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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행복, 우리의 행복 [제473호]


관리자   조회 : 73, 등록일 : 2018/05/15 15:49

 

하나님의 행복, 우리의 행복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려면 반드시 행복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우리가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창조와 구속에 능동적으로 임하신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결국 불행만 남기지만, 예수님은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생명을 통해 우리에게 궁극적 행복을 주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한히 행복하시다.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다. 그분의 행복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한다.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면(롬 12:2) 행복하신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진다. 우리의 행복은 점점 더 커져간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행복이 흘러넘친 결과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선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나님은 당신이 지은 모든 것을 보시며 행복해 하셨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행복은 창조의 목적이다. 창조주께서 세상을 지으신 동기는 분명히 그분의 선하심이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피조물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신다”라고 썼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4, 7). 창조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아버지인 하나님께 반응했다는 뜻이다. 그분이 창조하신 웅장한 세계 속에 그분 자신의 즐거움이 흘러넘쳤다.

 

모든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행복을 반사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동물들을 보며 행복해하셨다.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욥 39:19, 21~22, 24~25).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말을 마냥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타락한 창조 세계를 여전히 사랑하셔서, 그것을 멸하시기는커녕 자신과 우리가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것을 구속하려고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불행한 구원을 보내실 리가 없다. 행복하신 창조주는 또한 행복하신 구주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기뻐하여 즐거이 노래하신다.

 

스바냐 3:14에 하나님은 행복을 뜻하는 네 개의 서로 다른 히브리어 단어를 써서 자기 백성에게 기뻐할 것을 명하신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린나, rinnah)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루아흐, ruah)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사마흐, samach) 즐거워할지어다(알라즈, alaz)”

그야말로 즐거움이 철철 넘쳐흐르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시다면 결코 자기 백성에게 이런 행복을 명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데 세 구절 후인 스바냐 3:17에 보면 더 놀라운 진술이 나온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심하, simchah)을 이기지 못하시며(수스, sus)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길, gil) 기뻐하시리라(린나, rinnah)” 이 구절 하나에만도 하나님의 행복과 자상하심과 사랑이 가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며 행복해하신다.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은 행복해하신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5:6에 보여주신 하나님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라고 하시는 목자이다. 잃은 양을 찾아서 아주 행복해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 또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분개하는 형을 향하여 말한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행복해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왜 아버지는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을까?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에 충실하게 행동하시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행복하시기에 즐거워하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행복해하신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하나님은 혼자서만 행복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즐거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시 36:7~8). 이 구절이 가르치는 바에 대하여 1868년에 미국의 신학자 앨버트 반즈(Albert Barnes)는 이렇게 주해했다.

 

1) 하나님은 행복하시다. 2) 신앙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3)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행복과 본질 내지 성격이 같다. 4) 이 행복은 본질상 만족을 준다. 즉, 영혼의 참된 필요를 채워준다. 5) 그것은 풍성하여 영혼의 어떤 필요도 채워지지 않은 채로 두지 않는다. 6) 이 행복은 …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시편 기자가 고백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기뻐할 때 즐거워하신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로라”(시 104:34). 생각해 보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우리는 바다 같은 하나님의 행복을 즐거워하고 그분은 시내 같은 우리의 행복을 즐거워하신다!

우리는 행복을 원하며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의 행복 안에 감추어져 있다. 즉,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아하실 만한 것들을 향하여 먹고 마시며 수고하고 낙을 누릴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이 만족해하시며 심히 좋아하시는 그분의 행복 속에서 우리 또한 진짜 행복을 경험한다.



(2018.05.14)_하나님의_행복_우리의_행복.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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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행복, 우리의 행복 [제473호]
20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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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행복, 우리의 행복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려면 반드시 행복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우리가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창조와 구속에 능동적으로 임하신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결국 불행만 남기지만, 예수님은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생명을 통해 우리에게 궁극적 행복을 주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한히 행복하시다.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다. 그분의 행복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한다.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면(롬 12:2) 행복하신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진다. 우리의 행복은 점점 더 커져간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행복이 흘러넘친 결과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선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나님은 당신이 지은 모든 것을 보시며 행복해 하셨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행복은 창조의 목적이다. 창조주께서 세상을 지으신 동기는 분명히 그분의 선하심이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피조물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신다”라고 썼다.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4, 7). 창조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아버지인 하나님께 반응했다는 뜻이다. 그분이 창조하신 웅장한 세계 속에 그분 자신의 즐거움이 흘러넘쳤다.     모든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행복을 반사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동물들을 보며 행복해하셨다.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욥 39:19, 21~22, 24~25).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말을 마냥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가?하나님은 타락한 창조 세계를 여전히 사랑하셔서, 그것을 멸하시기는커녕 자신과 우리가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것을 구속하려고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불행한 구원을 보내실 리가 없다. 행복하신 창조주는 또한 행복하신 구주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기뻐하여 즐거이 노래하신다.     스바냐 3:14에 하나님은 행복을 뜻하는 네 개의 서로 다른 히브리어 단어를 써서 자기 백성에게 기뻐할 것을 명하신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린나, rinnah)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루아흐, ruah)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사마흐, samach) 즐거워할지어다(알라즈, alaz)”그야말로 즐거움이 철철 넘쳐흐르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시다면 결코 자기 백성에게 이런 행복을 명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데 세 구절 후인 스바냐 3:17에 보면 더 놀라운 진술이 나온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심하, simchah)을 이기지 못하시며(수스, sus)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길, gil) 기뻐하시리라(린나, rinnah)” 이 구절 하나에만도 하나님의 행복과 자상하심과 사랑이 가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며 행복해하신다.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은 행복해하신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5:6에 보여주신 하나님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라고 하시는 목자이다. 잃은 양을 찾아서 아주 행복해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 또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분개하는 형을 향하여 말한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행복해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왜 아버지는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을까?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에 충실하게 행동하시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행복하시기에 즐거워하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행복해하신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하나님은 혼자서만 행복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즐거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시 36:7~8). 이 구절이 가르치는 바에 대하여 1868년에 미국의 신학자 앨버트 반즈(Albert Barnes)는 이렇게 주해했다.     1) 하나님은 행복하시다. 2) 신앙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3)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행복과 본질 내지 성격이 같다. 4) 이 행복은 본질상 만족을 준다. 즉, 영혼의 참된 필요를 채워준다. 5) 그것은 풍성하여 영혼의 어떤 필요도 채워지지 않은 채로 두지 않는다. 6) 이 행복은 …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시편 기자가 고백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기뻐할 때 즐거워하신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로라”(시 104:34). 생각해 보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우리는 바다 같은 하나님의 행복을 즐거워하고 그분은 시내 같은 우리의 행복을 즐거워하신다!우리는 행복을 원하며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의 행복 안에 감추어져 있다. 즉,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아하실 만한 것들을 향하여 먹고 마시며 수고하고 낙을 누릴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이 만족해하시며 심히 좋아하시는 그분의 행복 속에서 우리 또한 진짜 행복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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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가족 사이에서의 균형 [제472호]
2018/05/08
115
삶과 가족 사이에서의 균형     경쟁심으로 가득한 엄마와 아빠는 자녀가 갓난아이일 때부터 모든 유리한 고지와 기회를 자식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결단하고 나선다. 부모의 마음은 온통 자녀에게만 있으며 자녀야말로 그들 삶의 목표가 된다. 그러한 헌신으로 인해 자식을 위한 희생이라면 전혀 개의치 않게 된다. 모든 것을 자녀에게로 집중해 버리는 것이다.이러한 부모는 이생을 왜곡된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 무엇이라도 자녀에게 손톱만큼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싫어해서 과민 반응을 보이고 갈등을 일으킨다. 특히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이런 성향을 가질 때 이 강박 증세는 부부 관계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엄마일 경우에는 자녀에게 전적으로 매달리는 아내로 인해서 남편은 찬밥 신세가 되기 일쑤이다. 그러면 남편은 아내가 지나치다고 믿으며 자신에게서 아내를 빼앗아간 자녀에게 화를 품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아내가 남편의 이기적인 태도를 경멸하며 자신만이 아이들을 전적으로 방어하고 돌보는 사람임을 자처하고 나설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부모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내는 더 많은 시간을 자녀에게 쏟을 것이며, 남편은 더 많은 에너지를 일에 쏟을 것이다. 부부는 좌절하고 괴로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결국 ‘화해할 수 없는 차이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모습이 부부 관계를 파경으로 몰고가는 비극적인 패턴이다.     지친 아이들     강박증을 동반한 육아는 모든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아이에게도 동일하게 위험하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지나치게 많은 활동을 시켜서 아이들을 지치게 한다. 헌신적인 부모는 자기 자녀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하기를 원하면서 한편으로는 나중에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할 때 동급생과 경쟁해서 이기기를 바란다.그 동기는 나무랄 것은 아니지만 지나친 운동 연습, 피아노, 태권도 등의 학원 활동이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이가 원하는 것과 자녀를 잘 관찰한 결과 자녀에게 필요와 유익이 있을 것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결여된 것은 위험하다. 다른 아이들이 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를 그러한 현장으로 내 모든 것은 위험하다. 어떤 아이에게는 그 모든 활동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를 위한다는 것이 도리어 자녀를 해치는 것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에게 지나치게 바쁜 일상을 통해 앞으로 삶에 필요한 것을 주입하기보다는 아이의 일상이 자신에게 있는 창의성을 끄집어 내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완벽한 부모     자녀는 잘 양육하려고 최선을 다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대상이다.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하고 필수적인 자녀 양육이라는 임무를 지나치게 극단으로 가면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녀 양육이 강박 증세를 띠게 되면 결국 부모는 위험할 정도의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부모 노릇과 과잉보호, 삶에 대한 자기중심적 관점과 어떤 경우에서는 부모에게 평생 의존하는 현상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 부모에게도 완벽한 부모 노릇은 자연스러운 함정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가치 체계에서 가족은 가장 최우선 순위에 놓이게 되고 우리 삶의 방식은 자기희생과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임무에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극단적으로 발전하며 강박 증세를 갖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줄 때와 피할 때     그리스도인 부모는 사도 바울이 모든 일에서 ‘관용’을 보이라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균형이야말로 성공적인 삶과 자녀 양육의 열쇠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와 일에서의 책임감, 여가, 사회적인 의무와 가족생활의 의미 사이에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도 긍휼을 구하며 몰려오는 군중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치료해 주셨지만(마 14:13~14), 때로는 자신의 힘이 다해서 휴식이 필요함을 아실 때면 제자들과 함께 배를 저어 그 자리를 떠나셨다(막 4:36, 마 14:23)어떤 한 부분에 들이는 엄청난 노력과 투자는 다른 부분의 잠재력을 앗아간다. 기록을 세우는 괴상한 열매 하나를 얻느니보다는 차라리 과즙이 풍부한 레몬 열매가 그 나무 전체에 주렁주렁 열리는 것이 낫다. 균형이 바로 그 열쇠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회복을 위한 시간을 가짐과 동시에 가족과 다른 활동들 사이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자녀도 그와 같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 위의 글은 제임스 답슨, 『자녀 양육을 위한 행복 플러스』(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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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도 말고 빼먹지도 말아야 할 것 [제471호]
2018/05/01
161
잊지도 말고 빼먹지도 말아야 할 것 삶은 목적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과정 속에 수단과 방법도 달라진다. 삶을 내용을 보면 그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엿볼 수 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다.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위해 아버지의 뜻인 말씀에 초점을 두고, 기도하며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으셨다. 그러기에 잡히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그 동산은 하나님과 정기적인 만남(기도)의 장소였다.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위해 아버지와 독대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함께 동행했던 제자들은 그곳에서 깊은 잠에 빠졌고, 유다는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 어두움의 세력들을 이끌고 동산으로 침입했다.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의 마지막 순간을 위한 여정 속에 제자의 배신, 더 나아가 다른 제자들의 무관심 속에 펼쳐지는 한편의 슬픈 드라마와 같은 장면 속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꼭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기 두 가지를 발견한다. 우리가 잊지도 말고 빼먹지도 말아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말씀을 잊지 마라.말씀보다 앞서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항상 듣고 즐겨하던 말이다. 주님이 잡히시던 순간은 이미 주님이 하신 말씀하신 대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8:21~30) 말씀하셨고, 그 상황을 통해 주님을 배신하려는 가롯 유다를 향하여 돌이킬 기회를 주셨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분명 당신은 배신당하고, 피 흘리시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 길이 주님의 길이며, 주님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움직이실 것임을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하셨다.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온다”(요 16:32)라고 말씀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배신의 상황 속에서 주님은 시편 109:8(요 17:1)의 말씀을 이루며 제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하여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v.8)라고까지 하신다. 하지만 베드로는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을 가로 막는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마 16:23)한다. 앞에서 하신 주님의 모든 말씀과 가르침을 잊으며 도리어 주님의 말씀을 가로막는다. 그 결과 그는 칼을 휘두르는 행동을 한다. 칼을 쥐면 휘두르고 싶다. 칼을 쥠으로써 눈 앞에 서 있는 대상을 베어 버려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주님은 칼이 아닌 자기희생과 죽음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생각하는데 말씀을 잊은 자, 말씀보다 앞서는 자는 칼을 휘두르며 자기가 살고 다른 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한다.베드로는 말씀을 잊고 잘못된 목적을 설정하고 잘못된 방법과 무기를 사용한다. 주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주를 훼방하며 도리어 주님이 하신 말씀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한다.말씀을 잊으면 사랑해야 할 대상을 적으로만 생각하며 그를 제거하는 것이 상황과 삶의 우선순위가 된다. 말씀을 잊으면 자기의 생각만 살아나고 그 생각대로 끌려간다. 말씀을 기억하고 있지 않으니 자기 생각대로 행동한다. 살리는 일이 아닌 죽이는 일에 앞장서면서 말이다. 매 순간 주어지는 삶의 치열한 현장과 상황 속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 주님이 주신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이 말씀보다 앞서지 않는 삶이다. 그리스도인, 즉 주님의 제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암송하며 그 말씀을 적용하는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도를 빼 먹지 마라.주님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실 때 기도를 생략하지 않으셨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도를 빼먹지 않으셨다. 주님은 결코 기도보다 앞서지 않으셨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절규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근거리에 있던 제자들은 졸다 못해 깊은 잠에 빠졌다. 한 시간도 깨어 기도하지 않았다. 핏방울을 흘리며 절규하시는 스승에 대한 무관심, 하나님의 뜻과 주님의 길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기도 이후 체포의 상황을 맞이하는 예수님과는 달리 기도를 생략하고 예수님의 체포 현장을 맞이할 때 드러나는 제자들, 특히 베드로의 행동은 자기 생각과 성향에 사로잡힌 충동적인 행동뿐이었다. 주님은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라고 하며 기도하신 대로 제자들을 안전하게 떠나게 하신다. 이전에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이렇게 기도하라”(마 6장)라고 하시며며 기도를 가르치셨고 귀신들린 여아를 치유하신 후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7)라고 말씀하시며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드러낸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는지를 발견하게 한다. 우리의 무능 위에 하나님의 유능하심이 덧입혀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자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하는 시간이 아니다. 도리어 나를 조정하는 시간이다.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이것을 잘 가르쳐 준다. 기도를 통해 나를 조정하고, 나의 뜻과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기도를 생략한 베드로는 주님을 조정하고 통제하며 자기 뜻대로 칼을 휘두른다. 기도를 생략하면 내 뜻을 중심으로 산다. 자기를 조정하여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기를 주장하는 삶을 산다. 우리가 기도를 생략할 때 주님을 위한다는 명분 속에 주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의 충만이나 성령 충만이 아니라 자기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으며 칼을 휘두르는 삶으로 추락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인, 즉 주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도를 생략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기도보다 앞서고 있지는 않은가?주님의 말씀을 잊고 기도를 빼먹으며 깊은 잠에 빠진 자가 되지 말자. 깊은 잠에 빠지며 주님의 말씀을 잊고 기도를 생략하는 자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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