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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행복, 우리의 행복 [제473호]


관리자   조회 : 207, 등록일 : 2018/05/15 15:49

 

하나님의 행복, 우리의 행복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려면 반드시 행복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우리가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창조와 구속에 능동적으로 임하신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결국 불행만 남기지만, 예수님은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생명을 통해 우리에게 궁극적 행복을 주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한히 행복하시다.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다. 그분의 행복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한다.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면(롬 12:2) 행복하신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진다. 우리의 행복은 점점 더 커져간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행복이 흘러넘친 결과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선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나님은 당신이 지은 모든 것을 보시며 행복해 하셨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행복은 창조의 목적이다. 창조주께서 세상을 지으신 동기는 분명히 그분의 선하심이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피조물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신다”라고 썼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4, 7). 창조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아버지인 하나님께 반응했다는 뜻이다. 그분이 창조하신 웅장한 세계 속에 그분 자신의 즐거움이 흘러넘쳤다.

 

모든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행복을 반사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동물들을 보며 행복해하셨다.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욥 39:19, 21~22, 24~25).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말을 마냥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타락한 창조 세계를 여전히 사랑하셔서, 그것을 멸하시기는커녕 자신과 우리가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것을 구속하려고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불행한 구원을 보내실 리가 없다. 행복하신 창조주는 또한 행복하신 구주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기뻐하여 즐거이 노래하신다.

 

스바냐 3:14에 하나님은 행복을 뜻하는 네 개의 서로 다른 히브리어 단어를 써서 자기 백성에게 기뻐할 것을 명하신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린나, rinnah)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루아흐, ruah)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사마흐, samach) 즐거워할지어다(알라즈, alaz)”

그야말로 즐거움이 철철 넘쳐흐르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시다면 결코 자기 백성에게 이런 행복을 명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데 세 구절 후인 스바냐 3:17에 보면 더 놀라운 진술이 나온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심하, simchah)을 이기지 못하시며(수스, sus)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길, gil) 기뻐하시리라(린나, rinnah)” 이 구절 하나에만도 하나님의 행복과 자상하심과 사랑이 가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며 행복해하신다.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은 행복해하신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5:6에 보여주신 하나님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라고 하시는 목자이다. 잃은 양을 찾아서 아주 행복해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 또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분개하는 형을 향하여 말한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행복해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왜 아버지는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을까?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에 충실하게 행동하시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행복하시기에 즐거워하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행복해하신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하나님은 혼자서만 행복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즐거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시 36:7~8). 이 구절이 가르치는 바에 대하여 1868년에 미국의 신학자 앨버트 반즈(Albert Barnes)는 이렇게 주해했다.

 

1) 하나님은 행복하시다. 2) 신앙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3)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행복과 본질 내지 성격이 같다. 4) 이 행복은 본질상 만족을 준다. 즉, 영혼의 참된 필요를 채워준다. 5) 그것은 풍성하여 영혼의 어떤 필요도 채워지지 않은 채로 두지 않는다. 6) 이 행복은 …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시편 기자가 고백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기뻐할 때 즐거워하신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로라”(시 104:34). 생각해 보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우리는 바다 같은 하나님의 행복을 즐거워하고 그분은 시내 같은 우리의 행복을 즐거워하신다!

우리는 행복을 원하며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의 행복 안에 감추어져 있다. 즉,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아하실 만한 것들을 향하여 먹고 마시며 수고하고 낙을 누릴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이 만족해하시며 심히 좋아하시는 그분의 행복 속에서 우리 또한 진짜 행복을 경험한다.



(2018.05.14)_하나님의_행복_우리의_행복.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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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하는 10가지 이유[제491호]
201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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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하는 10가지 이유 목회자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되게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반드시 목회 철학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50년간 한 교회를 섬기며 말씀으로 그 사역을 감당한 존 맥아더 목사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하는 10가지 이유를 통해 오늘날의 많은 목회자에게 강력한 도전을 준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영원하며 참된 능력이 있다.아직도 성경을 설교하는 주된 이유는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신성으로 가득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신선함과 풍성함 그리고 가르침의 깊이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고갈시키지 않는다. 저자 되신 분이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문화가 어떤 변화를 겪든지 하나님의 메시지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말했다. 영적인 대답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신 것에 집중해야 한다. 성경은 ‘주의 마음’을 알려준다. 목회자는 가장 심오하면서도 영원한 필요를 설교하지 않으면서, 현세의 피상적인 것에 정력을 기울이는 모습은 피해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진리를 명쾌하고 확실하게 설명한다.하나님은 사람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을 계시하셨다(시 119:105, 130). 하나님이 말씀을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계시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이에 대해 책임이 있다. 성경이 명료하지 않다면 모든 성경적 교리는 확실성이 결여되고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성경의 권위에 근거를 둔 교리적 확실성이 흔들리게 되면 개인적인 확신도 근거를 갖지 못하므로 틀림없이 흔들린다. 4.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믿을 만한 자기 계시이다.설교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하나님의 권위를 세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회중은 그들의 영혼에 대한 주권을 누가 가졌는지 이해한다. 하나님의 대사로서 설교자의 직무는 자신의 사상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왕을 올바르게 대변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사람의 마음에 나타내는 것이다. 5.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높인다.강해 설교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높인다. 교회의 참된 머리에 대한 반란은 대부분 성경 말씀을 고의적으로 약화시키는 데서 나타난다. 성경을 배제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실질적으로 잠재웠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성경을 치워 버리는 것은 유일하게 교회의 정당한 머리 되신 분에게 반기를 드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분의 백성에게 전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효과적으로 높이는 것을 뜻한다. 6. 하나님의 말씀은 백성의 성화를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과 성화에 사용하신다. 말씀과 성령은 목회에 있어 불가분의 관계이다. 성령은 말씀을 기록하는 인간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생기를 불어넣는 분이며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 성경을 펴고 성경이 뜻하는 것과 교리가 확증하는 것을 회중에게 전해야 한다. 성령이 진리를 사용하여 자원하는 영혼에게 위로와 확신을 줄 것이다. 설교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선포함으로써 성화된다. 7.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른 예배와 실천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성경은 예배의 실상과 진실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회중이 탁월한 예배를 경험하는 정도는 그들이 신령한 진리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가장 큰 기쁨과 감격으로 예배한다. 강해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회중을 많은 오류와 세상적인 욕심에서 보호하며 참된 예배로 정확히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순결한 실천으로 이끈다. 8. 하나님의 말씀은 깊이 있고 균형 있는 목회를 이룬다. 지속적인 성경 강해는 설교자의 믿음과 실천이 모든 성경 본문을 통해 검증된다. 설교자의 삶과 교리는 반드시 성경의 모든 각 구절로 검증을 받아야 한다. 큰 그림으로 볼 때 절 단위나 성경의 각 권 단위로 하는 설교는 목회에 신령한 균형을 가져온다. 그런 설교는 설교자가 사안을 무시하거나 자기 자랑에 빠지는 것을 예방한다. 설교자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에 집중하여 지속적이고 정확하게 성경을 설교하도록 부름 받았다. 강해 설교는 설교자가 하나님이 계시하신 방식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도록 요구한다.  9. 강해된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 개인의 성경 연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목사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친다면 그는 동시에 회중에게 개인적인 성경 공부의 가치와 축복에 대해 설명하게 된다. 사람들은 목사를 통해 말씀의 능력을 강력하게 체험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를 통해 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격할 때 회중은 그런 목사의 본을 따르려는 동기를 얻는다. 10. 하나님의 말씀은 목회에 대한 신령한 기초를 확립한다.말씀 설교에 집중하는 목회는 당연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목회이다. 수법이나 책략에 의지하기보다 내용과 방향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한다. 성경을 깊이 있고 지속적이며 정확하게 가르치는데 집중해야 한다. 목사가 자신의 사상이 아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 그런 모습을 통해 그가 결과에 대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가르쳐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역사하는 이는 성령이시며 그분의 능력이 사람을 확신에 이르게 하며 변화시킨다. 설교자는 단지 메시지를 충성스럽게 전하기만 하면 되며 회중이 이에 반응할 때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신다.  - 위의 글은 존 맥아더 목사의 ‘Together for the Gospel’ 컨퍼런스에서의 강의 내용을 요약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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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살피는 지혜[제490호]
201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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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살피는 지혜 ‘내 현재 상황에 비추어 무엇이 지혜로운 길인가?’인생에도 계절이 있다. 오늘의 슬픔은 내일의 기쁨에 밀려날 것이다. 오늘의 분노는 아마도 내일의 넓은 시야로 다스려질 것이다. 오늘의 염려는 내일의 관심사로 대체될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날마다 그날의 염려가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의 즐거움, 두려움, 상황에 떠밀려 자칫 내일 후회할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결정을 내릴 때 당신의 현재 감정과 마음 상태를 감안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연한 일이다. 순간에 반응하는 성향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비는 일이 생긴다. 과잉 반응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었음을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는 경우가 많다. 보내고 나서 후회한 이메일이 적지 않다. 최소한 24시간만 기다렸어도 좀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화가 났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것임을 깨닫기도 한다. 순간을 넘어인생 대질문의 각도는 순간을 넘어선다. 삶의 이번 계절에서 지혜로운 길이 다음 계절에는 지혜롭지 못할 수도 있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예를 들어, 나는 여자들이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을 문제로 보지 않는다. 훌륭한 여자 교역자들이 없다면 우리 교회는 기능이 정지될 것이다. 그러나 일부 여자들의 경우, 인생의 특정한 시기 동안 집 밖에서 직장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은 아니다. 질문은 ‘여자들이 집 밖에서 일해야 하나?’가 아니다. ‘여자인 아무개가 집 밖에서 일해야 하나?’도 아니다. 일하는 엄마들이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인생의 이 특정한 계절에 내가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인가?’ 현재 맞이하고 있는 삶의 계절에 비추어 그것이 지혜로운 선택인지를 항상 고민하며 기도함으로써 결정해야 한다. 결정 보류목사라면 누구나 이혼과 재혼을 둘러싼 문제로 씨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고통스러운 이혼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 많다. 동시에 상처 입은 그들은 반려자를 원한다. 이혼 서류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미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 있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관계를 찾고 있다.반려자를 원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힘든 시기가 끝난 마당에 다음 단계의 삶으로 넘어가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진짜 관건은 그것이 아니다. 인생에서 이러한 힘든 계절을 맞은 독신 남녀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방금 지나온 일, 현재 내 마음 상태, 내 지친 감정에 비추어 무엇이 관계적으로 지혜로운 길인가?’주변을 보면 결혼까지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을 자기네 부부 문제의 원인으로 꼽는 사람은 여태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더 기다렸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이 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며그러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당신의 삶에 비추어 무엇이 당신에게 지혜로운 길인가? 당신의 심기와 정서 상태, 심지어 신체적 건강을 감안할 때 무엇이 지혜로운 길인가? 지금부터 1년 후면 중요한 요인이 아닐 수도 있는, 현재 당신이 맡은 책임과 헌신을 감안할 때 무엇이 지혜로운 길인가? 현재 당신의 재정 상태를 감안할 때 무엇이 지혜로운 길인가?인생은 계절을 탄다. 오늘 적절한 것이 지금부터 한 달 후면 전혀 부적절할 수 있다. 무엇이 합법적이고 무엇이 가능한지, 심지어 무엇이 실제적인지 결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당신은 다른 기준으로 삶에 임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 과거의 경험과 현재 삶의 계절에 비추어 무엇이 내게 지혜로운 길인가?’  -  위의 글은 앤디 스탠리, 『인생 대 질문 (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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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청지기[제489호]
201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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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청지기   청지기직은 우리 모두가 배우고 자라가야 할 기독교 제자도의 핵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게을러지기가 아주 쉽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부르심을 더 깊이 이해하고 거기에 더 깊이 헌신하는 것이 주님의 열망이다. 출발점은 당연히 우리 자신, 곧 우리의 몸과 사고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하나님은 인간을 몸과 영의 존재로 지으셨다. 몸 없이 우리 영혼은 절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없다. 우리의 몸과 그 지체는 창조와 구속이라는 이중의 근거로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므로 청지기직이 몸으로, 몸의 모든 부위의 위탁으로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몸을 드림으로써 청지기직을 수행할 수 있는가? 바울의 권면인 로마서 12:1은 세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첫째, 결단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드리라’는 동사에 암시되어 있다. 그것은 부정 과거 능동태 부정사로 한 번 하면 끝내 철회되지 않을 행동을 뜻한다. 마리아와 요셉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드릴 때도 그 단어가 쓰였고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자기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바치신다고 한 말씀에도 이 단어가 쓰였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전폭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회심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적이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의 사도 바울도 그랬다. 바울은 부활의 영광으로 자신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난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철회될 수 없는 결단이었다. 단호했다. 조건이나 단서가 없었다. 그의 헌신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었다.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둘째, 평생의 헌신으로 해야 한다.  바울은 구약의 죽은 피 제사와 신약의 산제사를 대비시킨다. 죽은 제사는 한순간의 제사이다. 한 번 드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다시 드릴 수 없다. 얼마 후에 다시 다른 제사를 드려야 한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의 제사와 섬김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하나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제사와 섬김은 다르다. 그것은 평생 계속되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섬김은 단지 교회에 가느라고 일주일에 하루를 희생하거나 사순절 기간 중에 호사스런 삶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청지기로 살아가는 삶은 끊임없는 제사의 삶이다. 하루나 일주일이나 1년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의 문제이며 헌신이다. 셋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이어야 한다.  구약 시대에 제사를 드리려면 먼저 짐승을 제사장에게 가져와 흠이 있는지 조사해야 했다. 제사장이 살펴야 하는 흠은 스무 가지였다. 동물에 흠이 없다는 확신이 서면 그제야 비로소 제사장은 그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도록 허용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반드시 흠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몸에 죄가 없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우리 중에 누구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영영 쓰임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드릴 몸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몸이어야 한다. 우리 삶 속에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몸과 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리고 날마다 씻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깨끗해져야 한다(요일 1:7, 엡 5:26)   우리가 위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우리 몸을 드려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자비하심(롬 12:1)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진술하는데 이보다 더 감동적인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변명의 여지도 없고 자격도 없는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이 되셔서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겸손히 십자가를 지시며 처참한 죽음을 우리 대신 당하셨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닮게 하셔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던 것이다(롬 8장).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로마서 9:16, NIV)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이 모든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우리 몸을 드리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섬김은 우리 자신의 선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미 주도적으로 베푸신 자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어야 한다. 몸을 드림을 결단하자. 평생의 헌신으로 드리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로 드리자.   - 위의 글은 브라이언 러셀의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라』(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하여 수정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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