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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서를 설교하기 [제434호]


관리자   조회 : 226, 등록일 : 2017/08/08 10:55

 

선지서를 설교하기



구약의 선지서는 딱딱하고 재미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어 가노라면 왠지 모를 책망이나 꾸지람을 받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선지서를 향한 우리의 선입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나 성도에게 선지서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이 있기에 꼭 들어야 할 중요한 본문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손 때가 묻지 않은 책으로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구약 선지서의 메시지는 오늘날 더 강력하게 선포되며 신약의 복음처럼 설교되어야 한다.

선지자들의 책은 책의 형태로 전달된 그들의 설교이다. 설교자의 역할은 그들의 책을 설교하는 것이며 또한 설교자는 각 선지서의 책의 저자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선지서를 설교하는 것은 선지자들의 말을 새롭고 다른 세팅에서 반복하는 것 이상의 일이며 선지자를 이해하고 설교하기 위해서는 책과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법을 아는 실력 있는 독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선지서를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선지자들이 그들 자신의 시대에 설교했던 것을 설교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고대 선지자들이 그들의 맥락에서 전한 메시지와 우리가 오늘날 전하는 메시지 사이에는 신학적, 사회적, 정치적인 다양한 차이가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차이점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는 것이다. 모든 설교자는 개인적으로 어디서 선을 그을 것인지를 또한 결정해야 한다.

월터 카이저 박사의 경우는 성경의 선지자들이 사회적 구조와 제도를 향해 설교했다는 개념을 거부하며 선지자들이 개인적 호소에만 근거해서 국가 전체를 향해 외친 것으로 선을 긋는다. 그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언제나 개인적 구원에 관한 것으로 보았다. 선지자들을 대중을 동원하고 거대한 규모의 사회적 변화를 꾀하는 2세기 혁명가들의 선구자들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선지자들을 도리어 그들의 공적 사역 전반에 걸쳐서 언제나 개인들을 향해 메시지를 전했다고 생각했다.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집단적인 물리적, 정치적 환경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를 제공했으며 각 개인의 마음의 변화의 결과로 뒤따르는 사회적 구조에서의 변화의 가능성을 장차 하나님이 하실 일로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선지서들 안에서 메시지를 찾을 수있을까? 선지자들을 어떤 특정한 사회적 세팅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로 보기보다는 책의 저자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선지자들의 설교를 다룰 때 중심 초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약학 교수 존 세일헤머(John H. Sailhamer) 의 조언스캇 깁슨, 구약을 설교하기(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에 귀를 기울여 보았으면 한다.

첫째, 고대의 선지자와 그의 메시지를 그가 속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이해하며 우리에게 그들의 영감된 글을 통해 고대 선지자들의 말을 전해 주는 성경 저자들의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의 균형을 이루기가 쉽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이중 어느 쪽의 초점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선지자의 메시지를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과 사상을 재구성한 것에 국한시킨다면 선지자들의 의미를 부당하게 과거의 사건과 세팅에만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설교자가 설교해야 할 선지자들의 말은 선지자들의 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말씀이다. 선지자의 메시지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선지자들이 신약의 신학과 함께 한 데 모여야 할 지점은 같은 장소이어야 한다. , 성경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선지서에서 설교하는 것은 저자가 선지서 안에서 횡단한 생각의 길과 그 책의 -역사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서의 메시지를 아는 것은 그 메시지가 구약의 나머지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신약 안에까지 통과한 길을 따라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그들의 책에 구현되어 있는 대로 신약 저자들의 메시지와 동일하게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선지자 자신과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 어느 정도 역사적 거리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선지 문학의 한 부분으로서 선시자의 메시지는 그들의 책에 구현되어 있는 대로 우리가 신약에서 보는 신학의 근거가 된다. 우리가 오늘날 선지서를 설교하는 것은 그 신학의 문맥 안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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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8)선지서를_설교하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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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넝쿨에 사로잡힌 사명자[제435호]
20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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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넝쿨에 사로잡힌 사명자       오늘날의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원망의 말’이라 한다. 가난, 환경, 건강, 자신이 처한 운명을 때문에 자신과 타인, 혹은 하늘을 바라보며 신을 향하여 원망한다. 이러한 원망은 결국 분노와 성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원망과 성냄은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의 여정을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 원망을 많이 하는 우리조차 “너무하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다.    홍해 앞에 서게 된 그들,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 보다 낫다고 원망한다(출 14장). 홍해를 건넌 후, 마라의 쓴 물 앞에서(출 15장) 원망한다. 배고픔을 호소하며 원망하며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라 말한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추라기를 먹던 그들은 자신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값없이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을 먹었다(민 11장)고 원망했다. 열두명의 정탐꾼이 40일간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거늘 왜 칼에 쓰러지게 하는가”(민 14장) 라고 원망했다. 이러한 원망의 뒤 끝은 항상 분노와 성냄으로 연결되었다.한 개인으로서 하나님께 상당한 분노를 표출했던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요나’가 떠오른다. 불만이 가득한 상태에서 다시스를 향한 배에 몸을 싣고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뒤로 한 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던 그에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다시금 사명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보통 사람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3일 밤낮을 큰 물고기의 배속에 갇히는 독특한 경험속에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시금 니느웨로 발걸음을 옮긴다. 삼일동안 걸어야 할 만큼 큰 성읍이었던 니느웨를 하루 동안만 다니며 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의 메시지에 니느웨 성의 임금과 그의 대신들, 그리고 모든 백성과 그들의 가축까지도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니느웨와 모든 백성들은 새로운 회복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니느웨성의 상황 반전이 요나에게 큰 기쁨이 되어야 하지 않았는가? 사명자로서 그 사명을 완수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는 현장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지 않으심을 목격하며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도리어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 요청하기 까지 한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분노로 표출하면서 말이다. 성읍 동쪽에 앉아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하나님이 박넝쿨을 통해 제공하는 그늘에 앉아 있는다. 그때 요나는 이 박넝쿨로 인하여 크게 기뻐한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일 뿐 하나님이 보내신 벌레로 인해 박넝쿨이 사라지고 뜨거운 동풍으로 인해 고통이 찾아오자 요나는 박넝쿨로 인하여 크게 원망하며 성낸다.       박넝쿨로 인해 크게 기뻐하고, 박넝쿨로 인해 크게 분노하는 요나의 모습속에서 혹시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명자인데, 하나님을 위해 선택된 자 인데,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모습. 사명과 관련된 거룩한 분노와 기쁨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박넝쿨과 같은 것에 감정의 양극을 오가며 휘둘리는 자의 모습이 소위 사명자라고 하는 우리의 모습처럼 느껴지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라 해야 할까? 박넝쿨로 인해 요동하는 요나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명자로 더욱 회복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가 원하는 곳을 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는 것을 기뻐하자.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서 앗수르의 니느웨 까지는 약 880km의 거리이다. 하루 30km를 걸어도 한 달은 족히 걸리는 멀고도 험한 여정이다. 편안하고 익숙한 곳, 여전히 이 곳에서도 찾아보면 많은 할 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셔서 가라하신 분명한 곳이 있다면 사명자는 바로 그 곳에 있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곳, 내게 익숙한 곳, 내게 편안함을 주는 곳, 박넝쿨로 그늘이 깃드는 곳에서 자신에게 찾아온 유익과 환경으로 인해 기뻐하는 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자신의 기쁨을 마치 하나님의 기쁨인양 착각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자리에 있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자가 되자. 사명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자리를 고수하며, 내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박넝쿨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나’가 되지 말자.       둘째, 우리의 괴로움이 걷히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괴로움이 걷히는 것을 더욱 기뻐하자.  부모의 가장 큰 소원은 자녀의 행복이다. 어떤 부모도 자녀가 멸망되는 삶을 살고 저주 아래 놓이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없다. 자녀가 당하는 괴로움을 보며 그것을 즐길 부모도 없다. 자녀가 악한 길로 가며 삶을 망치고 있을 때, 그 것을 방관하는 부모도 없다. 이러한 부모의 본능은 하나님께로 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 어떤 민족도 그들의 악으로 인해 멸망당하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이 괴롭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다. 이 일을 위해 사명자인 요나를 보냈지만 그는 그렇게 까지 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 그 분의 괴로움에는 관심이 없었다. 뜨거운 열기로 인한 자신의 괴로움이 사라지게 한 박넝쿨로 인해 기뻐하고, 그 열기를 막아주는 박넝쿨이 사라짐으로 또 다시 찾아온 괴로움에 분노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한 영혼을 사랑하시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멸망의 길로 가는 이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가 되자.       셋째, 우리가 아끼는 것을 넘어 하나님이 아끼는 것 때문에 기뻐하자.  우리는 연약한 자들이다.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내가 수고나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게 이익을 주기에 마음을 주며 아끼고 소중히 여기기까지 한다. 요나에게 있어서 박넝쿨이 그러한 것이었다면 우리에게도 그러한 박넝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사명을 받은 자라면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박 넝쿨과 구원 받아야 할12만명의 사람들. 내 자신이 아끼는 박넝쿨과 하나님이 아끼시는 12만명의 사람들. 무엇을 더 아끼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박넝쿨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무엇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잊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나를 위한 박넝쿨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늘 헤아리는 사명자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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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서를 설교하기 [제434호]
201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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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서를 설교하기구약의 선지서는 딱딱하고 재미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어 가노라면 왠지 모를 책망이나 꾸지람을 받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선지서를 향한 우리의 선입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나 성도에게 선지서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이 있기에 꼭 들어야 할 중요한 본문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손 때가 묻지 않은 책으로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구약 선지서의 메시지는 오늘날 더 강력하게 선포되며 신약의 복음처럼 설교되어야 한다.    선지자들의 책은 책의 형태로 전달된 그들의 설교이다. 설교자의 역할은 그들의 책을 설교하는 것이며 또한 설교자는 각 선지서의 책의 저자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선지서를 설교하는 것은 선지자들의 말을 새롭고 다른 세팅에서 반복하는 것 이상의 일이며 선지자를 이해하고 설교하기 위해서는 책과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법을 아는 실력 있는 독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선지서를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선지자들이 그들 자신의 시대에 설교했던 것을 설교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고대 선지자들이 그들의 맥락에서 전한 메시지와 우리가 오늘날 전하는 메시지 사이에는 신학적, 사회적, 정치적인 다양한 차이가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차이점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는 것이다. 모든 설교자는 개인적으로 어디서 선을 그을 것인지를 또한 결정해야 한다.  월터 카이저 박사의 경우는 성경의 선지자들이 사회적 구조와 제도를 향해 설교했다는 개념을 거부하며 선지자들이 개인적 호소에만 근거해서 국가 전체를 향해 외친 것으로 선을 긋는다. 그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언제나 개인적 구원에 관한 것으로 보았다. 선지자들을 대중을 동원하고 거대한 규모의 사회적 변화를 꾀하는 2세기 혁명가들의 선구자들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선지자들을 도리어 그들의 공적 사역 전반에 걸쳐서 언제나 개인들을 향해 메시지를 전했다고 생각했다.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집단적인 물리적, 정치적 환경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를 제공했으며 각 개인의 마음의 변화의 결과로 뒤따르는 사회적 구조에서의 변화의 가능성을 장차 하나님이 하실 일로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선지서들 안에서 메시지를 찾을 수있을까? 선지자들을 어떤 특정한 사회적 세팅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로 보기보다는 책의 저자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선지자들의 설교를 다룰 때 중심 초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약학 교수 존 세일헤머(John H. Sailhamer) 의 조언〔스캇 깁슨, 『구약을 설교하기』(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에 귀를 기울여 보았으면 한다.  첫째, 고대의 선지자와 그의 메시지를 그가 속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이해하며 우리에게 그들의 영감된 글을 통해 고대 선지자들의 말을 전해 주는 성경 저자들의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의 균형을 이루기가 쉽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이중 어느 쪽의 초점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선지자의 메시지를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과 사상을 재구성한 것에 국한시킨다면 선지자들의 의미를 부당하게 과거의 사건과 세팅에만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설교자가 설교해야 할 선지자들의 말은 선지자들의 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말씀이다. 선지자의 메시지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선지자들이 신약의 신학과 함께 한 데 모여야 할 지점은 같은 장소이어야 한다. 즉, 성경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선지서에서 설교하는 것은 저자가 선지서 안에서 횡단한 생각의 길과 그 책의 ‘후-역사’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서의 메시지를 아는 것은 그 메시지가 구약의 나머지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신약 안에까지 통과한 길을 따라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그들의 책에 구현되어 있는 대로 신약 저자들의 메시지와 동일하게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선지자 자신과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 어느 정도 역사적 거리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선지 문학의 한 부분으로서 선시자의 메시지는 그들의 책에 구현되어 있는 대로 우리가 신약에서 보는 신학의 근거가 된다. 우리가 오늘날 선지서를 설교하는 것은 그 신학의 문맥 안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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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발은 옳지 않다 [제433호]
201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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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발은 옳지 않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최근 연예인들의 열애 기사가 연속적으로 있었다. 정말 열애가 아닌 것도 있지만 열애가 사실인 경우의 기사의 공통점이 있다면 처음 기사가 났을 때 “사실이 아니다”라는 공식입장을 먼저 냈고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교제를 시작했다”라며 인정했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혼이 날 때,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적을 받았을 때 우리는 “죄송합니다”보다는 일단 “아닙니다”라고 먼저 이야기하고 보지만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잘못을 바로 인정하는 것이 차라리 덜 혼이 나고 덜 창피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아담과 하와 역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대답하였다. 책임을 여자에게 넘기는 동시에 나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사울왕도 아말렉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명하신 명령을 어기고 좋은 양과 소들을 남기고는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삼상 15:15)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반면,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을 살해한 후 나단 선지자의 꾸중을 듣자마자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a)라고 곧바로 회개하였다. 비록 죄에 대한 대가를 혹독히 치른 다윗이지만 그 일을 계기로 철저히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개하였고 꿈에 그렸던 성전 건축을 포기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사도 바울 역시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지만 예수님을 만난 자리에서 회개하였고 누구보다 활발히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신다. 침묵하셔서 괜찮은 것으로 우리가 착각하는 것일 뿐 하나님 앞에 무수히 많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남들은 저렇게까지 하는데 난 이정도면 괜찮은 거 아냐?’라고 생각하거나 앞뒤 없이 일단 아니라고 말하는 식의 오리발은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죄라도 죄는 죄이다. 목사라서, 리더라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해서, 잘못을 인정하면 진행하는 일에 차질이 있다는 핑계를 대면 댈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욱 창피해질 뿐이다.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하자. 그러면 그분은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 게다가 다시는 그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을 힘을 주신다. 결코 오리발은 옳지 않다. 반드시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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