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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설교[제485호]


관리자   조회 : 264, 등록일 : 2018/08/07 09:33

 
보이는 설교

 
  요즈음은 보이는 라디오가 유행하고 있다. DJ이나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소리로만 들려주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어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앉아 방송을 진행하는 진행자의 모습을 이제는 영상으로도 볼 수 있게 서비스를 하고 있다. 소리의 청취를 넘어 이제는 영상으로 시청하는 라디오로 거듭나고 있다. 라디오 프로가 왜 ‘보이는 라디오’를 추구하고 있을까? 이는 단순히 듣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이 훨씬 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보이는 설교가 되었으면 한다. 물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를 눈으로 보며 메시지를 듣고 있기에 보이는 설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영상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밝히는 보이는 설교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통해 메시지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눈은 설교자를 보고, 귀로는 메시지를 듣지만, 생각과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모든 감각을 사용함으로 메시지를 들으며 생각과 마음이 그 메시지를 상상하고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설교의 탁월한 모델이시다.

  위대한 설교자이신 예수님은 비유로 청중들을 매료시키셨다. 예수님의 풍부한 화법은 청중의 마음을 일깨우고 생생한 묘사를 통해 사람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하심과 동시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셨다. 예수님은 매우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시려고 감동적인 비유를 드신다. 니고데모와 거듭남, 우물가의 여인과 생명수, 머뭇거리는 제자들에게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간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다

  소경이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본다. 외로운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실 때 가까이 다가선다. 도처에서 들리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사죄, 믿음, 격려, 그리고 청지기됨에 대한 중요한 신앙들을 알게 된다. “너희가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면”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는데”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방들이 있는데…” 라 말씀하시며 청중들의 마음을 끌어당기신다. 예수님은 또 비유를 사용하여 대적들에게 맞서신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소경된 인도자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예수님은 청중들의 귀에만 의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비유와 이야기를 사용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상상하도록 만드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그들이 보았던 것들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귀납적이고 청중 중심적인 스타일은 청중들을 설교에 끌어들였고 그 결과 그들은 듣고 보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학습 과정에 참여하였다. 예수님의 비유는 청중들의 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속에 새기게 했고 그들을 자극하여 삶의 변화로 이끄셨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를 통한 설교를 배우고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의 모범적인 설교는 사람들이 듣기만 하는 것보다 보고 행하는 것에 의해서 더 잘 배운다는 사실을 고려한 설교였기에 들려주는 것에서 그 기능을 다 하는 것만 같은 오늘날의 우리의 설교와는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신학교육의 여타 분야처럼, 설교학도 왼쪽 뇌 우성인 단어, 언어, 분석, 이론, 신학, 추상, 논증, 그리고 가정에 집중하였다. 성경과 선지자들 그리고 특히 예수님에 대한 강조는 수사적인 규칙과 주의하여 쓴 원고 속에서, 즉 전통적인 설교학이 선호하는 논리적 언어 속에서 사라졌다. 시각적이고 은유적이고 독창적이고 전체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도리어 인식적이고 추상적이고 좌측 뇌의 지시적인 것에 의해 중요성이 가리워졌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오늘날의 설교를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성경적인 전통보다는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으로의 변화로 대체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헬라어로 설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아람어로 설교하셨는데,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관계가 있는 셈어족의 방언이다. 예수님은 상업과 농업의 언어로, 공동 생활과 시민의 언어로 설교하셨다. 즉,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뿐 아니라, 보고 설교에 참여하도록 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셨다.

  우선적으로 설교자는 설교 본문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잘 전달하기 위한 관찰과 깊은 묵상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작업은 기본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어쩌면 이 과정속에서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이 필요할 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서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만약에 여기서 멈추고 설교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많은 시간을 공들여 연구한 본문의 내용이 청중들에게 잘 전달될 가능성은 약화된다. 청중들의 삶의 변화를 불러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설교방식에서 드러난 것 처럼 ‘보이는 설교’가 되도록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마무리된 원고를 출력함으로 설교 준비가 끝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설교자의 손에 쥔 그 원고가 설교자 자신에게도 보이는 설교로 다가오는지, 청중들이 원고속에 담긴 이 내용이 단순한 소리가 아닌 그들의 마음과 생각속에서 보이는 설교로 준비된 것인지를 한번 더 점검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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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보여 주신 위대한 교사의 자질[제493호]
201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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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보여 주신 위대한 교사의 자질당신이 만났던 교사들을 기억해 보라. 그 중에는 탁월한 가르침으로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교사가 있고, 당신이 배움에 대한 열정을 식게 만든 교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로서 가장 탁월한 한 분을 꼽으라 한다면 과연 누구이겠는가? 우리 모두는 주저함이 없이 예수님을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은 훌륭한 교사가 지녀야 할 자질을 친히 보여 주신 분이다. 유일하면서 절대적인 권세로 가르치시며 교수 과정의 모범을 세워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남기신 유능한 교사의 모범은 무엇인가? 성숙함예수님은 어렸을 때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다”(눅 2:40).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신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성장해 가셨음을 말해 준다. 청소년기에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눅 2:52). 이것은 그분이 정신적(‘지혜와’), 신체적(‘키가’), 영적(‘하나님께 더 사랑스러워’) 그리고 사회적(‘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네 가지 면에서 성숙해지셨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의 교사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영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조화를 이룬 성숙함이 요구된다. 내용 이해도예수님은 가르치시는 내용을 확실히 파악하셨다. 하나님을 알리시고(요 1:18, 17:26) 그분의 말씀을 주시려고(요 3:34, 14:10, 14:24, 17:8)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가르치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셨다. 예수님은 강의 노트에 의존하지도 않으셨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으신 경우도 없었으며, 준비가 부족한 적도, 친구나 적으로부터의 질문에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하신 적도, 무엇을 전달해야 할지 주저하시는 경우가 없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주제를 완전하게 이해하셨기 때문에 매우 능력 있는 선생이 되셨던 것이다. 교사는 하나하나의 수업을 적절하게 준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를 해야 한다.  확실함예수님은 가르치실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셨기 때문에 확신 있게 말씀하셨다. 진리를 주장하실 때 한번도 ‘아마’, ‘혹시’ 또는 ‘어쩌면’ 같은 말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아셨고 그것을 선포하실 때 절대 더듬지 않으셨다. 오늘날의 교사들도 얼마만큼 준비를 잘 하느냐에 따라 확실함과 확신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다. 자기가 말하는 것에 자신이 없는 교사들은 배우는 학생들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 줄 수 없다. 불확실함은 다른 불확실함을 키울 뿐이다. 겸손예수님은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오셨다(빌 2:7).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마 20:28, 막 10:45)고 하셨고 ‘섬기는 자로 너희들 중에 있다’(눅 22:27)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섬긴다’는 단어는 ‘Diakoneo’라는 헬라어로서, “하찮은 일, 즉 다른 사람이 식사하는 동안 시중을 들거나 가정의 필요를 돌보는 일로, 품위가 없는 일”을 의미한다. 거만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칭송과 찬양을 받으려고 했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겸손을 보이셨고 제자들에게도 같은 것을 명하셨다. 가르침은 섬김의 기술로서, 다른 이들을 교사 자신이 아닌 겸손히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으로 인도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교사에게 교만이란 절대 금물이다.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으로는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없다. 자신을 낮추고 종의 자세를 취할 때 학생들이 존경하게 된다. 교만은 불쾌감을 조장하고, 겸손한 섬김은 감사를 가져온다.  일관성배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은 교사의 모순된 생활이다.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살라고 가르치지만 정작 교사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을 때 더 이상의 배움은 없다. 우리가 ‘선포한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모습을 학생들이 볼 때, 학생들은 우리와 성경과 주님을 확신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생활과 가르침이 완벽하게 일치된 모습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마 5:43~48), 그렇게 하셨다(눅 23:24). 그분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시고 그렇게 하셨다. 염려하지 말라 하셨고 자신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셨다(마 26:29, 26:42, 막 14:36).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가르치셨고 그들을 사랑하셨다. 유연성예수님은 매일 지정된 시간에 학생들과 앉아 정해진 학습 내용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물론 전하실 주제는 이미 분명히 정해 놓으셨고, 제법 긴 강의도 여러 번 하셨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전 계획 없이 주변 여건의 흐름에 맞게 즉각적으로 ‘가르치기에 매운 좋은 순간’을 만들어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갑작스러운 질문과 방해를 흔쾌히 받아들이시고 즉각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오늘날의 교사들에게도 그와 같은 유연성이 필요하다. 가르치기 위한 교안과 준비가 충분히 된 상태에서도 교사들은 학생들의 질문과 새로운 문제들에 열린 마음으로 대처해야 한다. 명확성예수님은 항상 명확하게 말씀하셔서 듣는 사람들이 뚜렷하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은 에둘러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도 전혀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분은 항상 분명하게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셨지 결코 자신의 지식이나 영적인 깊이로 감명을 주려고 하지 않으셨다. 사용하신 단어들은 언제나 단순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긴박감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긴박함을 갖고 가르치셨고 사역하셨다. 결연한 의지로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맡겨진 일을 이루셔야 하는 사명감에 이끌리신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주어진 기간 동안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려고 하나님 아버지가 맡겨 주신 일에 전념하셨다. 일정에 쫓기지 않으셨으며 시간이 없다고 모임을 취소하신 적도 없었다. 그분에게는 필요한 대상으로 사역하시고, 대적하는 자들의 질문에 답하시며, 제자들을 가르치시기에 필요한 시간이 항상 있으셨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책임, 곧 당신의 사명에 대한 헌신을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르치고 있는가? - 위의 글은 로이 B. 주크의 『예수님의 티칭 스타일』(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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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제492호]
201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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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최근 백악관 웨스트윙 지하에 대규모 건축 공사를 했다고 한다. 핵과 생화학, 방사능과 사이버 공격 등 그 어떤 공격을 가해도 건재한 신개념 특수 벙커라고 한다. 동시에 모스크바에도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특수 벙커를 건설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천지가 개벽해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무사할 수 있는 장소를 상상해보라.이 땅에는 절대로 안전한 곳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곳이 있으니 바로 그리스도 안이다. 그분은 우리의 은신처이자 피난처요 대피소다. 그런 주님을 표현하는 말로 시편에 “피난처”라는 단어가 자주 쓰였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위 같은 피난처시다. 시편 18:2절에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라고 했고, 71편의 저자는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3절)라고 기도했다. 많은 시편을 다윗이 썼는데, 그는 유대 산지에 벌집처럼 널려 있는 동굴 속에 숨어 추격군을 따돌리곤 했다. 목숨이 위태로울 때가 많았으나 하나님이 천연 벙커로 그를 현대의 방공호 만큼이나 안전하게 지키셨다. 잠시 눈을 감고 폭풍과 적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한 바위틈을 상상해 보라.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방패 같은 피난처시다. 시편 18편 30절에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라고 했고, 119편 114절에도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성경 시대의 전사는 방패를 앞세워 적의 화살을 막아냈다. 오늘날의 경찰관과 군인이 방탄복과 진압용 방패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편 저자의 말은 ‘하나님이 방패처럼 나를 둘러 사방에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이다. 불안이 몰려올 때마다 그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보라. 셋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망대 같은 피난처시다. 시편 61편 3절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라고 했다. 성경 시대의 망대는 두꺼운 벽과 높은 고도 덕분에 안전했다. 망대 위에 있는 전사에게는 중력이 그의 편이었다. 밑에서 소는 화살은 위로 갈수록 속도가 느려지나 망대위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적을 궤멸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망대이신 주님은 우리를 높이 올려 보호하신다. 적과 우리 사이에 그분이 친히 계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넷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막 같은 피난처시다. 시편 31편 19~20절에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라고 했다. 갑자기 비를 만나면 필사적으로 비를 피할 장소를 찾는다. 우리를 시기해서 방해하려는 사람이 으레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비가 쏟아질 때는 장막을 찾는 것이 최선이다. 그분이 친히 우리의 장막이 되어 사람의 꾀와 말다툼에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다섯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개 같은 피난처가 되신다. 시편 57편 1절에 다윗은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라고 썼고, 91편에도 “그가 너를 의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4절)라는 말씀이 있다. 농장에서 키우던 햇병아리들은 사람이 바짝 다가가면 엄마 닭 밑으로 모습을 감춘다. 엄마 닭은 용케 깃을 펴서 많은 새끼를 다 품는다. 최근에도 백조 한 마리가 털이 뽀송뽀송한 새끼 여섯 마리를 등 위에 거뜬히 싣고 큰 날개 자락으로 덮은 채 호수를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병아리나 새끼 새에게 어미의 날개 품보다 더 안전한 곳은 세상에 없다.여섯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새 같은 피난처가 되신다. 시편 59편 16절에 “주는 나의 요새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라고 했고, 91편 2절에도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온다. 46편의 저자도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일부 역본에 “피난처”가 “요새”로 옮겨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르는 성곽이요 성채가 되신다. 만일 지금 두렵거나 걱정된다면, 잠시 눈을 감고 망대와 방패와 성벽처럼 우리 삶을 둘러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묵상해보라. 자신이 연약하고 무력하게 느껴지거든, 어떤 적도 접근할 수 없는 요새 안에 있는 자신을 떠올려보라. 그 어떤 공격도 하나님의 능력보다 높거나 그분의 사랑보다 깊거나 그분의 약속보다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가 그분 안에 숨을 수 있다. 하나님을 나의 바위이자 방패요, 요새이자 망대요, 장막이시라고 언제나 고백할 수 있다. 그분의 날개 아래로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의 피난처는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진정한 안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 있다. 성경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1~3)고 말한다. - 위의 글은 도서출판 디모데의 신간인 로버트모건의『오늘 내게 필요한 힘』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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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하는 10가지 이유[제491호]
201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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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하는 10가지 이유 목회자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되게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반드시 목회 철학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50년간 한 교회를 섬기며 말씀으로 그 사역을 감당한 존 맥아더 목사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하는 10가지 이유를 통해 오늘날의 많은 목회자에게 강력한 도전을 준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영원하며 참된 능력이 있다.아직도 성경을 설교하는 주된 이유는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신성으로 가득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신선함과 풍성함 그리고 가르침의 깊이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고갈시키지 않는다. 저자 되신 분이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문화가 어떤 변화를 겪든지 하나님의 메시지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말했다. 영적인 대답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신 것에 집중해야 한다. 성경은 ‘주의 마음’을 알려준다. 목회자는 가장 심오하면서도 영원한 필요를 설교하지 않으면서, 현세의 피상적인 것에 정력을 기울이는 모습은 피해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진리를 명쾌하고 확실하게 설명한다.하나님은 사람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을 계시하셨다(시 119:105, 130). 하나님이 말씀을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계시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이에 대해 책임이 있다. 성경이 명료하지 않다면 모든 성경적 교리는 확실성이 결여되고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성경의 권위에 근거를 둔 교리적 확실성이 흔들리게 되면 개인적인 확신도 근거를 갖지 못하므로 틀림없이 흔들린다. 4.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믿을 만한 자기 계시이다.설교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하나님의 권위를 세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회중은 그들의 영혼에 대한 주권을 누가 가졌는지 이해한다. 하나님의 대사로서 설교자의 직무는 자신의 사상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왕을 올바르게 대변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사람의 마음에 나타내는 것이다. 5.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높인다.강해 설교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높인다. 교회의 참된 머리에 대한 반란은 대부분 성경 말씀을 고의적으로 약화시키는 데서 나타난다. 성경을 배제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실질적으로 잠재웠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성경을 치워 버리는 것은 유일하게 교회의 정당한 머리 되신 분에게 반기를 드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분의 백성에게 전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효과적으로 높이는 것을 뜻한다. 6. 하나님의 말씀은 백성의 성화를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과 성화에 사용하신다. 말씀과 성령은 목회에 있어 불가분의 관계이다. 성령은 말씀을 기록하는 인간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생기를 불어넣는 분이며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 성경을 펴고 성경이 뜻하는 것과 교리가 확증하는 것을 회중에게 전해야 한다. 성령이 진리를 사용하여 자원하는 영혼에게 위로와 확신을 줄 것이다. 설교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선포함으로써 성화된다. 7.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른 예배와 실천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성경은 예배의 실상과 진실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회중이 탁월한 예배를 경험하는 정도는 그들이 신령한 진리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가장 큰 기쁨과 감격으로 예배한다. 강해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회중을 많은 오류와 세상적인 욕심에서 보호하며 참된 예배로 정확히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순결한 실천으로 이끈다. 8. 하나님의 말씀은 깊이 있고 균형 있는 목회를 이룬다. 지속적인 성경 강해는 설교자의 믿음과 실천이 모든 성경 본문을 통해 검증된다. 설교자의 삶과 교리는 반드시 성경의 모든 각 구절로 검증을 받아야 한다. 큰 그림으로 볼 때 절 단위나 성경의 각 권 단위로 하는 설교는 목회에 신령한 균형을 가져온다. 그런 설교는 설교자가 사안을 무시하거나 자기 자랑에 빠지는 것을 예방한다. 설교자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에 집중하여 지속적이고 정확하게 성경을 설교하도록 부름 받았다. 강해 설교는 설교자가 하나님이 계시하신 방식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도록 요구한다.  9. 강해된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 개인의 성경 연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목사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친다면 그는 동시에 회중에게 개인적인 성경 공부의 가치와 축복에 대해 설명하게 된다. 사람들은 목사를 통해 말씀의 능력을 강력하게 체험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를 통해 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격할 때 회중은 그런 목사의 본을 따르려는 동기를 얻는다. 10. 하나님의 말씀은 목회에 대한 신령한 기초를 확립한다.말씀 설교에 집중하는 목회는 당연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목회이다. 수법이나 책략에 의지하기보다 내용과 방향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한다. 성경을 깊이 있고 지속적이며 정확하게 가르치는데 집중해야 한다. 목사가 자신의 사상이 아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 그런 모습을 통해 그가 결과에 대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가르쳐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역사하는 이는 성령이시며 그분의 능력이 사람을 확신에 이르게 하며 변화시킨다. 설교자는 단지 메시지를 충성스럽게 전하기만 하면 되며 회중이 이에 반응할 때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신다.  - 위의 글은 존 맥아더 목사의 ‘Together for the Gospel’ 컨퍼런스에서의 강의 내용을 요약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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