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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서를 설교하기 [제434호]


관리자   조회 : 292, 등록일 : 2017/08/08 10:55

 

선지서를 설교하기



구약의 선지서는 딱딱하고 재미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어 가노라면 왠지 모를 책망이나 꾸지람을 받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선지서를 향한 우리의 선입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나 성도에게 선지서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이 있기에 꼭 들어야 할 중요한 본문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손 때가 묻지 않은 책으로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구약 선지서의 메시지는 오늘날 더 강력하게 선포되며 신약의 복음처럼 설교되어야 한다.

선지자들의 책은 책의 형태로 전달된 그들의 설교이다. 설교자의 역할은 그들의 책을 설교하는 것이며 또한 설교자는 각 선지서의 책의 저자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선지서를 설교하는 것은 선지자들의 말을 새롭고 다른 세팅에서 반복하는 것 이상의 일이며 선지자를 이해하고 설교하기 위해서는 책과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법을 아는 실력 있는 독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선지서를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선지자들이 그들 자신의 시대에 설교했던 것을 설교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고대 선지자들이 그들의 맥락에서 전한 메시지와 우리가 오늘날 전하는 메시지 사이에는 신학적, 사회적, 정치적인 다양한 차이가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차이점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는 것이다. 모든 설교자는 개인적으로 어디서 선을 그을 것인지를 또한 결정해야 한다.

월터 카이저 박사의 경우는 성경의 선지자들이 사회적 구조와 제도를 향해 설교했다는 개념을 거부하며 선지자들이 개인적 호소에만 근거해서 국가 전체를 향해 외친 것으로 선을 긋는다. 그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언제나 개인적 구원에 관한 것으로 보았다. 선지자들을 대중을 동원하고 거대한 규모의 사회적 변화를 꾀하는 2세기 혁명가들의 선구자들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선지자들을 도리어 그들의 공적 사역 전반에 걸쳐서 언제나 개인들을 향해 메시지를 전했다고 생각했다.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집단적인 물리적, 정치적 환경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를 제공했으며 각 개인의 마음의 변화의 결과로 뒤따르는 사회적 구조에서의 변화의 가능성을 장차 하나님이 하실 일로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선지서들 안에서 메시지를 찾을 수있을까? 선지자들을 어떤 특정한 사회적 세팅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로 보기보다는 책의 저자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선지자들의 설교를 다룰 때 중심 초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약학 교수 존 세일헤머(John H. Sailhamer) 의 조언스캇 깁슨, 구약을 설교하기(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에 귀를 기울여 보았으면 한다.

첫째, 고대의 선지자와 그의 메시지를 그가 속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이해하며 우리에게 그들의 영감된 글을 통해 고대 선지자들의 말을 전해 주는 성경 저자들의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의 균형을 이루기가 쉽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이중 어느 쪽의 초점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선지자의 메시지를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과 사상을 재구성한 것에 국한시킨다면 선지자들의 의미를 부당하게 과거의 사건과 세팅에만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설교자가 설교해야 할 선지자들의 말은 선지자들의 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말씀이다. 선지자의 메시지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선지자들이 신약의 신학과 함께 한 데 모여야 할 지점은 같은 장소이어야 한다. , 성경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선지서에서 설교하는 것은 저자가 선지서 안에서 횡단한 생각의 길과 그 책의 -역사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서의 메시지를 아는 것은 그 메시지가 구약의 나머지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신약 안에까지 통과한 길을 따라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그들의 책에 구현되어 있는 대로 신약 저자들의 메시지와 동일하게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선지자 자신과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 어느 정도 역사적 거리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선지 문학의 한 부분으로서 선시자의 메시지는 그들의 책에 구현되어 있는 대로 우리가 신약에서 보는 신학의 근거가 된다. 우리가 오늘날 선지서를 설교하는 것은 그 신학의 문맥 안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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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본연의 모습의 회복을 위해[제447호]
20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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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본연의 모습의 회복을 위해 신자인 우리의 부르심은 거룩에로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거룩하기를 원하신다(레 11:44, 벧전 1:16). 이러한 거룩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며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와 다른 분이시다. 신자인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된 자로 존재해야 함을 내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어디에 있든지 그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눈에 띈다. 그 시대의 문화나 사회 통념에 적응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더 높은 가치를 붙잡고 사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이 명시하신 삶의 기준, 더 나아가 빛과 소금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이 땅을 사는 이들이기에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것으로 채워지고 있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그 시대의 정신이나 비신자들과의 갈등과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 갈등의 어느 한 지점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신자들의 신뢰성과 매력성을 바탕으로 기가 막힌 반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신자를 향하여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거룩에로 부름받고, 더 높은 기준과 구별된 삶을 요청받는 우리는 혼탁한 이 세상에서 신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신약성경과 사복음서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래리 허타도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도서출판 이와우)에서 기독교와 신자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몇 가지를 언급하며 도전한다. 첫째, 신앙에서 요구하는 행동 규범에 맞게 살라.초기 기독교가 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요구하는 일상의 행동은 로마시대에 이방인들이 관용하거나 심지어 찬성했던 행동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확연히 구분되었다. 초기 기독교의 행동 규범과 당시의 일부 철학 학교에서 지지하던 규범 사이에는 일부 유사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공통점을 감안하더라도 초기 기독교의 행동 규범이 역사적으로 미친 영향을 고려하면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과 로마시대의 철학적 교훈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모든 사회 계층의 기독교 신자들은 세례를 받은 순간부터 기독교 신앙에서 요구하는 행동 규범에 맞게 살아야만 했다. 초기 기독교는 신자에게 요구되는 행실을 ‘집회에서 공론화’함으로써 새로운 사회 운동을 펼친 셈이다. 둘째, 신앙의 신념을 반영하여 그 시대를 선도하라.특정한 행동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신념에는 예수 운동을 배태했던 유대교의 배경이 반영되어 있다. 특정한 행동을 통해 집단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노력한 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의 행동 규범은 유대교와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었는데 이는 예수 신앙과 관련한 신념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당시의 이중 잣대에 문제를 제기하고 아동의 성적 착취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는 새로운 용어를 만드는 등 성적인 문제와 관련해서도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은 남달랐다.     셋째, 모이기를 더욱 힘쓰라.초기 기독교의 행동 규범은 사회적 신분이 다른 다양한 신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독특한 집회 환경에서 전달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사회적 신분에 해당하는 규범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떤 행동 규범을 따라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분명 신자들 사이에 올바르게 행동해야 하는 공동의 책임감을 강화하는 효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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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은혜를 통해 하시는 일 [제446호]
2017/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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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은혜를 통해 하시는 일     바울! 그는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열심으로 무장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기세등등하여 발걸음을 옮기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다. 그의 인생은 바른 열심과 바른 방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주님을 만난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깨닫고 그 은혜의 선물에 따라 이방을 위한 복음의 일꾼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바울만큼 은혜라는 단어를 즐겨 쓴 이는 없다. 신약의 바울이 쓰지 않은 책 전체 512쪽에서 ‘은혜’라는 단어는 51회 사용되었지만, 바울이 쓴 서신의 전체 156쪽 분량에서 101회나 사용되었다. 그 만큼 ‘카리스/은혜’라는 단어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과 인간의 삶, 더 나아가 자신의 사명을 이해했다. 은혜는 그로 하여금 복음의 이해와 선포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되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에베소서 3:7~8) 위의 성경 말씀은 거저 주어지는 선물인 ‘은혜’에 기초한 바울의 고백이다. 이 성경 말씀은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시는지 그리고 그 결과 자기 존재에 대한 커다란 인식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어떠한 일을 하시는가?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가장 위대한 일을 사람에게 맡기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이자 은혜의 통로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이들은 삶의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깊이 깨닫는다. 하나님은 그러한 깨달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신다. 더 이상 은혜를 경험하기 전의 모습과 자기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그 무엇을 향하여 열심을 내며 살아가지 않도록 하신다. 더 이상 헛 된 것을 위하여 새로워진 인생을 소진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섬김에서 특별한 과업을 부여한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우리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하신다. 가장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지극히 작은 자 중에 더 작은 바울에게 가장 큰 것(복음을 전하는 것)을 맡기셨다. 자신이 큰일을 맡았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 일의 크기와 규모에 따라 자신을 큰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바울은 가장 크신 하나님에게서 큰일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그 일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지 않는다. 도리어 크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장 큰 것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장 작은 자 중에서 더 작은 자로 고백한다. 자기는 가장 큰 일을 감당하기에 결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작게 여기는 낮아짐이 하나님의 은혜의 한복판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지금도 당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당신에게 부여된 특별한 과업을 감사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당신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로 고백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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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제445호]
201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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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     오래 전 개그프로그램의 한 코너에 “불편한 진실”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진실을 말했으나 그 진실을 들은 우리는 무척이나 불편해 하는 상황들을 이야기 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코너이다. 주로 남녀간의 상황을 두고 이야기 했으나 이 코너를 보며 하나님에 대해 또 나의 신앙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다.     설교 말씀을 듣다가 불편한 진실을 말씀하시면 불편하다며 귀를 닫았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특별히 믿음에 관한 주제에서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사역지를 정할 때에는 사례비 걱정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교회에 가서 사역하라는 선배목사님들의 말씀에 나의 믿음 없는 것이 아닌 현실이 그런 것이다. 나만 그러는게 아니다. 생각하며 불편해 했다.     믿음으로 산다고 자신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바다 위를 걸을 수 있고, 번지점프대에 있어도 두렵지 않고 직장에서 퇴사하더라도 걱정이 없다는 설교 말씀을 들으며 ‘목사님이 먼저 해보세요’라는 속마음으로 불평을 했다.     그래도 부모님이니 아무리 속이 상하고 나를 힘들게 해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조언에 그저 웃고 말았던 그때의 모습들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기만 하다.     사역자로서의 품위와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 불편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하며 회피하거나 가면을 쓰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길 바란다. 올바른 일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 일에 대해 올바른 말을 하는 성도들의 소리를 불편하다며 무시한 채 강행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다. 불편한 진실 때문에 바리새인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온다 하여도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으로는 결코 어떠한 유익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도 말고 도망가지도 말자. 부끄럽겠지만, 도망가고 싶겠지만, 가면으로 가리고 싶겠지만, 오히려 불편한 진실 앞에 당당히 서자.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던지 하나님은 기뻐해 주실 것을 분명히 믿는다면 말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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