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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설교[제485호]


관리자   조회 : 399, 등록일 : 2018/08/07 09:33

 
보이는 설교

 
  요즈음은 보이는 라디오가 유행하고 있다. DJ이나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소리로만 들려주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어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앉아 방송을 진행하는 진행자의 모습을 이제는 영상으로도 볼 수 있게 서비스를 하고 있다. 소리의 청취를 넘어 이제는 영상으로 시청하는 라디오로 거듭나고 있다. 라디오 프로가 왜 ‘보이는 라디오’를 추구하고 있을까? 이는 단순히 듣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이 훨씬 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보이는 설교가 되었으면 한다. 물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를 눈으로 보며 메시지를 듣고 있기에 보이는 설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영상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밝히는 보이는 설교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통해 메시지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눈은 설교자를 보고, 귀로는 메시지를 듣지만, 생각과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모든 감각을 사용함으로 메시지를 들으며 생각과 마음이 그 메시지를 상상하고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설교의 탁월한 모델이시다.

  위대한 설교자이신 예수님은 비유로 청중들을 매료시키셨다. 예수님의 풍부한 화법은 청중의 마음을 일깨우고 생생한 묘사를 통해 사람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하심과 동시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셨다. 예수님은 매우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시려고 감동적인 비유를 드신다. 니고데모와 거듭남, 우물가의 여인과 생명수, 머뭇거리는 제자들에게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간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다

  소경이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본다. 외로운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실 때 가까이 다가선다. 도처에서 들리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사죄, 믿음, 격려, 그리고 청지기됨에 대한 중요한 신앙들을 알게 된다. “너희가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면”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는데”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방들이 있는데…” 라 말씀하시며 청중들의 마음을 끌어당기신다. 예수님은 또 비유를 사용하여 대적들에게 맞서신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소경된 인도자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예수님은 청중들의 귀에만 의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비유와 이야기를 사용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상상하도록 만드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그들이 보았던 것들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귀납적이고 청중 중심적인 스타일은 청중들을 설교에 끌어들였고 그 결과 그들은 듣고 보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학습 과정에 참여하였다. 예수님의 비유는 청중들의 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속에 새기게 했고 그들을 자극하여 삶의 변화로 이끄셨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를 통한 설교를 배우고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의 모범적인 설교는 사람들이 듣기만 하는 것보다 보고 행하는 것에 의해서 더 잘 배운다는 사실을 고려한 설교였기에 들려주는 것에서 그 기능을 다 하는 것만 같은 오늘날의 우리의 설교와는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신학교육의 여타 분야처럼, 설교학도 왼쪽 뇌 우성인 단어, 언어, 분석, 이론, 신학, 추상, 논증, 그리고 가정에 집중하였다. 성경과 선지자들 그리고 특히 예수님에 대한 강조는 수사적인 규칙과 주의하여 쓴 원고 속에서, 즉 전통적인 설교학이 선호하는 논리적 언어 속에서 사라졌다. 시각적이고 은유적이고 독창적이고 전체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도리어 인식적이고 추상적이고 좌측 뇌의 지시적인 것에 의해 중요성이 가리워졌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오늘날의 설교를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성경적인 전통보다는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으로의 변화로 대체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헬라어로 설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아람어로 설교하셨는데,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관계가 있는 셈어족의 방언이다. 예수님은 상업과 농업의 언어로, 공동 생활과 시민의 언어로 설교하셨다. 즉,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뿐 아니라, 보고 설교에 참여하도록 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셨다.

  우선적으로 설교자는 설교 본문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잘 전달하기 위한 관찰과 깊은 묵상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작업은 기본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어쩌면 이 과정속에서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이 필요할 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서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만약에 여기서 멈추고 설교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많은 시간을 공들여 연구한 본문의 내용이 청중들에게 잘 전달될 가능성은 약화된다. 청중들의 삶의 변화를 불러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설교방식에서 드러난 것 처럼 ‘보이는 설교’가 되도록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마무리된 원고를 출력함으로 설교 준비가 끝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설교자의 손에 쥔 그 원고가 설교자 자신에게도 보이는 설교로 다가오는지, 청중들이 원고속에 담긴 이 내용이 단순한 소리가 아닌 그들의 마음과 생각속에서 보이는 설교로 준비된 것인지를 한번 더 점검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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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의 현장 [제 525호]
2019/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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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의 현장 유명한 랍비나 철학자에게 제자들이 모여드는 일은 예수님 당시의 그리스 문화에서나 유대 문화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들의 교육 현장은 반드시 교실이나 강당은 아니었다. 스승들은 대부분 이곳저곳 돌아다녔고, 제자들은 정상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스승이 가르침을 따랐다.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신 사역도 그런 것이었다. 그분은 이곳저곳 다니시는 순회 스승이었다. 그분이 가르치시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분의 뒤를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들었다.누가복음 6:1에서 그런 장면을 볼 수 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었고, 가르치시는 그분을 따라 이곳저곳 다녔으며, 길을 가면서 이삭을 잘라먹기도 했다. 사도들에게 제자도의 현장은 일상생활이었다.그것은 오늘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란 거창한 행사나 감동의 수련회, 지속적인 절정의 경험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평범하고 자질구레한 일상 속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아여 하라“(고전 10:31)라고 했다.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영원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삶 전체를 – 가장 자질구레한 부분까지도 –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삶의 일과를 경시하지 마라. 당신은 하루하루를 정해 주시는 우주의 하나님과 깊이 친해지는 장이 날마다의 일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에 주린 자인가?요한복음 6:51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라고 하셨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삶 속에 모셔 들이면 죄인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예수님은 믿음을 구사하는 것을 떡을 먹는 것에 비하셨다. 아무리 떡의 냄새를 맡고 손으로 꼭 쥐어 보고 맛있겠다고 말해도, 막상 먹지 않는 한 아무런 유익이 없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당신 삶 속에 영접하지 않는 한(요 1:12~13) 당신은 그분에게도 아무런 영원한 유익을 받을 수 없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사도 바울은 사역 말기에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주님의 존전에 섰을 때 바울은 틀림없이 이런 위로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주님에게서 그 말씀을 듣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종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 이하의 목표는 주님에게 합당하지 못하다. 그분은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고 필요한 영적 자원을 모두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극진히 섬기고 늘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는 분이시다(벧후 1:3~4).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행함우리는 두 가지 대조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방식은 경험적인 삶이다. 이는 모든 사고와 행동의 기초를 내게 보이거나 경험될 수 있는 것에 두는 삶이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다른 방식은 믿음의 삶이다. 이는 삶의 일차적, 궁극적 기초를 내게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는 것에 두는 삶이다.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라고 말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본 적이 없다. 천국이나 지옥도 볼 수 없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성경 저자들과 대화해 본 적도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은혜와 덕도 보이지 않는다.기독교의 이런 중요한 측면들이 하나도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성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그 믿음대로 살아간다. 우리의 현재 삶과 장래 운명의 기초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있다. 예로부터 하나님을 참으로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그랬다.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우리를 앞서간 사람들은 우리에게 뒤따라갈 발자국을 남겼다. 당신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이 놀라운 신앙 여정에 누군가를 위해 발자국을 남기게 되기를 바란다.  - 위의 글은 존 맥아더의 『주와 함께 길을 나서다』(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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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세 [제524호]
201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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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세 리더십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리더십은 중요한 것이며 힘이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와는 반대로 섬기는 리더십은 따르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섬김에서 커다란 힘을 발견한다.많은 사람이 여전히 리더십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리더십을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리더의 필요와 요구를 섬기도록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리더십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세상의 경영학의 대가들도 섬기는 리더십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셨던 마지막 밤에 한 가지 위대한 교훈을 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핵심 리더들이 복종의 마음을 개발하기를 원하셨다. 그때에 예수님의 의중에 있었던 것이 바로 섬기는 리더십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는 동안에도 그들이 보인 행동에 놀라시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누가복음 22:24~17)상명 하달식 리더십은 교회에서는 있을 자리가 없다. 오늘날은 세상 사회에서조차도 노동자들과 고용인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자기가 참여하고 있는 조직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효과적인 리더는 리더와 추종자의 거리를 없애고, 굳게 닫힌 근사한 간부용 집무실에서 나와서 일꾼들이 있는 사무실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오늘 우리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리더십과 팀워크가 중요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섬기는 리더는 자기의 역할을 전통적인 상명 하달식의 독재자 형태와는 아주 다르게 본다. 섬기는 리더는 일꾼의 성공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니다. 우리의 일꾼들이나 고용인들은 우리를 섬기도록 고용된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나 우리 조직의 사명을 섬기도록 고용된 것이다. 그들을 인도하는 우리의 역할은 한 사람의 코치가 팀의 선수들에게서 최선의 실력을 발휘하도록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어떤 식으로든지 그 조직의 효율성을 촉진시키는 것이다.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이 배신을 당하셨던 그날 밤까지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섬기는 리더십 스타일을 몸소 보여 주시고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4~15)크리스천의 성품 개발에 대한 탁월한 책인 고든 맥도날드의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IVP)은 영혼을 살찌우는 위대한 교훈을 담고 있다. 맥도날드는 이 책에서 가상으로 항해와 ‘수면 아래’에서 진행되는 일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대한 교훈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는 영성의 전제 조건들 가운데 한 가지는 복종이라고 믿고 있다 : “나는 복종이라 불리는 언약적 관계를 피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영성을 소유할 가망이 없다고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섬기는 리더는 권위에 대한 순복, 성부 하나님에게 대한 순복, 배우자에 대한 순복, 지혜로운 삶의 원칙에 대한 순복, 자기의 책무에 대한 순복 등의 수많은 수준에서 복종으로 가득 찬 삶을 기꺼이 살려고 해야 한다. 비록 상식적인 수준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리더에게 순복하는 것이 지혜임을 말하고 있지만, 참된 진실은 리더가 효과적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순복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자의 효율성을 침식시키는 가장 치명적인 성품상의 결점은 이 권위의 영역에서 오는 교묘한 영적 오만이다. 이러한 결점을 가진 지도자는 자기의 사역 기간 동안에 다른 권위에 순복하지 못하는 유형을 가지고 있다. 이 맹점은 재능 있는 리더가 갖고 있는 풍부한 잠재력을 개발하는 데 심각한 제한을 가할 수 있다. 효과적인 리더는 장로 회의나 간부 회의에서 모은 지혜를 자신의 전체적인 리더십의 일부분인 ‘견제와 균형’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식으로 순복하기를 거절하거나 순복하지 못하는 모습은 그가 오만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리더로서 우리 주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범을 계속해서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언제나 성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셨다. 리더로서 우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의 ‘견제와 균형’이 되는 이들과 견해를 달리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본을 따르는 지도자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따르고 싶어하게 만드는 강력한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이 된다.리더란 그 문화를 유지하는 자이기 때문에 확실히 기독교적인 문화를 개발해야 할 임무가 그들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리더가 어떠한 가치와 신념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은 보통 그 리더를 따르는 사람들의 것이 된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섬기는 리더의 어깨 위에는 커다란 책임이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리더는 세상의 기업이 추구하는 전통적인 상명 하달식의 모델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섬기는 리더십의 모델을 세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 위의 글은 한스 핀절의 『리더십파워』(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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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메시지 [제523호]
201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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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메시지심리학계는 교회에 대해 비판적이다. 상담가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종종 병원에 찾아온다. 그들은 인간의 죄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화가 나고 마음이 괴롭다고 말한다. 죄에 대한 설교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많은 설교자가 이 충고를 듣고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설교를 하려고 마음먹는다.성령이 일하실 때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점검하게 된다. 이 일은 결코 쉽거나 즐겁지 않다. 우리는 빛보다 어두움을 좋아한다. 그래서 자신의 상태를 합리화하기 좋아한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을 발견했을 때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해서 진실을 말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사람이 죄인이라면 올바른 진단은 그를 괴롭게 만들 것이다. 환자의 상태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의사의 책임인 것처럼 목회자에게도 이러한 책임이 있다. 성경이라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설명할 때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 물론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목회자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대면하라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우 실제적인 영역이 있다. 미움을 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느꼈을 것이다. 속이는 것을 볼 수는 없지만 자주 경험한다. 매우 심각한 질투나 이기적인 욕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미운 감정을 품고 있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에게 접근해 팔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친구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연기력을 개발해 마음의 생각을 감출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진실한 성도처럼 행동한다면 일 년 후에는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일 것이다. 성도의 삶은 마음의 생각을 감추고 외적으로 올바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연기력에 달려 있지 않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마음에 심각한 질투심과 이기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감쪽같이 숨길 수 있다. 이런 파괴적인 생각을 마음에 보물처럼 간직한다면, 의사들은 분명 어딘가에 병이 날 것이라고 경고할 것이다.사람들은 육체의 고통을 불평한다. 먹는 약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한다. 또한 사람들은 고통을 중단시켜 줄 무엇인가를 찾지만 자신의 마음에 대한 성경적인 진단에 동의하지 않거나 싫어한다. 그리고 혼돈 속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참 모습이 아닌 것을 자신이라고 믿고 싶어한다.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인 마음은 지속적으로 가꾸어야 할 이미지의 중요한 부분이다. 사랑, 평안, 온유, 오래 참음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대단히 실제적이다. 이와 반대되는 미움, 질투, 고집, 갈등도 마찬가지로 얼마나 실제적인가? 목회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실제를 대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기를 평가하도록 도우라목회자들은 많은 성도가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 때문에 고통당하며 고민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고통은 자신의 참 모습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 것에서 온다. 또한 이러한 문제를 하나님과 상관없이 임의로 해결하여 빨리 편안해지기만을 원한다.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은 나는 ‘평가’라고 부른다. 목회자들은 많은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도 평가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목회자는 행동, 생각, 감정, 욕심, 언어로 짓는 죄악을 아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개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점검하는 데는 신기할 정도로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죄의 실재목회자들은 자신의 죄, 하나님 백성의 죄 그리고 그들 주변의 수 많은 잃어버린 영혼의 죄를 다루어야 한다. 죄의 실재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무시한 인생이나 사역은 결코 승리와 성공과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해결책 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의외로 많은 목회자가 세상의 철학이나 선한 목적을 가지고 책을 저술한 크리스천 작가나 상담가의 영향을 받고 있다. 목회자가 이 세상의 사회학자와 세속적인 생각에 설득당할 때 그 목회는 많은 스트레스와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회학자와 심리학자의 사전에는 죄라는 단어도 없고 그것을 문제 삼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하나님만이 죄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하신다. 대부분 문제의 뿌리는 죄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죄를 다루어야 한다. - 위의 글은 헨리 블랙커비의 『왜 목사가 되려 하는가 어떻게 목회를 하려 하는가』(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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