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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는 것을 배우라 [제505호]


관리자   조회 : 252, 등록일 : 2019/01/29 14:54

 


가만히 있는 것을 배우라


어느 대학 교수가 복잡한 기차역에서 유명한 중국 연사를 만났다. 교수는 손님을 맞이하며 말했다. “얼른 뛰어서 다음 열차를 타면 3분을 아낄 수 있어요.” 그 말을 듣고 상대방이 조용히 질문했다. “3분을 아껴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교수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일을 그의 교육 철학을 세우는 데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어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된 나는 날마다 속도를 늦추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보내라는 내용을 전했다. 설교를 마치자 예배 인도자가 앞으로 나오더니 “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1절과 4절을 부릅시다”라고 말했다. 4절 전체를 다 부르지도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절약한 ‘몇 분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도 없었다. 찬송가 한 절 한 절이 내 설교의 주제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실망스러웠다.

가만히 있기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하나님은 우리가 평온한 마음을 기르기를 바라신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1:28~30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와서 쉼을 얻으라고 초청하신다. 예수님이 주실 구원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그분은 휴식, 즉 바울이 말한 ‘하나님과의 화평’(롬 5:1)을 주신다. 우리가 날마다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순복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고 깊은 평안, 즉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을 얻을 것이다. 물론 살다 보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힘겨운 시기를 지나게 된다. 그럴 때는 마땅히 섬겨야 하는데도 섬길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안이 화평으로 가득하다면 일을 끝마칠 힘이 생겨난다. 감정에 이끌리는 삶은 신뢰할 수도 없고 믿음으로 사는 삶을 파괴한다. 마음이 심란하며 의지가 마비되어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는”(시 100:2) 것이 어려운 법이다. 


가만히 앉기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인간이 방안에 조용히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했다. 과부인 룻이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에게 나아간 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매우 귀중한 조언을 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룻 3:18).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뜻을 이루시는 동안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신뢰해야 한다. 룻과 나오미는 로마서 8:28을 읽은 적이 없었겠지만 그 내용을 믿고 실천했다. 우리가 명령 내리는 행동을 멈추고 하나님의 길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우리의 선과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실 것이다. 
성경에서 반복되는 질문 중 하나는 ‘언제까지입니까?’이다. 다윗은 시편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1~2)라고 기도했다. 말씀에도 기록되었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언제나 일하신다. 다만 바쁘게 서두르시지는 않는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기까지 25년,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기까지 80년,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까지 30년을 기다리셨다. 일할 때가 있고 기다릴 때가 있다.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


가만히 서 있기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모세는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된 날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런 말로 격려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고 더 도망치거나 숨을 데가 없었다. 진멸이 자명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에 계셨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모세는 이렇게 외쳤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이스라엘 민족은 ‘가만히 있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신뢰해야 했다.


가만히 누워 있기
건강한 수면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은 괴로운 하루로 이어진다. 다윗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 3:5). 이어지는 시편에서는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4, 8)라고 했다. 시편 127:2에서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했다.
가만히 있고, 가만히 앉고, 가만히 서 있는 것만 배워서는 충분하지 않다. 가만히 눕는 것을 배우고 분주한 하루 끝에 치유를 주는 하늘의 안식을 경험해야 한다. 신경 쓰이는 일 때문에 밤새도록 뒤척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놓치게 된다.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잠들려고 해도 안 된다.




위의 글은 도서출판 디모데의 신간 워렌 위어스비의 『성경의 패러독스, 그 특별한 지혜』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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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보여 주신 관대한 나눔 [제515호]
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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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보여 주신 관대한 나눔 사람이 재정적인 안정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나누는 일에 점점 인색해진다. 자신의 자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자신이 관리할 돈은 그만큼 줄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눌 때 자유는 더 커진다. 나눔이야말로 자신의 미래가 재물이나 은행이 아닌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눔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의지하는 모습이며 그러한 마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영국 선교사였던 에이미 카마이클은 “당신은 사랑 없이 나눌 수 있지만 나누지 않으며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없이, 사랑을 담지 않고 어떠한 의무감에서 형식적인 나눔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단지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눔과 섬김을 향한 우리의 동기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마지못해서 주는, 기꺼이 희생하며 나누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나눔을 하나님의 복을 확실하게 만드는 보증수표이거나 우리가 성취하지 못했던 소원에 대한 부담스러운 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눔이 분명 우리에게 비용을 치르도록 할지라도 나눔은 우리가 치루는 비용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나누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나누기를 원하신다. 나눔의 원리는 주님에게서 배울 수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시며 다른 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던 주님에게서 분명하게 발견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다. 이 모습 속에 나눔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담겨 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나누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주님은 그 일을 억지로 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자신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는 위대한 나눔의 고통을 친히 감당하셨다(히 12:2). 나눔은 대가를 치루지만 그것에는 분명 기쁨이 있다. 예수님은 기쁨으로 나눈다는 것의 완벽한 예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우리는 주님이 보여 주시는 본을 통해 적어도 나눔에 대하여 배울 수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 첫 번째,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면 우리 또한 그분을 본받아 나누어야 한다. 우리의 관대함은 그분이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며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기뻐하며 주어야 할 것이다.두 번째, 나눔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복을 망설이면서 부어 주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처럼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을 위해 하나님의 팔을 비틀 필요가 없다. 완벽한 타이밍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때에 즐거워하시며 자신의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그분은 그분의 선하심 속에서 기뻐하신다. 우리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억지로나 인색함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과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망설임 없이 나누어야 한다. 세 번째, 사람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서게 될 날을 기다리며 관대한 나눔을 실천할 때 그 대상은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관대함이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우리의 가장 큰 자산이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도 우리를 소중히 여기셨기에 자신을 관대하게 내어 주셨다. 우리는 소중히 여기는 것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치룰 수 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에 나누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진정한 나눔은 강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 그리고 그분의 목적을 향한 사랑이 동기이다. 그것이 우리가 섬기는 왕의 성품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고귀한 관대함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베푸셨고 우리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베푼다. 심고 거둠의 원리는 사랑과 기쁨이 그 근원일 때 가장 순수하고 최상의 열매를 맺는다. 당신이 무엇을 나누든 기쁘게 나누라. 당신이 어떻게 섬기든 기뻐하며 하라. 다른 것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지 말고 당신에게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신 분을 본받아 하나님에게 초점을 두고, 나눔을 망설이지 않으며,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관대한 나눔을 실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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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양을 측정하지 마라 [제514호]
201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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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양을 측정하지 마라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시작점이 다를 수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는 각 사람의 상황과 환경 속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작점이 다양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지점과 이를 향한 과정은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 이것을 놓치게 될 경우 신앙이 자기 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더 나은 삶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인양 착각하며 신앙의 연수만을 쌓아갈 뿐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이루어 가지 못한다. 단순히 연수만 쌓아 가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갈등만 늘어가고 그 속에서 자신의 믿음의 정도를 자책하곤 한다. 신앙은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중심적인 미성숙한 신앙은 믿음의 양을 측정하려고만 한다.유진 피터슨은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양을 측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의 교훈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의 믿음의 양을 측정하며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을 향한 조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래에 소개되는 피터슨의 조언을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한다. 신앙을 우리의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양으로 인식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다. 신앙은 ‘반응’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에게 반응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향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다. 우리의 믿음을 늘려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우리의 방법으로 신앙을 증가시키려는 시도는 위험하다.예수님은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고 하여도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7:2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활동하실 때 우리가 지극히 작은 반응이라도 보인다면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우리가 반응하는 신앙의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은 겨자씨처럼 작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것을 사용하셔서 산을 능히 옮기신다. 신앙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즉, 그분이 우리를 온전하고 성숙한 상태로 끌어 올리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삶,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균형과 조화를 방해하는 큰 장애들 중의 하나는 도덕주의이다. 도덕주의는 자신의 방법과 노력으로 성숙함에 이르려는 시도이다. 도덕주의자들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고 자신을 채찍질하여 행동을 개선하면 자신이 실제로 좋아질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조각난 삶을 통합하여 영적인 온전함을 하나님 앞에서 이룰 수 없고 하나님만 이것을 하실 수 있다.성숙한 신앙인은 초연한 태도를 배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영적 수준을 판단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신앙을 자기의 힘으로 이끌고 나가려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어두운 밤이 찾아와도, 당황스러운 일에 처해도,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어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을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잊고 영적 생활의 책임을 스스로 지려고 한다면 불안한 마음 때문에 표적을 구할 것이며 또한 내게 필요한 만큼의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초조하게 자신의 신앙의 양을 측정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확신한다면 도리어 편안히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신앙의 양을 재지마라신앙을 측정하거나 신앙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신앙이 아닌 감정을 논하는 것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신앙을 감정으로 착각하면 우리는 신앙의 양을 측정한다고 하면서 실상 감정의 양을 측정하게 된다. 신앙은 감정을 넘어선다. 감정으로 신앙을 측정하면 위험하다. 신앙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관계가 있지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을 재기 시작하면 자기의 관점에서 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쏟고 주의를 기울이면 그분이 하시는 일이 더 많이 눈에 보일 것이다. 신앙이 성숙하며 성장한다는 것은 믿음의 양을 측정하여 그 규모를 따지는 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더 많이 보이고 그분을 향한 신뢰가 든든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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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기 [제513호]
20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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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기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전인격, 즉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것과 관련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30).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될수록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그분을 더 사랑할수록 우리를 부르셔서 하게 하신 그 일에 대해 더욱 자원하는 마음으로 의지하고 순종하게 된다.당신을 더 분명히 알기 원합니다.에베소서 1장과 3장, 빌립보서 1장, 골로새서 1장의 위대한 기도는 독자들을 향한 바울의 깊은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기를 원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 있던 지식은 명제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는 주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모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했다(엡 1:17~18, 3:19)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조직적인 모델로 이해하려고 지나치게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무릎 꿇고 사랑을 드려야 할 인격체가 아닌 토론하거나 글을 쓰는 지적인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에 그들의 직업적인 위험이 있다. 이런 깊은 의미에서 볼 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비서인 피페르노의 레지날드(Reginald of Piperno)로부터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의 집필을 왜 중단하느냐는 압력을 받을 때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쓴 모든 것은 내가 지금 깨달은 것에 비하여 지푸라기에 불과하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비전을 통해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다고 한다. “토마스, 너는 지금까지 나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글을 썼다. 네가 받을 상급이 무엇이 되면 좋겠느냐?” 그때 그는 “다른 어떤 상급보다 주님 당신을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위대한 정신적, 육제적, 사회적 성취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한 번 보는 것에 비하면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빌 3:7~10). 주님은 가장 고상한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로 하여금 잠깐 동안의 즐거움과 소망의 꼬투리들로 배를 채우게 하기보다는 날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도록 하신다.그리스도를 더 분명히 알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핵심적인 두 가지 요소는 시간과 순종이다. 관계를 맺어 나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을 따로 선택하여 독거, 침묵, 기도, 성경 읽기를 하지 않으면 결코 주님과 친밀해질 수 없다. 순종은 이러한 의사소통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게 될 바로 그분의 약속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더 감동을 받을수록 우리는 사람이나 권력 그리고 일들로부터 덜 감동을 받는다.더 깊이 사랑하기를 원합니다.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단지 마음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하여 그분이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더 많이 이해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사랑과 감사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시간과 공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만드신 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고 무한한 희생을 치르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인생을 통해 그렇게 갈망하는 무조건적인 안전을 품기 시작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발적이고 제한이나 이유가 없고 과분하다. 우리가 사랑스럽거나 아름답거나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다. 죄성 때문에 사랑스럽지 못하고, 추악하고, 바보스러워서 사랑하신다. 사랑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사랑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 안으로 용납과 안전을 확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기쁨을 대적하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기쁨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은 이러한 사랑에 반응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서 그분과 함께 사랑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 더 가까이 따르기를 원합니다.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면서 우리는 그분의 성품과 약속과 교훈을 신뢰하는 것을 배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실 때는 그분이 우리의 흥을 깨는 광대무변한 존재라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선의 관심이 아님을 아시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것을 하라고 하실 때는 그것이 언제나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열심히 따르기로 헌신하겠는가? 그렇다면 그분이 시키시는 일을 해야만 한다. 때때로 그러한 순종은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험이다.성령이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에 순종하는 것은 반문화적이다. 철저하게 순종한다면 때때로 인간의 논리에 정면으로 반박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신뢰와 의존의 정도를 시험하고 드러내는 기간이다. 영적인 삶에서 우리의 위대한 사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기를 결심하는 것,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놓으신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위의 글은 케네스 보아의 『기독교 영성, 그 열두 스펙트럼』(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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