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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제492호]


관리자   조회 : 307, 등록일 : 2018/10/02 12:00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최근 백악관 웨스트윙 지하에 대규모 건축 공사를 했다고 한다. 핵과 생화학, 방사능과 사이버 공격 등 그 어떤 공격을 가해도 건재한 신개념 특수 벙커라고 한다. 동시에 모스크바에도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특수 벙커를 건설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천지가 개벽해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무사할 수 있는 장소를 상상해보라.
이 땅에는 절대로 안전한 곳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곳이 있으니 바로 그리스도 안이다. 그분은 우리의 은신처이자 피난처요 대피소다. 그런 주님을 표현하는 말로 시편에 “피난처”라는 단어가 자주 쓰였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위 같은 피난처시다. 시편 18:2절에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라고 했고, 71편의 저자는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3절)라고 기도했다. 많은 시편을 다윗이 썼는데, 그는 유대 산지에 벌집처럼 널려 있는 동굴 속에 숨어 추격군을 따돌리곤 했다. 목숨이 위태로울 때가 많았으나 하나님이 천연 벙커로 그를 현대의 방공호 만큼이나 안전하게 지키셨다. 잠시 눈을 감고 폭풍과 적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한 바위틈을 상상해 보라.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방패 같은 피난처시다. 시편 18편 30절에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라고 했고, 119편 114절에도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성경 시대의 전사는 방패를 앞세워 적의 화살을 막아냈다. 오늘날의 경찰관과 군인이 방탄복과 진압용 방패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편 저자의 말은 ‘하나님이 방패처럼 나를 둘러 사방에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이다. 불안이 몰려올 때마다 그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보라. 

셋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망대 같은 피난처시다. 시편 61편 3절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라고 했다. 성경 시대의 망대는 두꺼운 벽과 높은 고도 덕분에 안전했다. 망대 위에 있는 전사에게는 중력이 그의 편이었다. 밑에서 소는 화살은 위로 갈수록 속도가 느려지나 망대위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적을 궤멸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망대이신 주님은 우리를 높이 올려 보호하신다. 적과 우리 사이에 그분이 친히 계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넷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막 같은 피난처시다. 시편 31편 19~20절에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라고 했다. 갑자기 비를 만나면 필사적으로 비를 피할 장소를 찾는다. 우리를 시기해서 방해하려는 사람이 으레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비가 쏟아질 때는 장막을 찾는 것이 최선이다. 그분이 친히 우리의 장막이 되어 사람의 꾀와 말다툼에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다섯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개 같은 피난처가 되신다. 시편 57편 1절에 다윗은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라고 썼고, 91편에도 “그가 너를 의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4절)라는 말씀이 있다. 농장에서 키우던 햇병아리들은 사람이 바짝 다가가면 엄마 닭 밑으로 모습을 감춘다. 엄마 닭은 용케 깃을 펴서 많은 새끼를 다 품는다. 최근에도 백조 한 마리가 털이 뽀송뽀송한 새끼 여섯 마리를 등 위에 거뜬히 싣고 큰 날개 자락으로 덮은 채 호수를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병아리나 새끼 새에게 어미의 날개 품보다 더 안전한 곳은 세상에 없다.

여섯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새 같은 피난처가 되신다. 시편 59편 16절에 “주는 나의 요새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라고 했고, 91편 2절에도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온다. 46편의 저자도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일부 역본에 “피난처”가 “요새”로 옮겨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르는 성곽이요 성채가 되신다. 만일 지금 두렵거나 걱정된다면, 잠시 눈을 감고 망대와 방패와 성벽처럼 우리 삶을 둘러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묵상해보라. 자신이 연약하고 무력하게 느껴지거든, 어떤 적도 접근할 수 없는 요새 안에 있는 자신을 떠올려보라.
 
그 어떤 공격도 하나님의 능력보다 높거나 그분의 사랑보다 깊거나 그분의 약속보다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가 그분 안에 숨을 수 있다. 하나님을 나의 바위이자 방패요, 요새이자 망대요, 장막이시라고 언제나 고백할 수 있다. 그분의 날개 아래로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의 피난처는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진정한 안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 있다. 성경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1~3)고 말한다.
 


- 위의 글은 도서출판 디모데의 신간인 로버트모건의『오늘 내게 필요한 힘』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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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에 부딪힐 때 [제520호]
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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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에 부딪힐 때(누가복음 5:1~11)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해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상황도 만나게 된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며 열심히 일했지만 기대하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업이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우리는 한계에 부딪혔을 때 세상 다른 어떤 방법이 아닌, 주님과 함께 주님의 방법으로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세 가지 결단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결단이 있어야 나 홀로 동분서주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뛰고, 주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첫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움의 결단이다.나를 비우고 주님으로 채우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나를 비움으로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주님이 함께하시도록, 주님이 내 삶에 오셔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진다는 표현은 내가 차지하고 있던 삶의 자리가 점점 비워지고 주님이 내 삶에서 차지하시는 자리가 점점 넓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내가 나의 삶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분을 주님이 맡으실 수 있도록 비워 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비움을 통해 주님에게 내어 드리는 결단을 할 때 우리의 한계가 오히려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 도구로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움이 있어야 채워짐이 있다. 열심히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 한계와 문제가 찾아올 때는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말이다. 무조건 열심히만 달려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내가 지금 주님에게 비워 드려야 할 삶의 부분이 어디인지 돌아보자.둘째, 내려놓음의 결단이다. 나에게 익숙한 방법이나 경험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한계에 부딪혔을 때는 우리가 지쳤을 때이고 낙심했을 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보다 우리의 감정이 내는 소리를 듣기 쉽다. 하나님의 요구가 오히려 비논리적으로 들리고 최선의 방법이 아닌 것처럼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여야 한다. 또한 결과는 하나님에게 맡기고 과정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결과를 맡기지 못하면 순종할 수 없다. 내가 보고 싶은 결과를 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여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한정되어 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힐 줄은 몰랐다. 결과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순종했더니 기적을 맛본 것이다.셋째, 바라봄의 결단이다.우리는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크고 위대한 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을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한 마리도 낚지 못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대낮에 한가운데에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셨고, 예수님은 두 대의 배가 만선이 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 기적을 일으키신 궁극적인 목적은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실 위대한 일을 바라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작은 꿈을 깨고 하나님의 큰 꿈을 품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그래서 그 기적을 보이신 후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b)라고 하셨던 것이다.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내일을 믿을 수 있고, 내일을 믿는 사람은 오늘을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왜 나는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왜 나는 이것밖에 할 수 없는가?’ 하는 한계에 부딪히는 상황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비울 수 있고, 내려놓을 수 있고,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때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그렇다면 그때 우리는 기적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은혜로 삽니다』(도서출판 디모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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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제519호]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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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소통이 잘 못하는 일곱 가지 부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총사령관이다. 그는 감독하는 일을 한다. 자녀가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하면 그는 감독하는 태도로 문제를 지적해 내거나 명령을 내린다. 도덕론자도 있다. 그는 늘‘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또는 ‘그것을 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자녀들이 그의 가치관을 이해한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알은체하는 사람은나이를먹을수록자연히아는것이많아진다고믿는다. 말을 할 때마다 ‘내가 너만 했을 때는’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심판자는심지어말하는사람의말이채끝나기도전에이미판단을내려버린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었어’ 또는 ‘만일 네가 지혜로웠다면, 이렇게 했을 텐데’라고 말한다. 비평가가 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그는 모든 논리 중에서 흠을, 모든 일에서 실수를 그리고 모든 제안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기에 바쁘다. 심리학자도 있는데, 늘 자녀를 분석한다. ‘왜 그렇게 했는지 말해 봐’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이야기하거라.’ 위로자는 너무 빨리 동정을 해 버리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까지 파고들 수가 없다. 늘 동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소통이 안 되는 데는 반드시 그 원인이 존재한다. 원인을 잘 파악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으로 나아간다면 대부분의 가정 안에서의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의사소통 자문협회(Communications Consultants Associated)의 회장인 스테일(Lyman K. Steil) 교수는 의사소통에 네 단계의 과정이 있음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 네 단계는 한 개의 삼각형과 같으며 각 단계는 그 아래 단계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단계에서 얼마나 의사소통을 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낮은 단계에서 얼마나 의사소통을 잘 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일상적인 의사소통(phatic communication)이다. 간단히 말해서 ‘잡담’이다. 일상이라는 말은 ‘사람들과 함께 연결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잡담의 역할이다. 우리는 자녀들과 더불어 이러한 것, 즉 학교와 친구, 희망사항 그리고 장래 꿈에 대한 자연스런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한다. 잡담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자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기초가 된다.두 번째 단계는 카타르시스적인 의사소통(cathartic communication)이다. 이 단계에서 억눌린 감정들이 풀어지게 된다. 이는 자녀들의 성장 과정에 따르는 좌절감을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가 된다. 카타르시스적 의사소통은 자녀의 감정과 욕구불만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데 이는 부모가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 준다고 느낄 때 가능하다. 하지만 이 단계의 의사소통은 첫 번째 단계인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확고한 기초가 다져져 있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세 번째 단계는 정보적 의사소통(informative communication)이다. 아이디어나 정보 혹은 자료들을 나누어주는 단계이다. 많은 부모가 이 단계의 의사소통에 너무 관심을 쏟는 나머지 우선적으로 사소한 대화와 카타르시스 단계의 의사소통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네 번째 단계는 설득적 의사소통(persuasive communication)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노력하고 우리의 관점대로 사물을 보게 하려고 힘쓴다. 부모들은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이 설득적 의사소통 단계에 쏟는다. 부모가 자녀들이 옳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성경의 명령이기도 하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잠언 22:6)“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그러나 만일 부모가 앞의 세 단계의 의사소통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지 못한다면 설득적 의사소통이 잘 될 수가 없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영향을 주며 그들을 설득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의 말을 더 잘 들어 주고, 그들이 처해 있는 단계에서 의사소통을 하며, 정보적 단계와 설득적 단계로 옮겨가기 전에 사소한 대화 단계와 카타르시스적인 단계의 의사소통을 충분히 해야 한다. 물론 이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자녀들은 잘 듣지 않는 사람과는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해 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자녀들과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하기를 원하는가? 그들을 반듯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를 소망하는가? 위에서 언급한 의사소통의 네 단계를 삶에 정착시키며 자녀와의 공감을 확장시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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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모순 [제518호]
2019/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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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모순 전국시대 초(楚)나라에 무기 상인이 있었다. 그는 시장으로 창과 방패를 팔러 나갔다. 상인은 가지고 온 방패를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방패를 보십시오. 아주 견고하여 어떤 창이라도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창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여기 이 창을 보십시오. 이것의 예리함은 천하일품, 어떤 방패라도 단번에 뚫어 버립니다.” 그러자 구경꾼 중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 예리하기 짝이 없는 창으로 그 견고하기 짝이 없는 방패를 찌르면 도대체 어찌 되는 거요?” 상인은 말문이 막혀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다가 서둘러 달아나고 말았다.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명제, 혹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를 모순(矛盾, oxymoron)이라고 한다. ‘믿을 만한 사기꾼’, ‘가난한 부자’, ‘사랑의 증오’, ‘즐거운 비명’, 찬란한 슬픔’, ‘다 아는 비밀’ 등과 같은 표현이 그러한 것을 나타낸다. 모순은 이러한 것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다움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모순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모순이 나타나지 않도록 늘 진리의 말씀을 따라 나아가며 진실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비난의 원인이 되는 모순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가 삶의 법과 기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오늘날의 세상은 점점 자기가 기준이 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객관적 기준이 희미해 지고 자기 생각과 느낌에 따라 움직이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과연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자기가 삶의 법과 기준이 되니 갈수록 상대적인 비교와 평가가 난무한다. 자족과 감사가 사라진다. 심한 갈증 때문에 바닷물을 먹은 자들과 같은 인생을 펼친다. 악순환에 사로잡힌 삶을 펼친다. 갈증 해소를 위해 급한 마음에 바닷물을 계속 들이마시지만 점점 탈수 증세가 일어나고 입이 바짝 마르더니 결국 혈압이 떨어지고 심장박동수가 높아지면서 의식불명의 혼수상태가 찾아와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현실의 문제에만 함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삶을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자이기에 잠깐 동안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사는 현재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현실이 어렵지만, 어렵고 힘듦을 떠나 해 아래에서의 모든 삶이 헛되다고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해 아래에서의 현실의 삶이 아닌, 하늘의 하나님 아래에서 사는 삶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임재 앞에서 사는 삶임을 날마다 상기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사람들의 비난의 원인이 되는 삶의 모순이 시간이 갈수록 사라지게 될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재정적 위기, 건강, 직업, 사업, 자녀, 부부 관계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당신은 하나님께 어떤 자리를 내어 드리고 있는가? 삶의 어려운 상황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모든 관심은 문제의 해결에만 급급할 때가 많다. 빈곤한 삶이 풍요의 삶으로, 병약한 육체가 강건한 육체로, 실패의 자리가 성공의 자리로 바뀌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모든 상황을 허락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해서는, 그분의 왕 되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모습에 익숙해질 때 비난받기에 합당한 모순은 점점 심화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움’에 기인하여 나타나야 할 모순이 있다. 하나님의 왕 되심,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며 삶의 주도권을 그분께 내어 드리며 평생 복음을 위하여 선교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바울이 이것을 우리에게 잘 가르쳐 준다. 그는 고린도후서 6장에서 자신의 삶에 나타난 거룩한 모순?을 고백한다. “8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10) 당신의 삶에서 발견되는 모순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사람들의 비난을 단번에 끄집어 내는 모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다움’의 매력성을 한껏 발산하도록 하는 거룩한 모순인가?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을 삶의 법과 기준으로 삼는 삶을 통해 현재를 넘어 영원한 삶을 이 땅에서도 누리는 거룩한 모순이 가득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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