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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청지기[제510호]


관리자   조회 : 116, 등록일 : 2019/03/12 14:05

 

겸손한 청지기

하나님의 충성된 청지기가 부딪히는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신의 헌신과 성취에 대한 교만이다.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자신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하면서 로마서 12:3에 바로 그 유혹을 물리치라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자화자찬은 오직 하나님만 치유하실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아주 당연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간의 교만을 고치는 하나님의 치료책은 우리가 회심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순간부터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의 거짓되고 교만한 자아상의 깊은 뿌리는 우리가 부활하여 영화롭게 될 때에만 이 몸에서 완전히 뿌리 뽑힐 것이다. 그때까지 교만은 우리가 매순간 싸우며 살아야 할 대상이다. 그것만이 우리 자신에 대한 바른 시각이라고 바울은 로마서 12:3에서 말한다.
누가복음 17장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늘 자신을 “무익한 종”, “겸손한 청지기”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그림을 보여 준다. 누가복음 17:10을 통해 우리의 삶에 주는 함축된 의미를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선행으로 하나님에게 공로를 쌓을 수 없다.
천주교는 일부 사람들이 청빈과 독신의 서원을 하고 독실한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여분의 선행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공로를 벌 수 있고, 그 공로는 하나님에게 본분을 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천주교에서는 그것을 ‘공덕의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 17:10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요구 이상의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 무익한 종이다. 이익이란 종이 자기에게 요구되는 수준을 넘어설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자신의 주석에서 “우리는 아무리 잘 섬겨도 하나님에게 조금도 내세울 수 없다”라고 했다. 
더욱이 우리는 회심한 후에도 모두 계속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받아 주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공로가 무한한 행위인 그리스도의 죄 없는 삶과 대속의 죽음이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섬김에는 교만의 여지가 없다. 
누가복음 17:10에 함축된 두 번째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섬김에는 교만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만족에 빠져 스스로 흡족해하다가 한 나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끊어짐을 당했다(마 21:43). 그러나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화가 닥칠 수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0b~21).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도 안일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고전 9:27).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섬김이 지금껏 아무리 성공적이었더라도 상관없다. 우리가 이루는 모든 일은 오직 그분의 은혜와 능력 주심으로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그분의 일을 할 수 있는 자원과 기술과 힘을 주시고 그에 뒤따르는 성공까지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일꾼으로 고용되었을 뿐이다. 하나님을 섬긴 햇수가 아주 오래되었더라도 아침마다 일어나서 “명령 받은 것을 다”(눅 17:10) 행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하나님의 종의 사전에 자기만족이나 안일은 없다. 

3. 우리는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임을 진심으로 느껴야 한다.
누가복음 17:10에 함축된 세 번째 함축된 의미는 자신의 섬김이 하나님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렇게 느낀다면 그 느낌은 좋은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자존감 높이기에 경도된 사회에서는 특히 더하다. 훌륭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변변찮은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변변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칭찬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칭찬이나 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와 갈보리의 모본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결코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 돈, 에너지, 시간, 달란트, 손대접, 전도 부분에서 우리가 아무리 많이 드렸다고 해도 하나님은 마땅히 그보다 더 좋은 섬김을 더 많이 받으셔야 할 분이다. 우리 자신이 피조물로서 변변찮은 존재이며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무가치한 존재임을 늘 의식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임을 진심으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안에 행하시는 일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겸손은 나약함, 자신감 부족, 초라한 자존감 따위의 표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자신과 자신의 성취에 대해 자만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삶과 재능과 성공이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 덕분이라는 것을 고의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은 그분이 자신의 종들에게서 간절히 보기 원하시는 의복이자 장신구이다. 이것이 우리가 겸손한 청지기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위의 글은 브라이언 러셀의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라』 (도서출판 디모데) 에서 발췌하여 부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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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을 실행하라 [제511호]
2019/03/19
87
실행을 실행하라사람들은 보통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잘 준비된 계획이 성공적인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문제와 장애물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두려움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주님께 맡기며 행동을 통해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의 종착점을 결정짓는 것은 출발점이 아니라 출발 여부이다. 그렇다면 실행은 왜 중요한가?첫째, 실행이 목적지를 향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출발을 해야 한다.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은 출발도 하지 않고, 시작해 보지도 않고 먼저 실패를 생각한다. 결과를 만들어 내며 성공하는 사람은 시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계속 나아가는 사람이다.둘째, 실행이 두려움을 차단하기 때문이다.하지 않아도, 시작을 해도 두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두려움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 두려움은 서서히 사람들의 내면을 잠식해 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두려움에 잠식되어 가는 것보다 시작함으로써 두려움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낫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 물에 발을 내디뎠을 때 기적을 경험했다. 실행하면 막연하기만 했던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면 그 두려움은 더욱 커져간다.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경험한다. 그것은 인생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모든 세대가 두려움을 겪는다. 지난 375년 동안 인용된 문구를 보면 공통된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주후 1623년 성 프란시스 베이컨은 “두려움 자체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200년 후 웰링턴 공작은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움이다”라고 했으며 제32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라고 말했다. 두려움이 사람들의 잠재력을 빼앗고 인생의 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을 방해하지만 실행은 오히려 그러한 두려움을 물리쳐 준다.셋째, 실행은 기회(機會)의 문을 열어 주고,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벤자민 프랭클린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기회를 활용하라”라고 말했던 것이다.실행이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실행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첫째, 실행이 부족한 사람은 게으름의 결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서리가 내린 추운 날에, 개미가 여름 동안 열심히 저축해 놓은 보리를 말리려고 조금 끌어내고 있었다. 굶주림에 죽을 지경이 다 된 여치가 목숨을 이어갈 수 있게끔 아무쪼록 그 보리를 한 입만이라도 얻을 수 없겠느냐고 개미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개미가 게으름뱅이 여치에게 물었다.“지난 여름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요?”“나도 게으름만 피우고 있었던 건 아니어요. 여름 동안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그러자 개미는 웃으며 곡식 창고를 꼭꼭 잠그고는 말했다.“여름 내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면 당신은 겨우내 춤을 출 수 있을 테지요.”- 이솝우화 ‘개미와 여치’ 중에서 둘째, 다른 사람이 동기부여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아랍 격언에 “나에게 불을 붙여 주면 당신에게 빛을 드리리다”라는 말이 있다. 동기부여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스스로가 일할 의욕에 불타는 것이다. 자신이 먼저 불붙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빛을 발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누군가 밀어붙여야만 마지못해 시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셋째, 행동하기 전에 완벽한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중국의 속담 중에 “한 걸음 내딛기 전에 너무 고민하는 사람은 평생을 한 발로 서 있게 된다”라는 말이 있다. 언제 이끌 것인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만큼 중요하다.넷째, 지금이 아닌 내일과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성경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언 27:1)라고 말한다. 내일에 대한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늘 실행하지 않으면 오늘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이 내일도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어느 가구 상점에 걸린 빛이 바랜 문구가 있다. “내일 모든 상품을 왕창 세일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바보가 최후에 할 일을 한 번에 한다고 한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절대로 뒤로 미루지 마라. 실행을 미루지 마라. 실행을 실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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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청지기[제510호]
2019/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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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청지기하나님의 충성된 청지기가 부딪히는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신의 헌신과 성취에 대한 교만이다.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자신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하면서 로마서 12:3에 바로 그 유혹을 물리치라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자화자찬은 오직 하나님만 치유하실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아주 당연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간의 교만을 고치는 하나님의 치료책은 우리가 회심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순간부터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의 거짓되고 교만한 자아상의 깊은 뿌리는 우리가 부활하여 영화롭게 될 때에만 이 몸에서 완전히 뿌리 뽑힐 것이다. 그때까지 교만은 우리가 매순간 싸우며 살아야 할 대상이다. 그것만이 우리 자신에 대한 바른 시각이라고 바울은 로마서 12:3에서 말한다.누가복음 17장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늘 자신을 “무익한 종”, “겸손한 청지기”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그림을 보여 준다. 누가복음 17:10을 통해 우리의 삶에 주는 함축된 의미를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1. 우리는 선행으로 하나님에게 공로를 쌓을 수 없다.천주교는 일부 사람들이 청빈과 독신의 서원을 하고 독실한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여분의 선행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공로를 벌 수 있고, 그 공로는 하나님에게 본분을 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천주교에서는 그것을 ‘공덕의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 17:10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요구 이상의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 무익한 종이다. 이익이란 종이 자기에게 요구되는 수준을 넘어설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자신의 주석에서 “우리는 아무리 잘 섬겨도 하나님에게 조금도 내세울 수 없다”라고 했다. 더욱이 우리는 회심한 후에도 모두 계속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받아 주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공로가 무한한 행위인 그리스도의 죄 없는 삶과 대속의 죽음이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2. 그리스도의 섬김에는 교만의 여지가 없다. 누가복음 17:10에 함축된 두 번째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섬김에는 교만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만족에 빠져 스스로 흡족해하다가 한 나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끊어짐을 당했다(마 21:43). 그러나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화가 닥칠 수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0b~21).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도 안일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고전 9:27).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섬김이 지금껏 아무리 성공적이었더라도 상관없다. 우리가 이루는 모든 일은 오직 그분의 은혜와 능력 주심으로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그분의 일을 할 수 있는 자원과 기술과 힘을 주시고 그에 뒤따르는 성공까지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일꾼으로 고용되었을 뿐이다. 하나님을 섬긴 햇수가 아주 오래되었더라도 아침마다 일어나서 “명령 받은 것을 다”(눅 17:10) 행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하나님의 종의 사전에 자기만족이나 안일은 없다. 3. 우리는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임을 진심으로 느껴야 한다.누가복음 17:10에 함축된 세 번째 함축된 의미는 자신의 섬김이 하나님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렇게 느낀다면 그 느낌은 좋은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자존감 높이기에 경도된 사회에서는 특히 더하다. 훌륭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변변찮은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변변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칭찬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칭찬이나 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와 갈보리의 모본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결코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 돈, 에너지, 시간, 달란트, 손대접, 전도 부분에서 우리가 아무리 많이 드렸다고 해도 하나님은 마땅히 그보다 더 좋은 섬김을 더 많이 받으셔야 할 분이다. 우리 자신이 피조물로서 변변찮은 존재이며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무가치한 존재임을 늘 의식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임을 진심으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안에 행하시는 일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겸손은 나약함, 자신감 부족, 초라한 자존감 따위의 표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자신과 자신의 성취에 대해 자만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삶과 재능과 성공이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 덕분이라는 것을 고의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은 그분이 자신의 종들에게서 간절히 보기 원하시는 의복이자 장신구이다. 이것이 우리가 겸손한 청지기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위의 글은 브라이언 러셀의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라』 (도서출판 디모데) 에서 발췌하여 부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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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훈련의 목표 [제509호]
2019/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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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훈련의 목표  우리는 영적 훈련을 그 자체가 위대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영적 훈련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더 좋은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는 법을 배우기 위한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모든 신자는 예수님의 친구가 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모두 교제, 다시 말해서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기를 바라며 그런 과정을 영적 훈련이 돕기를 간절히 원한다.  영적 훈련에서 우리의 진보를 일일이 기록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나는 이 일을 세 가지 했으니 이제는 4번으로 나갈 차례야.” 우리는 이러한 일을 너무 여유 없이 제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훈련을 율법주의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마음과 영을 잘라 낸다.훈련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훈련은 어떤 가혹한 의무가 아니다. 우리는 이를 갈면서 하나님을 좇아간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분의 친구가 되는, 그분과 동행하는 기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생활을 즐기기를 바라신다. 훈련은 영적 생활이 가능하도록 도움을 준다. 훈련은 또한 영적 생활이 큰 기쁨이 되도록 만든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 앞에서 큰 복을 경험한다면 그 경험을 되풀이하기 위하여 온갖 일을 기꺼이 감내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이 영광이요, 이것이 천국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훈련을 계속 받는 것이 계속 영광을 맛보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만일 내가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마다 어떤 놀라운 경험을 해야만 한다면 큰 곤경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고 그분의 현존 앞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아무런 경험을 느낄 수 없는 날이 계속되어도 상관없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항상 열매를 볼 수 없어도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아노를 치기를 바라는 사람은 온갖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지나야만 하지만 그 결과는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일을 해 내며 그래서 우리는 줄곧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기쁨이 모든 과정의 결과로 올 것임을 안다.  훈련에는 힘든 과업도 포함된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기쁨으로 활기 있게 될 필요가 있다. 느헤미야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라고 말했다. 기쁨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감정은 훈련받아야만 하며 일단 조절 가능해지면 그것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필요가 있다. 감정은 우리를 활력 있게 하며 우리의 일에 명랑한 느낌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훈련의 목적은 우리 안에 습관의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훈련이 우리의 삶 가운데 점점 더 역사할수록 많은 행동이 내게 거의 제2의 천성처럼 되어 간다. 그 일은 습관이 되며 그래서 더 이상 우리가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된다. 어떤 점에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된다(마 6:3).  우리는 훈련이 우리의 내적인 습관 구조에 크게 작용함으로써 자발적으로 하는 일마저 정상적이고 의롭게 될 정도가 되기를 바란다. 하기 어려운 것이 나쁜 것, 잘못된 일이 된다. 또 성령 안에서의 의, 평화, 기쁨이 반사 행동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훈련된 행위에 대해 단지 일일이 점수를 매기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지 훈련을 통해 영적 필요성을 바라보며 그것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애쓰지 않고 호흡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훈련에 의한 습관으로 적절한 것을 하도록 한다. 우리는 깃털처럼 가볍고 물처럼 유연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주도권에 대해 응답하면서 말이다.  모든 성도가 영적 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기기를 소원한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은 머리끝부터 끝까지 할렐루야가 되어야 만 한다”라고 말했다. 훈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법을, 즉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표현대로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법을 가르친다. 그것이 영적 훈련의 요점의 전부이다. * 위의 글은 리차드 포스터의 칼럼 중 일부를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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