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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설교[제485호]


관리자   조회 : 191, 등록일 : 2018/08/07 09:33

 
보이는 설교

 
  요즈음은 보이는 라디오가 유행하고 있다. DJ이나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소리로만 들려주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어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앉아 방송을 진행하는 진행자의 모습을 이제는 영상으로도 볼 수 있게 서비스를 하고 있다. 소리의 청취를 넘어 이제는 영상으로 시청하는 라디오로 거듭나고 있다. 라디오 프로가 왜 ‘보이는 라디오’를 추구하고 있을까? 이는 단순히 듣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이 훨씬 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보이는 설교가 되었으면 한다. 물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를 눈으로 보며 메시지를 듣고 있기에 보이는 설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영상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밝히는 보이는 설교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통해 메시지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눈은 설교자를 보고, 귀로는 메시지를 듣지만, 생각과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모든 감각을 사용함으로 메시지를 들으며 생각과 마음이 그 메시지를 상상하고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설교의 탁월한 모델이시다.

  위대한 설교자이신 예수님은 비유로 청중들을 매료시키셨다. 예수님의 풍부한 화법은 청중의 마음을 일깨우고 생생한 묘사를 통해 사람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하심과 동시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셨다. 예수님은 매우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시려고 감동적인 비유를 드신다. 니고데모와 거듭남, 우물가의 여인과 생명수, 머뭇거리는 제자들에게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간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다

  소경이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본다. 외로운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실 때 가까이 다가선다. 도처에서 들리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사죄, 믿음, 격려, 그리고 청지기됨에 대한 중요한 신앙들을 알게 된다. “너희가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면”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는데”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방들이 있는데…” 라 말씀하시며 청중들의 마음을 끌어당기신다. 예수님은 또 비유를 사용하여 대적들에게 맞서신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소경된 인도자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예수님은 청중들의 귀에만 의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비유와 이야기를 사용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상상하도록 만드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그들이 보았던 것들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귀납적이고 청중 중심적인 스타일은 청중들을 설교에 끌어들였고 그 결과 그들은 듣고 보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학습 과정에 참여하였다. 예수님의 비유는 청중들의 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속에 새기게 했고 그들을 자극하여 삶의 변화로 이끄셨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를 통한 설교를 배우고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의 모범적인 설교는 사람들이 듣기만 하는 것보다 보고 행하는 것에 의해서 더 잘 배운다는 사실을 고려한 설교였기에 들려주는 것에서 그 기능을 다 하는 것만 같은 오늘날의 우리의 설교와는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신학교육의 여타 분야처럼, 설교학도 왼쪽 뇌 우성인 단어, 언어, 분석, 이론, 신학, 추상, 논증, 그리고 가정에 집중하였다. 성경과 선지자들 그리고 특히 예수님에 대한 강조는 수사적인 규칙과 주의하여 쓴 원고 속에서, 즉 전통적인 설교학이 선호하는 논리적 언어 속에서 사라졌다. 시각적이고 은유적이고 독창적이고 전체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도리어 인식적이고 추상적이고 좌측 뇌의 지시적인 것에 의해 중요성이 가리워졌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오늘날의 설교를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성경적인 전통보다는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으로의 변화로 대체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헬라어로 설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아람어로 설교하셨는데,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관계가 있는 셈어족의 방언이다. 예수님은 상업과 농업의 언어로, 공동 생활과 시민의 언어로 설교하셨다. 즉,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뿐 아니라, 보고 설교에 참여하도록 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셨다.

  우선적으로 설교자는 설교 본문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잘 전달하기 위한 관찰과 깊은 묵상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작업은 기본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어쩌면 이 과정속에서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이 필요할 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서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만약에 여기서 멈추고 설교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많은 시간을 공들여 연구한 본문의 내용이 청중들에게 잘 전달될 가능성은 약화된다. 청중들의 삶의 변화를 불러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설교방식에서 드러난 것 처럼 ‘보이는 설교’가 되도록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마무리된 원고를 출력함으로 설교 준비가 끝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설교자의 손에 쥔 그 원고가 설교자 자신에게도 보이는 설교로 다가오는지, 청중들이 원고속에 담긴 이 내용이 단순한 소리가 아닌 그들의 마음과 생각속에서 보이는 설교로 준비된 것인지를 한번 더 점검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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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믿는다면 그 책임을 다하라[제486호]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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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믿는다면 그 책임을 다하라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믿어야 하는가? 그렇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믿어야 하며 신뢰해야 하며 순종해야 한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면 이것은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믿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부여되는 것이다.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실이 사실임을 믿는다는 것과 어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여러 차원을 지니는 신앙의 한 종류이며 이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고 말할 때, 이것은 성경이 단지 지식적으로 참되다고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때 우리는 성경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은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성경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자적(literal)’이라는 단어는 ‘기록된 그대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자적 해석에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밝히는 아주 조심스러우면서도 복잡한 과정이 포함된다.종교개혁 시대처럼 이것은 우리가 역사적 사건은 역사적 사건으로, 상징은 상징으로, 비유는 비유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를 해석할 때 시와 무관한 다른 해석 기준으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잘못될 수 있다. 신문기사를 가지고 서로 변형시켜 버린다면 기자의 원래의 의도가 훼손될 것이다. 시를 가지고 신문 기사로 변형시킨다면 이것도 시인의 원래의 의도를 훼손시킬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의 여러 부분이 기록된 형태와 문체를 먼저 이해해야 하며 그 다음에 그에 맞게 성경의 해당 부분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기록된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감이 동사를 명사로 바꾼다든지 명사를 동사로 바꾸지 아니한다. 성경을 다른 세상적인 책과 동일하게 성경을 해석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기에 주의를 요한다는 것이다.성경의 개별적인 것은 전체적인 것의 조명 아래에 해석되어야 한다. 즉, 특정 본문을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성경 전체라는 문맥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법적, 역사적 주석에 의하여 성경의 문학적 구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책임 있는 시도를 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상의 분문이 최초로 기록될 때의 방법 그리고 그때 의도했던 방법대로 성서를 해석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접근 방법은 많은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 성경의 단어에 대한 이해와 연구, 성경 본문 또는 성경 단어가 기록되었던 역사적 상황, 성경 인물의 배경과 당대의 관습, 원어 등을 책임 있게 연구해야 한다.그러므로 오직 신학자나 일부 전문가만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이나 누구든지 성경을 읽음으로써 영원하게 은혜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메시지는 너무 명백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전체의 계획을 파악하기를 원한다면 성경 해석의 기술적인 도구와 더불어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교사들을 세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성경의 난해한 부분을 세심하게 그리고 자세하며 철저하게 연구하도록 하셨던 것이다.모든 사람이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와 같은 일에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겠지만 목사는 분명히 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자이다. 구원에 관한 핵심적이고 단순한 메시지의 범위를 넘어 더 넓고 깊은 성경의 세계를 향하여 초대받았고 그 세계에서 얻은 이해를 바탕으로 맡겨진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과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에 합당한 삶으로 가까이 나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경을 가까이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고 더 잘 이해함으로써 그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며 또 누군가가 그러한 삶을 살아가며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성경을 성도에게 제대로 가르치는 사역은 대충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목사는 가르칠 본문이 정해졌다면 그 본문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 위해 먼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깊은 고뇌와 씨름 없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백업하기 위해 본문을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당신이 성경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으로 믿고 이해하며, 이 말씀을 향한 부르심이 있는 목사라는 확신이 있다면 성경에 대한 당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위의 글은 Ligonier Ministry의 설립자인 R. C. Sproul의 글을 발췌하여 수정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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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설교[제485호]
2018/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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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설교   요즈음은 보이는 라디오가 유행하고 있다. DJ이나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소리로만 들려주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어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앉아 방송을 진행하는 진행자의 모습을 이제는 영상으로도 볼 수 있게 서비스를 하고 있다. 소리의 청취를 넘어 이제는 영상으로 시청하는 라디오로 거듭나고 있다. 라디오 프로가 왜 ‘보이는 라디오’를 추구하고 있을까? 이는 단순히 듣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이 훨씬 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보이는 설교가 되었으면 한다. 물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를 눈으로 보며 메시지를 듣고 있기에 보이는 설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영상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밝히는 보이는 설교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통해 메시지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눈은 설교자를 보고, 귀로는 메시지를 듣지만, 생각과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모든 감각을 사용함으로 메시지를 들으며 생각과 마음이 그 메시지를 상상하고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설교의 탁월한 모델이시다.  위대한 설교자이신 예수님은 비유로 청중들을 매료시키셨다. 예수님의 풍부한 화법은 청중의 마음을 일깨우고 생생한 묘사를 통해 사람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하심과 동시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셨다. 예수님은 매우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시려고 감동적인 비유를 드신다. 니고데모와 거듭남, 우물가의 여인과 생명수, 머뭇거리는 제자들에게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간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다  소경이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본다. 외로운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실 때 가까이 다가선다. 도처에서 들리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사죄, 믿음, 격려, 그리고 청지기됨에 대한 중요한 신앙들을 알게 된다. “너희가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면”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는데”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방들이 있는데…” 라 말씀하시며 청중들의 마음을 끌어당기신다. 예수님은 또 비유를 사용하여 대적들에게 맞서신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소경된 인도자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예수님은 청중들의 귀에만 의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비유와 이야기를 사용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상상하도록 만드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그들이 보았던 것들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귀납적이고 청중 중심적인 스타일은 청중들을 설교에 끌어들였고 그 결과 그들은 듣고 보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학습 과정에 참여하였다. 예수님의 비유는 청중들의 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속에 새기게 했고 그들을 자극하여 삶의 변화로 이끄셨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를 통한 설교를 배우고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의 모범적인 설교는 사람들이 듣기만 하는 것보다 보고 행하는 것에 의해서 더 잘 배운다는 사실을 고려한 설교였기에 들려주는 것에서 그 기능을 다 하는 것만 같은 오늘날의 우리의 설교와는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신학교육의 여타 분야처럼, 설교학도 왼쪽 뇌 우성인 단어, 언어, 분석, 이론, 신학, 추상, 논증, 그리고 가정에 집중하였다. 성경과 선지자들 그리고 특히 예수님에 대한 강조는 수사적인 규칙과 주의하여 쓴 원고 속에서, 즉 전통적인 설교학이 선호하는 논리적 언어 속에서 사라졌다. 시각적이고 은유적이고 독창적이고 전체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도리어 인식적이고 추상적이고 좌측 뇌의 지시적인 것에 의해 중요성이 가리워졌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오늘날의 설교를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성경적인 전통보다는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으로의 변화로 대체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헬라어로 설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아람어로 설교하셨는데,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관계가 있는 셈어족의 방언이다. 예수님은 상업과 농업의 언어로, 공동 생활과 시민의 언어로 설교하셨다. 즉,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뿐 아니라, 보고 설교에 참여하도록 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셨다.  우선적으로 설교자는 설교 본문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잘 전달하기 위한 관찰과 깊은 묵상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작업은 기본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어쩌면 이 과정속에서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이 필요할 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서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만약에 여기서 멈추고 설교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많은 시간을 공들여 연구한 본문의 내용이 청중들에게 잘 전달될 가능성은 약화된다. 청중들의 삶의 변화를 불러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설교방식에서 드러난 것 처럼 ‘보이는 설교’가 되도록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마무리된 원고를 출력함으로 설교 준비가 끝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설교자의 손에 쥔 그 원고가 설교자 자신에게도 보이는 설교로 다가오는지, 청중들이 원고속에 담긴 이 내용이 단순한 소리가 아닌 그들의 마음과 생각속에서 보이는 설교로 준비된 것인지를 한번 더 점검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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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제484호]
2018/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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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성경은 요한복음 17:16과 ‘이 세대를 본받지 마라’는 로마서 12:2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의 개념을 언급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소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라는 말인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대하는 몇 가지 태도가 있다.방어적 자세 :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공격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그들 자신과 그들의 믿음을 보호하려고 비그리스도인들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음으로써 비신앙적인 영향력을 차단한다. 세상이 교묘하게 혹은 강제로 신앙을 타협하도록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종용하기 때문에 언뜻 타당한 방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방어적으로 살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고립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교회가 세상을 적대한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 마태복음 23장과 요한복음 3장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품으시고 모든 사람과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세상을 외면하는 것은 세상을 대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세상에 동화됨 : 세상을 등지는 방어적 자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과 비례하여 세상에 동화되는 이들 또한 늘어가고 있다. 그들은 더 큰 대의를 위해 교회와 세상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회 정의나 주변 문화가 중시하는 여러 가치와 방식을 수용하고 동참한다. 그래서 선한 동기로 사회 활동에 참여한다. 물론 이 주제는 성경 전체와 예수님도 중요하게 여기신 일이다. 그러나 이 접근 역시 문제점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주변 문화와 교류하며 그 우선순위와 방법,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면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동화될 때 그리스도에 대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은 세상 문화와 가치보다 더 고차원적인 것을 추구해야 하고 세상과 대중에 영합하기보다 그들을 주도하고 선도하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봄 : 문화 전쟁을 주도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이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변 세상을 피하거나 동화되기보다는 그 뜻대로 문화를 주도하고자 시도한다. 주로 정치를 수단으로 삼는다. 성경적인 정치 개혁과 기독교적인 후보 선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지지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문화 변혁을 이루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길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이런 입장 역시 문제가 있다. 세상을 ‘우리 대 그들’의 시각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된다. 신실한 현존 :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외면하거나 동화되거나 혹은 세상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도록 부름받지 않았다면 남은 입장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의 세 입장의 장점만을 받아들이되 단점은 버리고 통합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다. 기독교 사회학자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가 주장한 ‘신실한 현존(faithful presence)’ 이다. 하나님이 이 신실한 현존의 모범이시다. 우리를 쫓아오시고, 우리와 하나 되시며, 희생적 사랑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세상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 받은 복을 세상에 베풀고자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신실한 현존을 목표로 할 때 우리는 세상에서 도피하거나 세상과 맞서 싸울 필요가 없다. 신실한 현존은 타문화권에 우리 사회의 가치를 이식하는 대신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신실한 현존은 교회를 정치적 파당을 만들지 않고 투표에 참여한다. 세상의 사고방식에 흡수되지 않으면서도 세상과 적극적으로 교류한다. 주변 세상,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선을 추구하며 주변 모든 사람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어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 신실한 현존을 어떻게 보여 줄 수 있는가? 부담과 압박감이 있지만, 조급함을 버리고 다음과 같은 세 영역에서 신실한 현존을 표현하도록 하자.소속된 공동체 - 여기에는 이웃과 교회와 직장이 포함된다. 이 세 곳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현존을 반영할 평생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맡은 책무 - 신실한 현존으로 부름받았다고 해서 직장을 그만두라는 의미는 아니다. 집안일을 하든, 건물을 짓거나 직장 상사를 보좌하거나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성실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해야 한 (골 3:23).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 - 사람은 누구나 여러 환경에서 힘과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우리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이런 복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이 있다. 그 힘과 영향력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그 영향력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주변 사람들을 찾아가고 마음을 나누며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으로 그 영향력을 사용할 것인가? - 위의 글은 클린터 E. 아놀드 & 제프 아놀드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난감한 질문 명쾌한 대답』 (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하여 부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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