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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설교[제485호]


관리자   조회 : 307, 등록일 : 2018/08/07 09:33

 
보이는 설교

 
  요즈음은 보이는 라디오가 유행하고 있다. DJ이나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소리로만 들려주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어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앉아 방송을 진행하는 진행자의 모습을 이제는 영상으로도 볼 수 있게 서비스를 하고 있다. 소리의 청취를 넘어 이제는 영상으로 시청하는 라디오로 거듭나고 있다. 라디오 프로가 왜 ‘보이는 라디오’를 추구하고 있을까? 이는 단순히 듣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이 훨씬 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보이는 설교가 되었으면 한다. 물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를 눈으로 보며 메시지를 듣고 있기에 보이는 설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영상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밝히는 보이는 설교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통해 메시지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눈은 설교자를 보고, 귀로는 메시지를 듣지만, 생각과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모든 감각을 사용함으로 메시지를 들으며 생각과 마음이 그 메시지를 상상하고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설교의 탁월한 모델이시다.

  위대한 설교자이신 예수님은 비유로 청중들을 매료시키셨다. 예수님의 풍부한 화법은 청중의 마음을 일깨우고 생생한 묘사를 통해 사람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하심과 동시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셨다. 예수님은 매우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시려고 감동적인 비유를 드신다. 니고데모와 거듭남, 우물가의 여인과 생명수, 머뭇거리는 제자들에게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간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다

  소경이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본다. 외로운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실 때 가까이 다가선다. 도처에서 들리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사죄, 믿음, 격려, 그리고 청지기됨에 대한 중요한 신앙들을 알게 된다. “너희가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면”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는데”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방들이 있는데…” 라 말씀하시며 청중들의 마음을 끌어당기신다. 예수님은 또 비유를 사용하여 대적들에게 맞서신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소경된 인도자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예수님은 청중들의 귀에만 의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비유와 이야기를 사용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상상하도록 만드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그들이 보았던 것들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귀납적이고 청중 중심적인 스타일은 청중들을 설교에 끌어들였고 그 결과 그들은 듣고 보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학습 과정에 참여하였다. 예수님의 비유는 청중들의 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속에 새기게 했고 그들을 자극하여 삶의 변화로 이끄셨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를 통한 설교를 배우고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의 모범적인 설교는 사람들이 듣기만 하는 것보다 보고 행하는 것에 의해서 더 잘 배운다는 사실을 고려한 설교였기에 들려주는 것에서 그 기능을 다 하는 것만 같은 오늘날의 우리의 설교와는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신학교육의 여타 분야처럼, 설교학도 왼쪽 뇌 우성인 단어, 언어, 분석, 이론, 신학, 추상, 논증, 그리고 가정에 집중하였다. 성경과 선지자들 그리고 특히 예수님에 대한 강조는 수사적인 규칙과 주의하여 쓴 원고 속에서, 즉 전통적인 설교학이 선호하는 논리적 언어 속에서 사라졌다. 시각적이고 은유적이고 독창적이고 전체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도리어 인식적이고 추상적이고 좌측 뇌의 지시적인 것에 의해 중요성이 가리워졌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오늘날의 설교를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성경적인 전통보다는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으로의 변화로 대체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헬라어로 설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아람어로 설교하셨는데,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관계가 있는 셈어족의 방언이다. 예수님은 상업과 농업의 언어로, 공동 생활과 시민의 언어로 설교하셨다. 즉,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뿐 아니라, 보고 설교에 참여하도록 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셨다.

  우선적으로 설교자는 설교 본문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잘 전달하기 위한 관찰과 깊은 묵상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작업은 기본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어쩌면 이 과정속에서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이 필요할 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서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만약에 여기서 멈추고 설교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많은 시간을 공들여 연구한 본문의 내용이 청중들에게 잘 전달될 가능성은 약화된다. 청중들의 삶의 변화를 불러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설교방식에서 드러난 것 처럼 ‘보이는 설교’가 되도록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마무리된 원고를 출력함으로 설교 준비가 끝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설교자의 손에 쥔 그 원고가 설교자 자신에게도 보이는 설교로 다가오는지, 청중들이 원고속에 담긴 이 내용이 단순한 소리가 아닌 그들의 마음과 생각속에서 보이는 설교로 준비된 것인지를 한번 더 점검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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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인 사람 [제501호]
2018/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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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인 사람주님은 우리가 인생에 어떤 결과를 남기고 성과를 이루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어떤 직장, 학교, 결혼, 지역 등과 같은 것이 우리의 주 관심사가 되지만 하나님의 주 관심사는 아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닮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것에 관심이 있으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을 따라 살면 후회할 일은 절대 없다.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기에 믿음의 사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목적이 나의 목적보다 우선순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갔기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후회함이 없이 인생의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바울,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임을 삶으로 고백하는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사명, 하나님의 뜻에 흔들림이 없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았던 그가 그분을 닮고,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만을 의존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인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삶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르쳐 준다.1.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기쁨을 찾는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립보서 1:18)바울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한다. 지금도 기뻐하고 앞으로도 계속 기뻐할 것임을 밝힌다. 옥에 갇히고 환경적으로 매인 가운데 있고 질투하는 자들의 공격 속에서도, 죽음 속에서도, 육신 가운데 있을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하기로 선택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비방과 공격으로 말미암아 힘들지라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일로 인해 기뻐하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기쁨을 찾는다. 변화무쌍한 상황과 환경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부르셔서 사명의 자리에서 늘 한결같이 함께하셨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해 주실 그리스도만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았다. 그리스도는 처음과 나중이신 영원한 하나님,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의 연출가이시자 신랑으로서 함께 영원을 누릴 분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인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를 선택한다. 콜롬비아의 연구가 쉬나 아이엔가는 보통 사람이 매일 약 70번의 의식적인 선택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1년이면 25,550번의 선택을 하는 셈이고, 70년을 인생으로 치면 1,788,500번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내린 1,788,500번의 선택을 다 합치면 바로 그것이 우리 자신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신앙의 인격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가 선택하는 모습을 통해 그 사람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인 사람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을 선택한다. 이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간다. 그리스도가 칭송을 받고, 높임을 받고, 크게 드러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를 향한 비방에 대한 반박을 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싸울 수 있었지만 자신의 명예보다는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선택한다. 즉, 뒤집어 보면 자신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 방해되는 것을 늘 경계했다.
왜냐하면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바울의 삶과 죽음의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임을 믿고 고백하는 자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늘 ‘그리스도’를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며 그분만을 선택하는 자이다.3.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인 사람은 다른 지체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우선시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늘 둘 사이에 끼어 있거나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바울도 지금 그러한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육신으로 살며 사명의 열매를 맺는 것과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한 열망이 커서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 사이에 서 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대사와 같이 삶과 죽음의 양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일지라도 바울은 단지 자신의 죽음과 삶에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생사를 넘어 믿음의 형제들의 유익과 기쁨이었다. 이를 위해 믿음의 무리와 함께 있기 위하여 육신으로 있는 것을 선택한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의 유익 때문이다. 주님의 눈물과 절규 속에는 우리의 최고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현재 당한 일이 현실적으로는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수반하지만 그것이 가져올 유익을 생각하며 기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유익이 그리스도 앞에서 영원한 유익으로,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믿음의 진보가 나타나는 것과 같이 그들을 이롭게 하는 유익으로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기초로 한 선택이라면 결과가 어떠하든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을 모두 보고 계시며 모두 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역사로 아름답게 마무리 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임을 믿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성도는 그리스도에게서 기쁨을 찾고,
그분의 존귀함이 드러나고, 그분이 전파되는 것을 위해 선택하고,
주변의 지체들이 믿음의 진보와 참된 기쁨을 누리는 것을 우선시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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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과 신뢰 [제500호]
2018/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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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과 신뢰리더는 자기 자신과 따르는 사람에 대하여 바른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리더는 보스(Boss)가 아니기 때문이다. 셀프 리더십을 잘 발휘하며 자기를 이끌어야 하며, 따르는 사람들이 잘 따르도록 동기부여를 주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리더로서 반드시 겸비해야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성실과 따르는 이들을 향한 신뢰이다. 이큅(Equip)의 존 맥스웰은 이 두 가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도전을 준다.아는 체하지 말고 성실하라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 (욥기 38:2~3)욥기를 통해 하나님은 정의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나타내신다. 욥은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의견에 반박하고 있다. 하나님은 말씀을 끝내시기 전에 욥에게 “내가 세상을 창조하였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고 질문을 하신다. 많은 리더는 모든 것을 아는 체하고 싶어하는 커다란 유혹을 느낀다. 때론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리더는 흔히 자기 확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비이성적인 필요를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그러한 가식적인 태도를 금방 눈치 채게 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모든 답을 알고 있는 리더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리더에게는, 어떤 사항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잘못된 확신보다는 성실한 자세가 필요하다. 리더에게 성실성이 없다면, 그것은 그를 따르는 개인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리더는 사람들에게 거짓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한 우리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당신이 자신 없어 하는 주장이 마치 확실한 것처럼 말하지 말라. 오직 성실함으로 말하라. 비록 그로 인해 당신의 말이 전체 그림 중 극히 일부만을 색칠하게 될지라도 말이다. 모든 주장에 있어 잘못된 확신 보다는 성실함이 필요하다.신뢰가 사람을 꽃피우게 한다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 1:6~7)사람들은 기대 수준에 따라 그 평가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만일 리더인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회의와 의심을 나타낸다면 그들은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을 믿고 기대감을 표시한다면 그들은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이는 결국은 당신과 그들 모두에게 유익을 끼치는 일이다.리더로서 당신은 다른 사람을 믿어야 한다. 리더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믿음을 가질 때,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을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그 돈은 곧 바닥이 나고 만다. 자원을 주면 기대만큼 유용하게 이용되지 않는다. 실제적 도움을 주게 될 경우, 그들은 흔히 즉각적으로 자신들이 시작한 곳으로 뒷걸음질쳐 되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믿어 주면 그들은 당신을 신뢰하고, 의욕을 갖고 힘차게 행동하게 되며, 자립심(self-reliant)을 갖게 된다. 그들에게는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 그런 다음 자금과 자원, 도움이 제공될 때 그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주어진 모든 자원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다른 사람을 믿어 줄 때, 그가 아무리 자신 없고 미숙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꽃을 활짝 피울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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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 끝이 같은 인생 [제499호]
201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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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 끝이 같은 인생세상에는 4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처음도 좋고 끝도 좋은 사람. 처음도 나쁘고 끝까지 나쁜 사람. 처음에는 나빴지만 끝이 좋은 사람. 처음은 좋았다가 나중에는 나쁜 사람.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으로 인생의 종착점을 맞이하기를 원하는가?한때 열심이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그 열심이 사라져 버린 사람이 있다. 한때 열심의 자리에서 한몫을 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그 자리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한때의 열심이 아니라 늘 한결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 열심이 있다면 그 열심이 끝까지 가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생의 말미가 희미한 삶이 아니라 갈수록 선명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역대하 16장에는 유다 왕 아사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성경에 시작과 끝이 다른 다양한 사람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사는 시작이 괜찮은 왕이었다. 유다 땅에서 우상숭배를 몰아내고, 구스의 100만 대군을 물리쳤으며, 선지자의 격려와 경고를 들으며 지속적인 개혁을 진행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게 된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배제하는 삶으로 추락한다. 하나님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쌓아 두었던 은금을 의지한다. 즉, 자기가 축적한 자원을 의지한다. 자신의 전성기 때 여호와의 전에 드렸던 것이기에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며 함부로 사용한다. 북 이스라엘이 쳐들어와서 괴롭힐 때 아람 왕 벤하닷을 의지하며 도움을 구한다. 20년 전에는 100만의 구스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만 의지하며 도움을 구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선지자 하나니의 책망도 외면해 버린다. 그 결과 아사왕의 인생은 처음과 끝이 다른 모습으로 추락한다. 아사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역대하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사왕이 매우 중요한 것을 외면했기 때문이다.첫째,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한다.선지자 하나니는 아사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대하 16:9a). 초심을 잃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삶으로 추락한 아사는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잊으시고 보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두루 감찰하시며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베푸시는데 아사왕은 국가의 일시적 위기 극복을 위해 성전을 비우고 탁월한 외교정책으로 외부의 힘을 끌어들여 위기를 순간적으로 극복한다. 성공적인 외교정책으로 백성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다. 그의 장례식을 백성이 크게 치르어 줄 정도로 백성의 평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듯하다. 당장에는 나라와 민족에게 눈에 띄는 번영, 평화, 풍요가 주어진 듯하지만 하나님의 성전 곳간은 비워지고,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시며, 하나님 보시기에는 망령된 행위일 뿐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인기가 절정에 도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잊고 산다면 그것은 망령된 행동과 삶일 뿐이다.둘째, 하나님의 소리를 외면한다.아사는 왕위에 오른 지 10여 년 동안은 앞장서서 “여호와를 찾으라”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왕위에 오른 지 약 15년쯤 되었을 때는 구스의 100만 대군에게 승리했고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경청하며 지속적인 개혁을 진행했다. 그런데 지금은 선지자 하나니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도리어 화를 내고 선지자를 옥에 가두며, 그에게 동조하는 자를 학대하기까지 한다.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으면 듣는 능력을 상실한다. 그 결과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병적 증세가 나타난다. 아사의 증조 할아버지였던 솔로몬왕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듣는 마음을 달라고 했던 초심을 잃어버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 멀어지고 듣지 않음으로써 추락한 삶을 산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설교를 들을 때, 기도할 때, 소그룹 모임의 나눔에서, 지체와 동료들의 권면을 통해, 책을 통해, 자연을 통해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신의 음성으로 직접적인 계시는 아니지만 깨달음과 울림을 통해 말씀하신다. 들려오는 소리가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그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라면, 그 소리가 분명 맞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하여 바르게 반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셋째, 하나님을 찾는 것을 외면한다.아사왕에게 삶의 위기가 찾아온다. 발에 병이 들어 매우 위독한 상태에 직면한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의원만 찾을 뿐이다. 병들어 위독한 세월을 보내는 2년여간 하나님을 다시 찾고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날리고 그저 용하다는 의원을 찾느라고 전전긍긍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두렵고 떨리는 것은 아사왕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었던 삶을 살았던 자, 하나님을 찾았기에 평안과 형통을 누리게 되었다고 고백하던 자가 그 정도까지 추락하게 되었다(대하14:7). 사람이 늙고 병들면 없던 신앙도 생기고 하나님을 찾을 확률이 높아지는데 아사왕은 도리어 인생의 말미에서 하나님을 더욱 외면한다.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물음표’를 남겨서는 안 된다. 아사는 왕위에 오른지 35년 동안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6년의 마지막 여정은 우리로 하여금 물음표를 던지게 만든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주님을 닮아가던 한때의 신앙이 아닌 한결같은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한다. 계속 주님에게로 나아가는 삶 말이다. 신앙의 경주는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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