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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살피는 지혜[제490호]


관리자   조회 : 176, 등록일 : 2018/09/11 11:33

 
계절을 살피는 지혜
 

‘내 현재 상황에 비추어 무엇이 지혜로운 길인가?’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 오늘의 슬픔은 내일의 기쁨에 밀려날 것이다. 오늘의 분노는 아마도 내일의 넓은 시야로 다스려질 것이다. 오늘의 염려는 내일의 관심사로 대체될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날마다 그날의 염려가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의 즐거움, 두려움, 상황에 떠밀려 자칫 내일 후회할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결정을 내릴 때 당신의 현재 감정과 마음 상태를 감안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연한 일이다. 순간에 반응하는 성향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비는 일이 생긴다. 과잉 반응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었음을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는 경우가 많다. 보내고 나서 후회한 이메일이 적지 않다. 최소한 24시간만 기다렸어도 좀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화가 났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것임을 깨닫기도 한다.
 
순간을 넘어
인생 대질문의 각도는 순간을 넘어선다. 삶의 이번 계절에서 지혜로운 길이 다음 계절에는 지혜롭지 못할 수도 있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나는 여자들이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을 문제로 보지 않는다. 훌륭한 여자 교역자들이 없다면 우리 교회는 기능이 정지될 것이다. 그러나 일부 여자들의 경우, 인생의 특정한 시기 동안 집 밖에서 직장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은 아니다. 질문은 ‘여자들이 집 밖에서 일해야 하나?’가 아니다. ‘여자인 아무개가 집 밖에서 일해야 하나?’도 아니다. 일하는 엄마들이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인생의 이 특정한 계절에 내가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인가?’ 현재 맞이하고 있는 삶의 계절에 비추어 그것이 지혜로운 선택인지를 항상 고민하며 기도함으로써 결정해야 한다.
 
결정 보류
목사라면 누구나 이혼과 재혼을 둘러싼 문제로 씨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고통스러운 이혼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 많다. 동시에 상처 입은 그들은 반려자를 원한다. 이혼 서류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미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 있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관계를 찾고 있다.
반려자를 원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힘든 시기가 끝난 마당에 다음 단계의 삶으로 넘어가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진짜 관건은 그것이 아니다. 인생에서 이러한 힘든 계절을 맞은 독신 남녀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방금 지나온 일, 현재 내 마음 상태, 내 지친 감정에 비추어 무엇이 관계적으로 지혜로운 길인가?’
주변을 보면 결혼까지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을 자기네 부부 문제의 원인으로 꼽는 사람은 여태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더 기다렸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이 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그러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당신의 삶에 비추어 무엇이 당신에게 지혜로운 길인가? 당신의 심기와 정서 상태, 심지어 신체적 건강을 감안할 때 무엇이 지혜로운 길인가? 지금부터 1년 후면 중요한 요인이 아닐 수도 있는, 현재 당신이 맡은 책임과 헌신을 감안할 때 무엇이 지혜로운 길인가? 현재 당신의 재정 상태를 감안할 때 무엇이 지혜로운 길인가?
인생은 계절을 탄다. 오늘 적절한 것이 지금부터 한 달 후면 전혀 부적절할 수 있다. 무엇이 합법적이고 무엇이 가능한지, 심지어 무엇이 실제적인지 결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당신은 다른 기준으로 삶에 임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 과거의 경험과 현재 삶의 계절에 비추어 무엇이 내게 지혜로운 길인가?’ 
 


-  위의 글은 앤디 스탠리, 『인생 대 질문 (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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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삼는 목사의 중요한 우선순위 [제498호]
201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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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삼는 목사의 중요한 우선순위  현대 교회의 문제는 교회 출석률의 감소가 아닐지 모른다. 교회 출석률은 증가하는데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교회의 능력이 감소하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 제자양육이 교회 성장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성장하는 교회는 언제나 제자양육에 열심이다. 그러므로 제자 삼는 일은 교회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제자 삼기란 교육, 훈련, 전도, 목양이 일어나는 시스템을 관리하는 것이다.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회중을 이끄는 리더십 팀에는 다차원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교회를 굳건하게 하는 일에는 의도적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지도자에게 제자 삼기를 교회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오늘의 리더들도 회중의 성장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리더들은 비전과 수단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 상처 입은 사람과 건강한 사람을 모두 성숙으로 이끄는 영적인 비전과 수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교회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은 목회자는 무엇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삼아야 하는가?첫째, 말씀에 헌신하여 복음을 지켜라.신실한 목회자는 말씀을 연구하고 아는 일에 자신을 바친다. 청중 앞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은 숙련된 장인이라야 한다. 실망스럽게도 목회자가 말씀을 사역 방식에서 최우선에 두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본다. 사역 방식이란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행동 방식을 말한다. 가장 좋은 시간에 어떤 일을 하는가? 리더들을 훈련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그들과의 만남에 시간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관리와 운영을 위해 임원 회의에 참석하는 데 시간을 소비하는가?제자양육에 헌신하지 않는 목회자가 많은 이유는 자신이 먼저 말씀에 기록된 사역에 온전히 헌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으로 씨름하고 말씀을 토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기로 결단하는 리더는 제자도의 관점으로 사역을 바라본다. 그러나 리더가 효과적인 일만 하려는 실용주의의 유혹에 넘어갈 때 그는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이다. 교회 리더에게 사역의 바른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며 가르치는 것이다.둘째, 리더십 개발로 교회를 지켜라.교회 리더들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기본적 영적 자질과 리더십 능력이다. 기본적 영적 자질이란 성품, 신실함, 은사를 말한다. 배가하는 리더에게는 6가지 사역 기술이 있다. 성경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제자도의 개념을 분명히 알며, 사람들을 잘 관리하고 가르치며,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사람들을 바로잡으며, 전도한다. 이 원칙은 모두 성경에 그 뿌리를 둔 것이다. 각 원칙을 실천하는 방식은 리더 개인의 취향과 방식에 달려 있다. 리더들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입증하고, 자리를 맡기 전 충분한 교육을 마쳤을 때 일과 사역을 더 잘할 수 있다. 리더십 개발은 교회가 추구하는 목표의 탁월한 모범을 교회에 제시한다. 가장 강력한 교육 수단은 지식과 지식이 적용된 사례의 결합이다. 교회 리더들이 교회의 가르침과 우선순위를 삶으로 보일 때 사람들이 따라온다. 좋은 교리와 성경 말씀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리더십 개발에 대한 헌신이 포함되어야 한다. 리더들을 세워서 재생산시키지 않는 목사는 불성실한 목자이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르는 사람이다.셋째, 좋은 본보기가 되어 사역을 지켜라.‘사람들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대로 보고 배운다’, ‘비전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라 보고 체득하는 것이다.’ 이렇듯 모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은 많다. 성경 역시 모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베드로는 리더들에게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했으며(벧전 5:3) 바울은 디모데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다(고전 11:1, 빌 4:9).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의 성품을 따르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진리의 몸과 사역의 철학을 따르기를 바랬다. 바울은 자신이 방문하는 교회마다 표준화된 진리를 가르쳤다. 핵심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며 부수적으로 지상명령과 실천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본질을 붙잡고 그 본질에 충실한 삶과 사역을 통해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 위의 글은 빌헐(Bill Hul)의 『제자 삼는 교회』(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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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를 쓰러뜨리는 끔찍한 질병[제497호]
201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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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를 쓰러뜨리는 끔찍한 질병돌처럼 굳어 버린 마음(Hardened Hearts).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부름을 받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 물질적 안정, 평범한 가정생활, 심지어 직업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이 돌처럼 굳어 버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막 6:52, 8:17 : 개역성경에는 둔한 마음이라고 표현됨). 우리의 마음도 돌처럼 굳어 버릴 수 있을까?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그 헌신 속에는 그리스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이루실 일들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막는 나만의 욕심이 뒤섞여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자신만의 계획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느라고 정작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목적을 놓치고 만다. 제자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무엇이 제자들로 하여금 돌처럼 굳어 버린 마음을 가졌노라는 책망을 받게 만들었을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질병은 무엇일까?어두워진 깨달음(막 7:24~30)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러 찾아왔다. 그녀를 물리치려는 예수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예수님은 직접 가시지도, 만지시지도 않으시고 한 마디 언질도 없이 그녀의 딸을 고쳐 주셨다. 비록 그 여인은 깨달음에서는 다소 부족하기는 했지만 주님을 향해서는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자들을 보면 메시야에 관한 구약성경의 지침을 평생 알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수로보니게 여인과는 대조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했고 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행하시는 일을 몸소 듣고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그들의 마음이 굳어 있었기에 그들의 지성도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녀가 가진 지식을 뛰어넘어 믿음을 가졌지만 그와 반대로 제자들은 그들이 소유한 지식에 훨씬 못 미치는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이다.먹은 귀, 어눌한 혀(막 7:31~37)이 사건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었고 제자들의 귀가 곧 열릴 것을 예시하려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귀머거리 남자를 고치셨다. 제자들에게 이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도 없을 것이다. 굳어 버린 마음은 귀를 먹게 하고 혀를 어눌하게 한다. 제자들은 진리를 듣기는 들어도 부분적으로만 들었고, 진리를 말했지만 분명하지 않게 말했다. 온전한 믿음이 그들의 귀를 열어 주기까지 그들은 결코 제대로 듣거나 말하지 못할 것이다.반복된 기적(막 8:1~10)예수님이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다. 앞서의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되새기게 하는 이른바 ‘재방송’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보내고자 하셨던 메시지는 분명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철저히 부족한 사람일 뿐이며 예수님의 풍족함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대신 채우시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가진 자원만을 의존하고자 하는 돌처럼 굳어 버린 마음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을 놓치게 만든다.굳어 버린 마음(막 8:11~21)예수님이 여러 기적을 베푸신 후에 바리새인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와 표적을 구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가 예수님을 신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시험하려는 데 있음을 아시고는 거절하셨다. 그런 후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셨다. 배 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누룩이란 예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오히려 시험하고자 했던 그들의 악한 의도를 일컫는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중을 완전히 놓친 채 그들에게 떡이 없는 것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고 당황해했다. 예수님이 오천 명과 사천 명을 이미 먹이셨던 분이라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주님과 함께하며 배우고 목격했던 기적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무언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 마음이 둔하냐”라는 물음으로 핵심을 분명하게 짚어 주셨다(막 8:17). 어두워진 깨달음, 먹은 귀, 어눌한 혀 등은 오직 한 가지 사실을 드러낸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 버렸다는 것이다.가려진 눈(막 8:22~26)주님은 제자들에게 메시지를 분명히 짚어 주시기 위해 한 가지 기적을 더 행하셨다. 벳세다에서 소경 한 사람을 고쳐 주신 것이다. 하지만 그 기적은 다른 기적들과는 달리 두 단계로 일어난다. 한 번 만지심이 아닌 두 번 만지심을 통해 소경의 눈이 확실하게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주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자들이 눈은 있으되 보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의 마음이 굳었고, 깨달음이 어두웠고, 귀는 먹었고, 혀는 어눌했던 것처럼 그들의 눈도 가려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사람들을 보고도 나무로 혼동했던 소경처럼, 제자들도 메시야를 그저 숲인 양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지도자가 앓는 끔찍한 질병도 이와 같을 수 있다. 굳어 버린 마음이 우리가 소유한 진리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도록 막는 만성적인 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으며, 이것이 우리의 손에까지 영향을 끼쳐 우리를 무력하고 비효과적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 혹 우리의 마음이 굳어 버린 상태, 끔찍한 질병에 걸린 상태는 아닌지 점검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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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다[496호]
2018/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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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다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진실로 중요한 것은 딱 하나뿐이다.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멸망하게 하는 원수의 악한 계획으로부터 남녀노소, 즉 사람을 구하는 일에 열심을 내신다. 사람들의 매일의 삶과 몸부림에,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에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다.예수님은 마치 암탉이 연약한 병아리를 품듯이 자신의 날개 아래 사람들을 모으기 원하셨기에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다. 마치 목자 잃은 양 떼처럼 눌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보시며 그들을 향한 연민에 가슴이 저미셨던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세상에 오신 까닭을 자신의 입으로 이렇게 표현하지 않으셨던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살았던 적이 없으셨다. 이 땅에서의 삶이 길지 않음을 아셨기에 언제나 구원의 대상을 마음에 품고 사셨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사람 낚는 사역을 위해 정기적으로 안식을 취하시고 재충전을 위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것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이익에 몰두하거나 자신의 업적을 남기기 위한 삶을 살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삶은 오로지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으로 인해 위험에 처한 유일한 대상이자 영원토록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오직 단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몸소 실천해 보이기 위해 사셨다. 오직 사람만이 중요하다는 메시지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팔을 뻗으신 대상은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서 멸시받고, 정죄당하고, 미움받았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자리를 떠날 때까지 그 여인의 곁에 서 계셨다.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었던 세리나 술꾼이나 얼굴이 알려진 창녀와 함께 잔치에 참석하셨다. 예수님은 교만함과 위선적인 의로움에만 집착했던 거만한 종교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지극히 작은 불꽃이라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 외의 다른 것은 예수님께 아무런 상관이 되지 않았다. 인종도, 성별도, 지위도, 과거도, 사람들의 시선도, 계속되는 실패조차도. 자, 그러므로 기억하자. 우리에게도 할 일이 넘친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동차 범퍼에 ‘사람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다!’라는 스티커를 부착할 필요가 있다. 많은 면에 있어서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한다는 것은 끝이 없는 부르심이다. 이 말은 당신이 삶을 포기하고 당신의 우선순위를 버린 채 누군가 지친 영혼을 찾아 나서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삶 가운데로 데려오시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라고 할지라도 당신의 마음을 계속해서 열어 놓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이 상식 수준을 벗어난 무례함과 뻔뻔함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은 결코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굳은 결단과 의지를 가지고 당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그에게까지 흘러넘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은 많고 시간은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명자로서 우리의 삶이다.당신의 세계를 예수님께 내어 드리도록 결단해야 한다. 이 결단은 매우 위대한 결단일 것이다. 단 그 사역에 뛰어들기 전에 사역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 명심해야 할 몇 가지 단순한 법칙을 짚어 보자.첫째, 당신이 모든 사람을 항상 도울 수는 없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한계를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도 모든 사람을 다 고치시거나 다 도와주시지는 않으셨다.둘째, 당신의 우선순위를 세우라. 당신이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느라고 그 사람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셋째, 지칠 때는 한 발자국 물러서라. 빈 가슴으로 사람을 섬길 수는 없다. 예수님도 안식을 취하시려고 잠시 사람들에게서 떨어지셨다. 당신의 가슴이 비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들어오면 재충전할 방법을 모색하고 그런 다음에 새 힘으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라.넷째, 당신의 역량을 알라. 당신이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 도울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우리는 그저 그들 곁에 함께 있어 주기만 할 수도 있다. 그 과정 속에 제한된 도움만 줄 수도 있다.다섯째, 우리가 결코 도울 수 없는 사람도 있음을 기억하라. 불행한 일이지만 문젯거리를 부둥켜안고 있는 길만이 남의 관심을 끌거나 사랑을 받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소수 있다. 만일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당신이 그들을 도울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문제가 곧 그들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엄청난 시간을 쏟아부은 후에도 눈에 보기에 아무런 진척이 없거나 반응이 없다면 당신은 점잖게 물러나서 당신의 시간과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재투자할 필요가 있다. - 위의 글은 조셉 스토웰의 『열정의 회복』(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하여 부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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