘히 가리고 인류에게 찾아와 죄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탄은 오늘날도 교리의 왜곡됨을 교묘하게 포장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을 미혹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있는 이때에 그리스도인은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맞서며 건강한 균형 속에 신앙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마지막 때의 거짓 교리와 도덕적 타협을 일깨우기 위해 쓰인 베드로후서의 마지막 구절인 3:18을 근거로 정리해 본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먼저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균형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이 부분을 주와 구주로 표현했다. ‘주’는 삶의 주인이자, 주권자의 능력을 강조한다. ‘구주’는 말 그대로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며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구속자, 해방자’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신앙은 사변적인 것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신 후에 다시 오시기 위해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에 우리의 믿음이 사변적일 수 없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산 믿음이요, 그 믿음은 삶 자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저 먼 곳 어디인가에 계신 분이 아니다. 우리의 영원을 책임지실 분으로 현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존재 역시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자들이다(엡 2:5~6). 그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시다(롬 8:34). 즉, 우리의 영원한 구주이시지만 지금이라는 현재의 삶에도 적극 개입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심을 신약은 다양하면서도 입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사실을 거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사소하게 생각한다. 신앙을 편안한 내세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현실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는 신앙을 이용할 뿐이다. 왠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편안한 삶의 훼방꾼인 것으로 오해하면서 말이다. 구주가 제시한 삶의 원리를 따르면, 자신을 우리의 삶의 주인이라 말씀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주님을 허용하면 삶의 다양한 불편함과 손해를 감내해야 한다는 왜곡에 속아 넘어간다. 그로 인해 삶에서는 주님을 떠나고 그분을 경외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당과 같은 특정한 장소에서만 주와 구주로 고백할 뿐이다. 사실 이러한 삶 자체가 악이요 고통(렘 2:44)인데 말이다. 건강한 성장은 균형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자 주님이라면 그분은 틀림없이 구주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구주시라면 우리는 그분을 삶의 주인과 주님으로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두 번째로는 믿음의 내용에 대한 균형이 필요하다. 즉, 은혜와 지식(진리)의 균형을 말한다. 우선은 우리의 믿음의 내용에는 은혜가 담겨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고 했다. C. S. 루이스는 기독교의 독특성은 ‘은혜’에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막연한 추상이 아니다. 은혜란 자격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로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의 상황 속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은혜의 경험과 깨달음이 없이는 자라지 못한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딛 2:11).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 속에 나타나는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으로 이끄는 에너지(힘)이 된다.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경험했다. 밤새도록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선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며 주님이 찾아오셨다. 자신의 노력과 실력이 아닌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낚았을 뿐만 아니라 호언장담 속에 주님을 끝까지 따를 것이라 했던 그는 유다의 배신으로 잡히시는 예수님을 뒤로 하고 멀리 도망갔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날 사랑하느냐?”라는 세 차례에 걸친 질문 속에서 주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며 사람 낚는 어부로서 삶과 사역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받았다. 이렇듯 은혜는 삶의 변화의 시작을 가져오고 지속적으로 삶이 변화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은혜 안에서 자라갈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푸실 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도와주셔야 하는 상황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분의 크심과 우리의 작음이 교차되는 곳에서 우리가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능력과 인간적 계산을 내려놓고 주님의 주 되심과 그분이 구주 되심을 인정하며 그 뜻에 합당한 생각과 행동, 결단과 선택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은혜 안에서 자라가도록 하는 최고의 방법이 될 것이다.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 단순한 정보와 지식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지식, 더 나아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끄는 지식이다. 경험된 지식이자 산 지식이다. 이것은 어떤 높은 수준의 일반 학문이나 그것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무시할 때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이단 혹은 일종의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우리에 의해 만들어진 신을 섬길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마크 A. 놀은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 지성이라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을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라 정의했다.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경험은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지식(지성 혹은 진리)이라 할 만한 내용도 없고 지식에 기반하지 않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며 단지 샤머니즘일 뿐이다. 호세야 선지자는 말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호 4:6).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고 그 안에서의 자라감이 없다면 결국 망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했던 공생애 기간 동안 성경이 곧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와 제자들을 만나 은혜를 경험하게 한 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 시편이 자신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눅 24:44).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혜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던 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선포하는 자로 폭풍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갈 수 있는가? 성경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암송하며 삶에 적용하라. 이 성경이 곧 우리의 주요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이러한 자라감은 단순히 믿음의 대상을 저 멀리 밀어 낸 추상적인 개념이나 관념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단지 내가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믿음이나 신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신앙은 삶 그 자체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감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분을 주와 구주로 고백함과 그 고백의 진실성을 삶으로 증명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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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오용에 빠지지 않기[제439호]
2017/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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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오용에 빠지지 않기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성경을 오용한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먼저 이 사람이 무엇을 성경의 권위와 같은 수준 위에 올려놓고 있는가에 대해 물어 보아야 한다. 이 사람은 ‘몰몬경’이나 ‘코란’과 같은 책 또는 특정 지도자나 설교자를 성경과 같은 수준에 올려놓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람은 성경이 참되다고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성경이 말하는 내용의 적절한 해석을 다른 문서나 다른 인물 위에 그 권위를 더 많이 두곤 한다. 성경과 병행되는 또 다른 권위가 있다고 제안하는 것은 사이비 또는 이단 종파에서 사용하는 전형적인 접근 방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휘튼 칼리지의 총장이었던 허드슨 아머딩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첫 번째, 어디에 궁극적인 권위를 두는지 살펴라.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하는 말에 대해, 그 사람은 어떤 것에 궁극적인 권위를 두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몰몬 교회 신자에게는 ‘값비싼 진주’와 ‘몰몬경’이 실제적으로 마지막 권위이며 신천지의 신자들에게는 ‘비유 풀이’가 최고의 권위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은 후대와 더 결정적인 계시의 조명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성경을 최우선의 위치에 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성경에서도 그들이 좋게 여기는 부분만을 받아들일 뿐이다.두 번째,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에 비추어 보라. 성경 해석이 과거 2,00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에 의하여 강조되지 않던 다소 새로운 교리 또는 다소 이상한 교리가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 연애가 이제까지 2,000년 동안 교회로부터 모호하게 해석되어 왔기에 이제는 이것이 바르게 해석되고 이해되고 있다며 옹호하며 합리화시킨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제까지 2,000년 동안 교회가 성경을 잘못 해석해 왔으며 약 100년 전부터는 자기들로 인해 성경이 비로소 바르게 해석되어 왔다고 주장한다.물론 우리는 이성적인 의심과 회의가 필요할 수 있다. 2,000년 교회사를 통하여 잘못된 성경 해석은 항상 있어 왔으며 이러한 성경의 오용과 남용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실족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는가에 대한 적절한 이성적 의심과 회의는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이 오용되지 않기 위한 중요한 경고이자 안전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세 번째, 성경 전체의 의미와 조화를 이루는지 확인하라. 우리는 성경의 구체적이며 특별한 부분의 의미가 성경 전체의 의미와 일치하며 조화를 이루는지 확인해야 한다. 육체적 건강과 물질적 부의 복음을 신봉하는 값싼 복음의 사람들은 성경의 문맥과 동떨어진 몇 개의 본문을 선택하여 그것을 규범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들이 규범으로 선택한 본문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부분이 성경이 가르치는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지 항상 조사를 해야 한다.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율법은 없고 오직 사랑만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또 이것이 의미 있는 관계라면, 어떠한 행위이든지 용납되고 용서해야 한다며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요한복음 14:15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경적 사랑에는 미리 요구되는 요소 즉, 그 사랑의 정의에 조화가 되는 요소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개념을 추출하여 그것을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연결시켜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네 번째, 성경 해석이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는지 진단하라. 만약 어떤 사람이 경험에 최우선적인 강조를 둔다면 우리는 일단 매우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개인적 경험이 보편적 원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성경을 해석하는 경향이 경험에만 기초를 둔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하며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 믿음을 위해서는 경험이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경험을 무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앙이 성경의 문맥을 떠나 오직 경험만을 의존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계시) 주시기 위해 성경을 주셔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생각과 제안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릴지라도 그것에 대해 늘 신중해야 한다. 또한 그것이 검증을 통해 증명되기까지 그것을 천천히 수용해야 한다. 만약 어떤 접근이 역사를 통하여 이해되어 왔던 교회의 해석과 다르다면 이러한 자세는 더욱 더 중요하다. 기도하며 성경의 내용을 곰곰이 생각하라. 그리고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유지하라. 어느 날 밤 매력 있는 어떤 사람과 대화한 낯선 교리가 그 내용이 그럴듯하다고 하여 쉽사리 받아들이는 일을 하지 마라. 함부로 확신하지 마라. 오늘날과 같은 마지막 때에 사탄의 가장 강력한 전략은 ‘미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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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지향(task-driven)과 목적 지향(purpose-driven) 사이에서 [제438호]
2017/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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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지향(task-driven)과 목적 지향(purpose-driven) 사이에서 당신은 일 지향(task-driven)의 목사인가? 아니면 목적 지향(purpose-driven)의 목사인가? 많은 목사가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많은 목사가 목적 지향이 되기보다는 그들의 임무를 단지 임무 그 자체로만 생각하여 단순히 행한다. 계획 된 일정상 지금이 설교할 때라거나 혹은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맞춰 그때그때 따라가곤 한다. 이러한 모습이 전형적인 일 지향적인 목사의 모습이다. 이러한 목사는 자신과 교인들을 위한 커다란 줄기의 목표에 따라 자기 역할을 바라보지 못하고 별개의 분리된 시각으로 바라본다. 자신이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의식을 상실하고 그저 설교하고 상담하는 일상의 일만 되풀이 할 뿐이다. 목사는 하나의 비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무런 경고도 없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목적에 초점을 맞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목사에게도 한밤중에 식은땀을 흘리고 육체적인 상처를 입고 감정적인 갈등이 몰려오는 때가 있다. 성장이 멈춰 버린 다른 사람을 섬기기는 것이 질리게 되는 시간이 찾아올지라도 목사는 하나님의 목적을 끝까지 견지해야한 한다. 만약에 목사가 그렇지 않으면 사역의 파도가 목사를 여기저기로 휩쓸어 버려 결코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향대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어떤 목사는 자신이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우연히 벌어지는 일을 감당할 준비는 되어 있지만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에는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론가를 향해 늘 하나의 목적을 의식하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단지 그들은 때마다 부딪히는 모든 필요에 그때그때 반응하기에 바쁘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는 개념은 낯설고 생소할 뿐이다. 목사는 위기 상황에 휘둘리면서 축구장의 왼쪽과 오른쪽 사이드만을 내달리는 자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심각한 위기 상황이 올지라도 말이다.     목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목적 지향적인(purpose-driven)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목적 지향은 맹목적 추구나 허망한 노력과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크다(엡 3:19). 또한 그것은 우리의 공허한 상상 그 이상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생각하실 수 있으며 우리에게 행하실 수 있는 것이다. 목사에게 목적 지향이란 제자를 삼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사역을 통해 성도를 구비시킴으로써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엡 4:7~16). 이러한 목적은 어느 때든지 늘, 동시에 목사를 이끌고 밀어 주며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 목적은 목사의 사고를 채워 주며 우리의 에너지를 쏟아붓게 하고 목사의 시간을 집중적으로 사용하게 만들며 삶이 하나님의 영광의 불꽃으로 타오르도록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확신을 가지고 이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가로막을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신의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것이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어떤 악의 세력도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목사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모든 악의 세력을 무찌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막는 유일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목사 자신일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고, 성령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목적 지향적이지도 않으며, 그저 급한 일에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만 하면서도 자신은 열심히 하고 있으며 괜찮은 목사라고 생각하는 목사일 경우 말이다.목사의 사역인 목회는 두서없이 벌어지는 사건들을 수습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제아무리 큰 파괴력을 지닌 파도가 몰려온다고 할지라도 목사는 분명한 초점과 의도, 목적 의식을 가지고서 목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위의 글은 빌 로렌스의 『주님의 양을 치라』(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하여 수정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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