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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세상, 외로운 그리스도인 [제477호]


관리자   조회 : 329, 등록일 : 2018/06/12 11:45

 


혼자 사는 세상, 외로운 그리스도인


캐나다 출신의 힙합 가수 드레이크가 부른 노래에 담긴 한 가사인데 한국 문화를 만나 더욱 유명해진 문장이 있다. You only live once(“인생은 한 번뿐이다” YOLO).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마법의 주문처럼 기업의 마케팅에 활용되면서 더욱 확장되고 왜곡되어 “한 번 뿐인 인생, 즐기면서 살자”라는 신조어로 둔갑했다. 욜로 햄, 욜로 빙수, 욜로 인테리어 조명, 욜로 모발이식, 낯선 땅에서 참된 행복을 만나는 욜로 여행과 같은 상품으로 말이다.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분들까지 가세하며 ‘쓰죽회’가 등장했다. ‘한 번 사는 인생, 다 쓰고 죽자’

불안한 미래에 대한 준비보다는 현재 삶을 즐기는 것을 인생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기에 혼삶을 살며, 혼밥을 먹고, 휴가 때 지갑을 톡톡 털어서라도 해외로 긴 혼행(혼자하는 여행)을 한다. 집이나 물건은 사는 것이 아니라 렌트하며 다양한 경험을 위해 취미 활동에 적극 투자한다. 당장이 중요하고 당장을 즐기는 문화를 연출하면서 말이다.

젊은 2030 성인 남녀 84%는 욜로 라이프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60.7%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 55.4%는 “자기 주도적 삶을 살 수 있어서”, 30.7%는 “실용적인 생각 같아서”, 23.5%는 “열정적인 것 같아서, 20.9%는 “도전 정신이 있어 보여서”이다. 통계를 볼 때면 함께하는 삶은 누군가에게 구속당하고, 자기 삶을 추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혼자사는 삶에 익숙하고 혼자가 편하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갈등도 없고, 자기 주도적인 삶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년기로 갈수록 혼자의 삶은 편함이 아닌 비극적인 모습임을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통계청은 전국적으로 1인 가구의 비율이 1위가 되는 시기는 2019년(29.1%)이 될 것이라 발표했다. 또 인구주택 총조사에 의하면 혼자 사는 50대 1인 가구 비율이 10년 동안 123%나 증가해 차후 1인 가구 대부분은 노인 세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 베이비붐 세대의 노년기 진입 그리고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서서히 해체되고 있는 사회 현상도 욜로 인생, 혼자 사는 인생을 부추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웃은 물론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다 고독하게 사망하는 사람들이 매년 급증하여 사망자가 최근 4년간 57%나 증가하여 2017년 한 해 2000명을 넘은 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야기가 아직은 남의 이야기로 다가오지만, 혼자만의 욜로 인생을 즐기는 현재의 사람들이 직면하게 될 미래의 비극이라는 이야기이다. 현대인들은 혼자이면서 혼자인줄 모른다. 각종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SNS)에 연결되어 있어 가상 공간에서 소통하고 있으며, 포털(네이버, 다음 등)을 통해 세상 구석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손바닥 안에서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이러한 모습이 발견된다. 혼자로서 혼자만의 삶에 익숙해 간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진정 중요한 것이라 믿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삶은 반드시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로 나아가 그들과 연결됨으로써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한다. 함께하는 삶이 ‘갈등’이라는 피할 수 없는 불편함을 수반하지만, 함께하는 삶이 서로를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s)임을 잊지 말자.

혼자만의 삶은 하나님이 원래 디자인하신 인간다움의 삶이 아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함께’ ‘서로’ 라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다. 혼자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혼자가 익숙하기에 서로를 의지하고 도와주는 것이 불편한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혼자가 편하기에 신앙생활을 많은 사람이 모여 드리는 주일 낮 예배에만 살며시 참석하는 것으로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혼자가 익숙한, 별로 건강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외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

불편할지라도 혼자만의 삶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혹시 당신은 혼자가 아닌가? 혹시 외로운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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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2)_혼자_사는_세상,_외로운_그리스도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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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에 부딪힐 때 [제520호]
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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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에 부딪힐 때(누가복음 5:1~11)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해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상황도 만나게 된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며 열심히 일했지만 기대하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업이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우리는 한계에 부딪혔을 때 세상 다른 어떤 방법이 아닌, 주님과 함께 주님의 방법으로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세 가지 결단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결단이 있어야 나 홀로 동분서주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뛰고, 주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첫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움의 결단이다.나를 비우고 주님으로 채우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나를 비움으로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주님이 함께하시도록, 주님이 내 삶에 오셔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진다는 표현은 내가 차지하고 있던 삶의 자리가 점점 비워지고 주님이 내 삶에서 차지하시는 자리가 점점 넓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내가 나의 삶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분을 주님이 맡으실 수 있도록 비워 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비움을 통해 주님에게 내어 드리는 결단을 할 때 우리의 한계가 오히려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 도구로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움이 있어야 채워짐이 있다. 열심히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 한계와 문제가 찾아올 때는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말이다. 무조건 열심히만 달려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내가 지금 주님에게 비워 드려야 할 삶의 부분이 어디인지 돌아보자.둘째, 내려놓음의 결단이다. 나에게 익숙한 방법이나 경험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한계에 부딪혔을 때는 우리가 지쳤을 때이고 낙심했을 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보다 우리의 감정이 내는 소리를 듣기 쉽다. 하나님의 요구가 오히려 비논리적으로 들리고 최선의 방법이 아닌 것처럼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여야 한다. 또한 결과는 하나님에게 맡기고 과정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결과를 맡기지 못하면 순종할 수 없다. 내가 보고 싶은 결과를 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여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한정되어 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힐 줄은 몰랐다. 결과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순종했더니 기적을 맛본 것이다.셋째, 바라봄의 결단이다.우리는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크고 위대한 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을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한 마리도 낚지 못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대낮에 한가운데에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셨고, 예수님은 두 대의 배가 만선이 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 기적을 일으키신 궁극적인 목적은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실 위대한 일을 바라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작은 꿈을 깨고 하나님의 큰 꿈을 품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그래서 그 기적을 보이신 후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b)라고 하셨던 것이다.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내일을 믿을 수 있고, 내일을 믿는 사람은 오늘을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왜 나는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왜 나는 이것밖에 할 수 없는가?’ 하는 한계에 부딪히는 상황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비울 수 있고, 내려놓을 수 있고,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때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그렇다면 그때 우리는 기적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은혜로 삽니다』(도서출판 디모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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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제519호]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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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소통이 잘 못하는 일곱 가지 부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총사령관이다. 그는 감독하는 일을 한다. 자녀가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하면 그는 감독하는 태도로 문제를 지적해 내거나 명령을 내린다. 도덕론자도 있다. 그는 늘‘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또는 ‘그것을 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자녀들이 그의 가치관을 이해한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알은체하는 사람은나이를먹을수록자연히아는것이많아진다고믿는다. 말을 할 때마다 ‘내가 너만 했을 때는’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심판자는심지어말하는사람의말이채끝나기도전에이미판단을내려버린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었어’ 또는 ‘만일 네가 지혜로웠다면, 이렇게 했을 텐데’라고 말한다. 비평가가 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그는 모든 논리 중에서 흠을, 모든 일에서 실수를 그리고 모든 제안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기에 바쁘다. 심리학자도 있는데, 늘 자녀를 분석한다. ‘왜 그렇게 했는지 말해 봐’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이야기하거라.’ 위로자는 너무 빨리 동정을 해 버리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까지 파고들 수가 없다. 늘 동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소통이 안 되는 데는 반드시 그 원인이 존재한다. 원인을 잘 파악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으로 나아간다면 대부분의 가정 안에서의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의사소통 자문협회(Communications Consultants Associated)의 회장인 스테일(Lyman K. Steil) 교수는 의사소통에 네 단계의 과정이 있음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 네 단계는 한 개의 삼각형과 같으며 각 단계는 그 아래 단계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단계에서 얼마나 의사소통을 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낮은 단계에서 얼마나 의사소통을 잘 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일상적인 의사소통(phatic communication)이다. 간단히 말해서 ‘잡담’이다. 일상이라는 말은 ‘사람들과 함께 연결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잡담의 역할이다. 우리는 자녀들과 더불어 이러한 것, 즉 학교와 친구, 희망사항 그리고 장래 꿈에 대한 자연스런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한다. 잡담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자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기초가 된다.두 번째 단계는 카타르시스적인 의사소통(cathartic communication)이다. 이 단계에서 억눌린 감정들이 풀어지게 된다. 이는 자녀들의 성장 과정에 따르는 좌절감을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가 된다. 카타르시스적 의사소통은 자녀의 감정과 욕구불만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데 이는 부모가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 준다고 느낄 때 가능하다. 하지만 이 단계의 의사소통은 첫 번째 단계인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확고한 기초가 다져져 있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세 번째 단계는 정보적 의사소통(informative communication)이다. 아이디어나 정보 혹은 자료들을 나누어주는 단계이다. 많은 부모가 이 단계의 의사소통에 너무 관심을 쏟는 나머지 우선적으로 사소한 대화와 카타르시스 단계의 의사소통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네 번째 단계는 설득적 의사소통(persuasive communication)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노력하고 우리의 관점대로 사물을 보게 하려고 힘쓴다. 부모들은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이 설득적 의사소통 단계에 쏟는다. 부모가 자녀들이 옳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성경의 명령이기도 하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잠언 22:6)“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그러나 만일 부모가 앞의 세 단계의 의사소통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지 못한다면 설득적 의사소통이 잘 될 수가 없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영향을 주며 그들을 설득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의 말을 더 잘 들어 주고, 그들이 처해 있는 단계에서 의사소통을 하며, 정보적 단계와 설득적 단계로 옮겨가기 전에 사소한 대화 단계와 카타르시스적인 단계의 의사소통을 충분히 해야 한다. 물론 이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자녀들은 잘 듣지 않는 사람과는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해 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자녀들과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하기를 원하는가? 그들을 반듯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를 소망하는가? 위에서 언급한 의사소통의 네 단계를 삶에 정착시키며 자녀와의 공감을 확장시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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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모순 [제518호]
2019/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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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모순 전국시대 초(楚)나라에 무기 상인이 있었다. 그는 시장으로 창과 방패를 팔러 나갔다. 상인은 가지고 온 방패를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방패를 보십시오. 아주 견고하여 어떤 창이라도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창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여기 이 창을 보십시오. 이것의 예리함은 천하일품, 어떤 방패라도 단번에 뚫어 버립니다.” 그러자 구경꾼 중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 예리하기 짝이 없는 창으로 그 견고하기 짝이 없는 방패를 찌르면 도대체 어찌 되는 거요?” 상인은 말문이 막혀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다가 서둘러 달아나고 말았다.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명제, 혹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를 모순(矛盾, oxymoron)이라고 한다. ‘믿을 만한 사기꾼’, ‘가난한 부자’, ‘사랑의 증오’, ‘즐거운 비명’, 찬란한 슬픔’, ‘다 아는 비밀’ 등과 같은 표현이 그러한 것을 나타낸다. 모순은 이러한 것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다움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모순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모순이 나타나지 않도록 늘 진리의 말씀을 따라 나아가며 진실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비난의 원인이 되는 모순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가 삶의 법과 기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오늘날의 세상은 점점 자기가 기준이 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객관적 기준이 희미해 지고 자기 생각과 느낌에 따라 움직이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과연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자기가 삶의 법과 기준이 되니 갈수록 상대적인 비교와 평가가 난무한다. 자족과 감사가 사라진다. 심한 갈증 때문에 바닷물을 먹은 자들과 같은 인생을 펼친다. 악순환에 사로잡힌 삶을 펼친다. 갈증 해소를 위해 급한 마음에 바닷물을 계속 들이마시지만 점점 탈수 증세가 일어나고 입이 바짝 마르더니 결국 혈압이 떨어지고 심장박동수가 높아지면서 의식불명의 혼수상태가 찾아와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현실의 문제에만 함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삶을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자이기에 잠깐 동안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사는 현재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현실이 어렵지만, 어렵고 힘듦을 떠나 해 아래에서의 모든 삶이 헛되다고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해 아래에서의 현실의 삶이 아닌, 하늘의 하나님 아래에서 사는 삶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임재 앞에서 사는 삶임을 날마다 상기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사람들의 비난의 원인이 되는 삶의 모순이 시간이 갈수록 사라지게 될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재정적 위기, 건강, 직업, 사업, 자녀, 부부 관계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당신은 하나님께 어떤 자리를 내어 드리고 있는가? 삶의 어려운 상황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모든 관심은 문제의 해결에만 급급할 때가 많다. 빈곤한 삶이 풍요의 삶으로, 병약한 육체가 강건한 육체로, 실패의 자리가 성공의 자리로 바뀌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모든 상황을 허락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해서는, 그분의 왕 되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모습에 익숙해질 때 비난받기에 합당한 모순은 점점 심화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움’에 기인하여 나타나야 할 모순이 있다. 하나님의 왕 되심,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며 삶의 주도권을 그분께 내어 드리며 평생 복음을 위하여 선교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바울이 이것을 우리에게 잘 가르쳐 준다. 그는 고린도후서 6장에서 자신의 삶에 나타난 거룩한 모순?을 고백한다. “8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10) 당신의 삶에서 발견되는 모순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사람들의 비난을 단번에 끄집어 내는 모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다움’의 매력성을 한껏 발산하도록 하는 거룩한 모순인가?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을 삶의 법과 기준으로 삼는 삶을 통해 현재를 넘어 영원한 삶을 이 땅에서도 누리는 거룩한 모순이 가득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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