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mmunity

Column

칼럼


처음과 끝이 같은 인생 [제499호]


관리자   조회 : 308, 등록일 : 2018/11/27 12:09

 
처음과 끝이 같은 인생

세상에는 4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처음도 좋고 끝도 좋은 사람. 처음도 나쁘고 끝까지 나쁜 사람. 처음에는 나빴지만 끝이 좋은 사람. 처음은 좋았다가 나중에는 나쁜 사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으로 인생의 종착점을 맞이하기를 원하는가?
한때 열심이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그 열심이 사라져 버린 사람이 있다. 한때 열심의 자리에서 한몫을 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그 자리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한때의 열심이 아니라 늘 한결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 열심이 있다면 그 열심이 끝까지 가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생의 말미가 희미한 삶이 아니라 갈수록 선명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역대하 16장에는 유다 왕 아사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성경에 시작과 끝이 다른 다양한 사람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사는 시작이 괜찮은 왕이었다. 유다 땅에서 우상숭배를 몰아내고, 구스의 100만 대군을 물리쳤으며, 선지자의 격려와 경고를 들으며 지속적인 개혁을 진행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게 된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배제하는 삶으로 추락한다. 하나님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쌓아 두었던 은금을 의지한다. 즉, 자기가 축적한 자원을 의지한다. 자신의 전성기 때 여호와의 전에 드렸던 것이기에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며 함부로 사용한다. 북 이스라엘이 쳐들어와서 괴롭힐 때 아람 왕 벤하닷을 의지하며 도움을 구한다. 20년 전에는 100만의 구스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만 의지하며 도움을 구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선지자 하나니의 책망도 외면해 버린다. 그 결과 아사왕의 인생은 처음과 끝이 다른 모습으로 추락한다. 아사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역대하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사왕이 매우 중요한 것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한다.
선지자 하나니는 아사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대하 16:9a). 초심을 잃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삶으로 추락한 아사는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잊으시고 보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두루 감찰하시며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베푸시는데 아사왕은 국가의 일시적 위기 극복을 위해 성전을 비우고 탁월한 외교정책으로 외부의 힘을 끌어들여 위기를 순간적으로 극복한다. 
성공적인 외교정책으로 백성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다. 그의 장례식을 백성이 크게 치르어 줄 정도로 백성의 평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듯하다. 당장에는 나라와 민족에게 눈에 띄는 번영, 평화, 풍요가 주어진 듯하지만 하나님의 성전 곳간은 비워지고,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시며, 하나님 보시기에는 망령된 행위일 뿐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인기가 절정에 도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잊고 산다면 그것은 망령된 행동과 삶일 뿐이다.

둘째, 하나님의 소리를 외면한다.
아사는 왕위에 오른 지 10여 년 동안은 앞장서서 “여호와를 찾으라”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왕위에 오른 지 약 15년쯤 되었을 때는 구스의 100만 대군에게 승리했고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경청하며 지속적인 개혁을 진행했다. 그런데 지금은 선지자 하나니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도리어 화를 내고 선지자를 옥에 가두며, 그에게 동조하는 자를 학대하기까지 한다.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으면 듣는 능력을 상실한다. 그 결과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병적 증세가 나타난다. 아사의 증조 할아버지였던 솔로몬왕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듣는 마음을 달라고 했던 초심을 잃어버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 멀어지고 듣지 않음으로써 추락한 삶을 산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설교를 들을 때, 기도할 때, 소그룹 모임의 나눔에서, 지체와 동료들의 권면을 통해, 책을 통해, 자연을 통해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신의 음성으로 직접적인 계시는 아니지만 깨달음과 울림을 통해 말씀하신다. 들려오는 소리가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그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라면, 그 소리가 분명 맞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하여 바르게 반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찾는 것을 외면한다.
아사왕에게 삶의 위기가 찾아온다. 발에 병이 들어 매우 위독한 상태에 직면한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의원만 찾을 뿐이다. 병들어 위독한 세월을 보내는 2년여간 하나님을 다시 찾고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날리고 그저 용하다는 의원을 찾느라고 전전긍긍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두렵고 떨리는 것은 아사왕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었던 삶을 살았던 자, 하나님을 찾았기에 평안과 형통을 누리게 되었다고 고백하던 자가 그 정도까지 추락하게 되었다(대하14:7). 사람이 늙고 병들면 없던 신앙도 생기고 하나님을 찾을 확률이 높아지는데 아사왕은 도리어 인생의 말미에서 하나님을 더욱 외면한다.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물음표’를 남겨서는 안 된다. 아사는 왕위에 오른지 35년 동안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6년의 마지막 여정은 우리로 하여금 물음표를 던지게 만든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주님을 닮아가던 한때의 신앙이 아닌 한결같은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한다. 계속 주님에게로 나아가는 삶 말이다. 신앙의 경주는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어떠한가? 



499.jpg

(2018.11.27)_처음과_끝이_같은_인생.docx



글쓴이 비밀번호
 
글수 510Page 1 / 170
인내에 대한 가르침 [제516호]
2019/04/23
26
인내에 대한 가르침우리가 날마다 행할 일에 대하여 J. I. 패커는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명하신다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인내는 금욕주의처럼 억지로 웃으며 참는 것이 아니다. 인내란 당신을 모든 것을 온전히 갖춘 사람으로 만들기로 결심하신 하늘의 코치가 계획하신 운동 프로그램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즐겁지 않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이다. 그러기에 인생이라는 퍼즐의 분명하지 않은 하나의 조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퍼즐의 전체 그림을 보여 주는 안내도가 없을지라도 완성된 모양을 알고 계신 분을 신뢰하며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인내를 개발하려고 노력한다.  청교도인 토마스 왓슨은 “인내심이 없는 것과 불신만큼 하나님의 백성이 더 빠지기 쉬운 죄는 없다. 언제든 그들은 불신으로 인해 쇠잔해지거나 인내하지 못함으로써 초조함의 나락에 빠질 수 있다”라고 말한다.당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의사는 수술을 위해 밝은 빛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역사하시기를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인격을 배우는 데는 우리의 인생이 순항할 때가 아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로 하여금 내면으로 들어가 새로운 인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믿음,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자원을 찾으라고 요구할 때만 우리는 인격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어쩌면 지금 당신의 가족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때를 하나님이 숨겨진 것을 드러내시는 때로, 그분에 대한 신뢰를 배울 수 있는 상황으로 그리고 미래의 좋은 열매를 향하여 딛고 나아가는 디딤돌로 보면 어떨까?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일하신다. 야고보서 5장에는 인내라는 단어(또는 동의어)가 7번 나온다. ·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약 5:7a)·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 기다리나니” (약 5:7b)· “너희도 길이 참고” (약 5:8a)·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약 5:10)·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약 5:11a)인내, 기다림, 고난, 오래 참음, 견딤. 이 모두가 오늘날의 유명한 설교나 책에 담긴 내용이 아니다. 우리는 행복한 생각을 추구하는 것과 인조적인 낙천주의에 중독되어 있다. 그 모두가 달콤한 거짓말인데도 말이다. 실제 우리의 삶은 기다림과 인내로 가득 차 있다.인내, 오래 참음, 견딤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토록 어려운가? 그것은 그러한 것들이 환란을 통해서만 채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라고 한 것이다.새로운 날을 시작할 때, 일반적으로 당신이 하나님에게 요청하는 것의 목록 가운데 환난이라는 목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난을 주신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성숙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하나님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이 우리의 목표라면 환난은 우리에게 견디고 버티는 것을 가르쳐 준다. 견딜 때 우리 안에서 인격이 개발된다. 그리고 연단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소망이다. 여기서의 소망은 삶에 대한 견고하고도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전망을 말한다. 오늘의 세상이 만들어 내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전쟁에서 하나님이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미소 지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신념을 말한다. 내일 시련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억지로 생각하지는 마라. 당신이 그것을 기대하든 기대하지 않든 당신 주위의 상황 가운데로 환난은 찾아온다. 어떤 자물쇠를 사용하든 환난은 노크도 없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것은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이 당신을 성장시키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야보고와 바울이 우리에게 인내의 특성을 받아들이라고, 어려운 시기일수록 우리 내면에서 그것을 추구하라고, 그로 인해 우리가 영감을 얻도록 오히려 시련을 의지하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이다.
Read More
주님이 보여 주신 관대한 나눔 [제515호]
2019/04/16
74
주님이 보여 주신 관대한 나눔 사람이 재정적인 안정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나누는 일에 점점 인색해진다. 자신의 자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자신이 관리할 돈은 그만큼 줄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눌 때 자유는 더 커진다. 나눔이야말로 자신의 미래가 재물이나 은행이 아닌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눔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의지하는 모습이며 그러한 마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영국 선교사였던 에이미 카마이클은 “당신은 사랑 없이 나눌 수 있지만 나누지 않으며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없이, 사랑을 담지 않고 어떠한 의무감에서 형식적인 나눔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단지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눔과 섬김을 향한 우리의 동기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마지못해서 주는, 기꺼이 희생하며 나누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나눔을 하나님의 복을 확실하게 만드는 보증수표이거나 우리가 성취하지 못했던 소원에 대한 부담스러운 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눔이 분명 우리에게 비용을 치르도록 할지라도 나눔은 우리가 치루는 비용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나누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나누기를 원하신다. 나눔의 원리는 주님에게서 배울 수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시며 다른 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던 주님에게서 분명하게 발견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다. 이 모습 속에 나눔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담겨 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나누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주님은 그 일을 억지로 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자신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는 위대한 나눔의 고통을 친히 감당하셨다(히 12:2). 나눔은 대가를 치루지만 그것에는 분명 기쁨이 있다. 예수님은 기쁨으로 나눈다는 것의 완벽한 예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우리는 주님이 보여 주시는 본을 통해 적어도 나눔에 대하여 배울 수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 첫 번째,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면 우리 또한 그분을 본받아 나누어야 한다. 우리의 관대함은 그분이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며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기뻐하며 주어야 할 것이다.두 번째, 나눔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복을 망설이면서 부어 주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처럼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을 위해 하나님의 팔을 비틀 필요가 없다. 완벽한 타이밍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때에 즐거워하시며 자신의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그분은 그분의 선하심 속에서 기뻐하신다. 우리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억지로나 인색함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과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망설임 없이 나누어야 한다. 세 번째, 사람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서게 될 날을 기다리며 관대한 나눔을 실천할 때 그 대상은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관대함이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우리의 가장 큰 자산이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도 우리를 소중히 여기셨기에 자신을 관대하게 내어 주셨다. 우리는 소중히 여기는 것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치룰 수 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에 나누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진정한 나눔은 강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 그리고 그분의 목적을 향한 사랑이 동기이다. 그것이 우리가 섬기는 왕의 성품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고귀한 관대함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베푸셨고 우리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베푼다. 심고 거둠의 원리는 사랑과 기쁨이 그 근원일 때 가장 순수하고 최상의 열매를 맺는다. 당신이 무엇을 나누든 기쁘게 나누라. 당신이 어떻게 섬기든 기뻐하며 하라. 다른 것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지 말고 당신에게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신 분을 본받아 하나님에게 초점을 두고, 나눔을 망설이지 않으며,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관대한 나눔을 실천하라.
Read More
믿음의 양을 측정하지 마라 [제514호]
2019/04/09
115
믿음의 양을 측정하지 마라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시작점이 다를 수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는 각 사람의 상황과 환경 속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작점이 다양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지점과 이를 향한 과정은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 이것을 놓치게 될 경우 신앙이 자기 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더 나은 삶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인양 착각하며 신앙의 연수만을 쌓아갈 뿐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이루어 가지 못한다. 단순히 연수만 쌓아 가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갈등만 늘어가고 그 속에서 자신의 믿음의 정도를 자책하곤 한다. 신앙은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중심적인 미성숙한 신앙은 믿음의 양을 측정하려고만 한다.유진 피터슨은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양을 측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의 교훈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의 믿음의 양을 측정하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을 향한 조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래에 소개되는 피터슨의 조언을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한다. 신앙을 우리의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양으로 인식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다. 신앙은 ‘반응’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에게 반응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향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다. 우리의 믿음을 늘려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우리의 방법으로 신앙을 증가시키려는 시도는 위험하다.예수님은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고 하여도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7:2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활동하실 때 우리가 지극히 작은 반응이라도 보인다면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우리가 반응하는 신앙의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은 겨자씨처럼 작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것을 사용하셔서 산을 능히 옮기신다. 신앙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즉, 그분이 우리를 온전하고 성숙한 상태로 끌어 올리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삶,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균형과 조화를 방해하는 큰 장애들 중의 하나는 도덕주의이다. 도덕주의는 자신의 방법과 노력으로 성숙함에 이르려는 시도이다. 도덕주의자들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고 자신을 채찍질하여 행동을 개선하면 자신이 실제로 좋아질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조각난 삶을 통합하여 영적인 온전함을 하나님 앞에서 이룰 수 없고 하나님만 이것을 하실 수 있다.성숙한 신앙인은 초연한 태도를 배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영적 수준을 판단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신앙을 자기의 힘으로 이끌고 나가려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어두운 밤이 찾아와도, 당황스러운 일에 처해도,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어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을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잊고 영적 생활의 책임을 스스로 지려고 한다면 불안한 마음 때문에 표적을 구할 것이며 또한 내게 필요한 만큼의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초조하게 자신의 신앙의 양을 측정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확신한다면 도리어 편안히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신앙의 양을 재지마라신앙을 측정하거나 신앙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신앙이 아닌 감정을 논하는 것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신앙을 감정으로 착각하면 우리는 신앙의 양을 측정한다고 하면서 실상 감정의 양을 측정하게 된다. 신앙은 감정을 넘어선다. 감정으로 신앙을 측정하면 위험하다. 신앙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관계가 있지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을 재기 시작하면 자기의 관점에서 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쏟고 주의를 기울이면 그분이 하시는 일이 더 많이 눈에 보일 것이다. 신앙이 성숙하며 성장한다는 것은 믿음의 양을 측정하여 그 규모를 따지는 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더 많이 보이고 그분을 향한 신뢰가 든든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Read More
  
 
1 2 3 4 5  다음 5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