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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제519호]


관리자   조회 : 145, 등록일 : 2019/05/14 15:19

 


자녀와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소통이 잘 못하는 일곱 가지 부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총사령관이다. 그는 감독하는 일을 한다. 자녀가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하면 그는 감독하는 태도로 문제를 지적해 내거나 명령을 내린다. 도덕론자도 있다. 그는 늘‘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또는 ‘그것을 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자녀들이 그의 가치관을 이해한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알은체하는 사람은나이를먹을수록자연히아는것이많아진다고믿는다. 말을 할 때마다 ‘내가 너만 했을 때는’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심판자는심지어말하는사람의말이채끝나기도전에이미판단을내려버린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었어’ 또는 ‘만일 네가 지혜로웠다면, 이렇게 했을 텐데’라고 말한다. 비평가가 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그는 모든 논리 중에서 흠을, 모든 일에서 실수를 그리고 모든 제안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기에 바쁘다. 심리학자도 있는데, 늘 자녀를 분석한다. ‘왜 그렇게 했는지 말해 봐’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이야기하거라.’ 위로자는 너무 빨리 동정을 해 버리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까지 파고들 수가 없다. 늘 동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소통이 안 되는 데는 반드시 그 원인이 존재한다. 원인을 잘 파악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으로 나아간다면 대부분의 가정 안에서의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의사소통 자문협회(Communications Consultants Associated)의 회장인 스테일(Lyman K. Steil) 교수는 의사소통에 네 단계의 과정이 있음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 네 단계는 한 개의 삼각형과 같으며 각 단계는 그 아래 단계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단계에서 얼마나 의사소통을 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낮은 단계에서 얼마나 의사소통을 잘 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일상적인 의사소통(phatic communication)이다. 간단히 말해서 ‘잡담’이다. 일상이라는 말은 ‘사람들과 함께 연결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잡담의 역할이다. 우리는 자녀들과 더불어 이러한 것, 즉 학교와 친구, 희망사항 그리고 장래 꿈에 대한 자연스런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한다. 잡담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자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기초가 된다.

두 번째 단계는 카타르시스적인 의사소통(cathartic communication)이다. 이 단계에서 억눌린 감정들이 풀어지게 된다. 이는 자녀들의 성장 과정에 따르는 좌절감을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가 된다. 카타르시스적 의사소통은 자녀의 감정과 욕구불만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데 이는 부모가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 준다고 느낄 때 가능하다. 하지만 이 단계의 의사소통은 첫 번째 단계인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확고한 기초가 다져져 있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세 번째 단계는 정보적 의사소통(informative communication)이다. 아이디어나 정보 혹은 자료들을 나누어주는 단계이다. 많은 부모가 이 단계의 의사소통에 너무 관심을 쏟는 나머지 우선적으로 사소한 대화와 카타르시스 단계의 의사소통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네 번째 단계는 설득적 의사소통(persuasive communication)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노력하고 우리의 관점대로 사물을 보게 하려고 힘쓴다. 부모들은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이 설득적 의사소통 단계에 쏟는다. 부모가 자녀들이 옳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성경의 명령이기도 하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잠언 22:6)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그러나 만일 부모가 앞의 세 단계의 의사소통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지 못한다면 설득적 의사소통이 잘 될 수가 없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영향을 주며 그들을 설득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의 말을 더 잘 들어 주고, 그들이 처해 있는 단계에서 의사소통을 하며, 정보적 단계와 설득적 단계로 옮겨가기 전에 사소한 대화 단계와 카타르시스적인 단계의 의사소통을 충분히 해야 한다. 물론 이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자녀들은 잘 듣지 않는 사람과는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해 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자녀들과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하기를 원하는가? 그들을 반듯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를 소망하는가? 위에서 언급한 의사소통의 네 단계를 삶에 정착시키며 자녀와의 공감을 확장시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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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화된 영혼, 영화된 육화 [제527호]
2019/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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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화된 영혼, 영화된 육화 우리는 늙어갈수록 자신의 참 모습을 현재 시제로 알아야 한다. 그런 지식을 얻으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둘로 나누어진 존재이다. 즉, 우리는 물리적 몸 안에서 그 몸을 통해 살아가는 인격적 자아이다. 몸의 기운과 능력에 의지하여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만 동시에 몸의 제약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일도 많다. 육체는 우리가 해야 할 많은 필수적 행위를 거듭 요구한다.육체는 물리적 기술을 배울 수 있다. 물론 어느 기술이든 그것을 숙달하려면 정신노동도 수반되어야 한다. 예컨대 스포츠를 위한 기술, 수술하는 기술, 차를 운전하고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술 등을 생각해 보라. 이와 비슷하게 영혼도 논리나 연산 같은 정신적 기술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악기 연주처럼 영혼과 육체가 한데 어우러지는 기술도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은 인간을 육화된 영혼이자 영화(靈化)된 육체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당연하고도 통찰력 있는 말이다. 영혼과 육체는 별개이면서도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철두철미하게 서로 맞물려 있다.예수님이 나시기 수세기 전에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육체가 우리의 성장을 제한한다고 보았다. 즉, 몸은 감옥과 무덤 같은 것이고 우리의 참 존재인 영혼은 그 몸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 이후로 많은 사람이 그런 비슷한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이 증대되려면 결국 육체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경에 근거한 우리의 믿음이 다음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셨다. 삼위일체의 제2위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셔서 몸을 통해 사셨다. (2) 예수님이 부활하여 끝없는 삶에 들어가셨는데, 그분의 영화된 이성도 그 영생의 영원한 일부를 이룬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도 몸의 부활로 풍성해질 그날을 고대한다. 그날이 오면 육체도 영혼도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될 것이다. 그 소망대로 우리는 장차 변화된 육체 속에 다시 심겨져 영원히 몸 안에 살 것이다. 재창조된 세계 질서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며 활짝 피어날 것이다. 흠 없이 혁신된 우리의 인격적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없이 깊은 교제를 나누며 온갖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요 구주요 주님이요 친구이다.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재결합은 이 영광스러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물론 그리스도인들도 노화에 들어서면 몸이 짐스럽고 영혼을 제약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구체적 이유는 탈진, 굶주림, 질병, 회복할 수 없는 인체의 구조적 손상, 돌이킬 수 없는 퇴행성 기능 부전 등 다양하다. 몸에 문제만 없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즐기겠는데 몸이 막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혼, 즉 사고하고 느끼고 기억하고 상상하고 소통하는 우리의 자아가 육체와 분리되면 이전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인간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왜 우리를 지으셨는가?인류를 구성하는 모든 인간은 육화된 영혼이자 영화된 육체이다. 즉, 정신적 존재이자 물리적 존재이다. 본래 한 쌍의 남녀로 지음을 받은 인류는 하나님에게서 번식의 사명을 받았다. 하나님이 그분의 기쁨을 위해 질서 있게 창조하신 환경의 관리자로 지음을 받았다. 그 일을 할 때 우리는 기쁨을 얻도록 설계되었다. 인간의 찬송과 감사와 섬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말이다. 그런데 인류의 이야기가 시작된 직후 안타깝게도 죄가 인간의 본성을 더렵혔다. 죄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무시하는 반항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과 회복의 계획을 가동하셨다. 현재 인류는 바로 그 과정을 지나는 중이다. 모든 개개인이 이 회복에 실제로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에 부딪혀 예수를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만 그것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늘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의 삶은 시험적이고 한시적이며 때가 되면 모종의 변화와 이행으로 다른 곳의 더 풍성한 삶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죽음과 거기에 흔히 선행되는 명백한 육체적 노쇠는 본래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창조 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창세기 3장에 나와 있듯이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우리 영혼은 무엇인가?인간의 영혼은 곧 인격의 의식적 자아이다. 나를 나로 아는 그 ‘나’이다. 이것은 타고나는 것이며, 인식과 반응과 교류와 관계의 발원지이다. 인지적 의문과 사고, 인간과 상황과 자원에 대한 탐구, 지난 일에 대한 기억과 그 기억이 불러오는 정체감, 감정을 느끼고 계획을 세우는 일, 창의적 예술 작품의 지각과 실연, 진선미의 실체에 대한 이해, 창의적 대인 관계 이 모두와 그 이상이 모두 영혼의 활동이다. 육신의 삶 곧 신체 활동이 끝나도 영혼의 삶은 계속된다. 현재 우리에게 있는 인격적 자의식은 결코 끝이 없으며 오히려 기쁜 쪽으로든 슬픈 쪽으로든 영원히 강화되고 지속된다. 우리의 몸의 목적은 무엇인가?하나님이 우리에게 몸을 주셔서 몸 안에서 그 몸을 통해 살아가게 하신 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 그분의 관리인인 청지기로서 물질계를 다스리는 데 적합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둘째, 지금 여기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몸은 명백히 경험과 표현과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 위의 글은 J. I. 패커의 『아름다운 노년』(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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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최선 [제526호]
201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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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최선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들과 소통하는 일은 힘이 솟는 일이다. 매일, 혹은 매주 많은 청중 앞에서 설교를 하고, 그 말씀의 원리대로 그들을 이끌어 가는 일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끄는 지도자의 능력으로 다 되는 일도 아니다. 당신이 영적 지도자라면 이미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그저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졌을 것이다. 당신에게 이러한 태도가 있다면 계속해서 그 태도를 유지하라고 격려해 주고 싶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지도자의 책임이자, 리더십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몇 가지 존 맥스웰이 주는 조언은 최선을 다하는 당신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첫째, 누구나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우리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좋아했던 선생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선생님도 있었다. 좋아하는 선생님을 위해서는 항상 최선을 다했고 그 외의 분들에게는 성적을 얻는 데 필요한 정도로만 행동했다. 나중에는 그렇게 일관성 없는 노력은 나의 성공 가능성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망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이런 대책을 발견했다. 모든 사람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항상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행동에도 변화를 일으켰다.둘째, 어떤 일이든지 중요할 수 있다.인생에서 특별한 순간은 대개 우리가 그 순간을 특별하게 대할 때이다. 평범한 날이 평범한 것은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풍부한 경험을 갖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순간순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평범한 대화라도 우리가 지대한 관심을 갖고 들으면 더 좋게 들린다. 비범한 노력을 하면 평범한 관계가 변화된다. 주목할 만하지 않은 사건도 우리가 창의성을 곁들일 때 특별해진다. 모든 것이 최선을 다함으로써 더 중요해질 수 있다.셋째, 당신은 누구에게나 특별해질 수 있다.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절대 시간을 내 주지 않는 사람인가? 필요로 할 때 함께해 줄 것 같지 않은 사람인가? 물론 아니다.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은 당신을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들을 귀하게 대하라.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넷째, 당신의 재능과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라.“나의 가능성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내 잠재력으로 이루는 것은 내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선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하나님, 다른 사람들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 내 인생에서 가진 모든 선물, 재능, 자원, 기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UCLA의 풋볼 코치였던 존 우든의 “매일을 걸작으로 만들라“라는 말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 믿는다. 항상 최선을 다한다면 삶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인생으로 흘러들어 가서 그것들도 넘쳐나게 할 것이다.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내셔널 기자클럽에서 자신이 정치적 배경이 부족해 더 나은 웅변가가 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말하면서 그 분야의 기술이 부족한 것은 늙은 농부가 소를 팔러 갔던 캔자스의 유년시절을 상기시켜 준다고 말했다. 구매자는 농부에게 소의 혈통, 유지방 생산량, 월별 우유 생산량에 대해 물었다. 농부는 말했다. “혈통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유지방 생산량도 모르겠습니다만 착한 소이니까 이유라면 가진 대로 전부 줄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우리가 가진 전부를 주는 것 말이다. 이것이면 항상 충분하다.- 위의 글은 Equip의 설립자인 존 맥스웰의 강의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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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의 현장 [제 525호]
2019/06/25
135
제자도의 현장 유명한 랍비나 철학자에게 제자들이 모여드는 일은 예수님 당시의 그리스 문화에서나 유대 문화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들의 교육 현장은 반드시 교실이나 강당은 아니었다. 스승들은 대부분 이곳저곳 돌아다녔고, 제자들은 정상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스승이 가르침을 따랐다.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신 사역도 그런 것이었다. 그분은 이곳저곳 다니시는 순회 스승이었다. 그분이 가르치시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분의 뒤를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들었다.누가복음 6:1에서 그런 장면을 볼 수 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었고, 가르치시는 그분을 따라 이곳저곳 다녔으며, 길을 가면서 이삭을 잘라먹기도 했다. 사도들에게 제자도의 현장은 일상생활이었다.그것은 오늘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란 거창한 행사나 감동의 수련회, 지속적인 절정의 경험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평범하고 자질구레한 일상 속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아여 하라“(고전 10:31)라고 했다.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영원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삶 전체를 – 가장 자질구레한 부분까지도 –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삶의 일과를 경시하지 마라. 당신은 하루하루를 정해 주시는 우주의 하나님과 깊이 친해지는 장이 날마다의 일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에 주린 자인가?요한복음 6:51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라고 하셨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삶 속에 모셔 들이면 죄인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예수님은 믿음을 구사하는 것을 떡을 먹는 것에 비하셨다. 아무리 떡의 냄새를 맡고 손으로 꼭 쥐어 보고 맛있겠다고 말해도, 막상 먹지 않는 한 아무런 유익이 없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당신 삶 속에 영접하지 않는 한(요 1:12~13) 당신은 그분에게도 아무런 영원한 유익을 받을 수 없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사도 바울은 사역 말기에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주님의 존전에 섰을 때 바울은 틀림없이 이런 위로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주님에게서 그 말씀을 듣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종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 이하의 목표는 주님에게 합당하지 못하다. 그분은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고 필요한 영적 자원을 모두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극진히 섬기고 늘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는 분이시다(벧후 1:3~4).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행함우리는 두 가지 대조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방식은 경험적인 삶이다. 이는 모든 사고와 행동의 기초를 내게 보이거나 경험될 수 있는 것에 두는 삶이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다른 방식은 믿음의 삶이다. 이는 삶의 일차적, 궁극적 기초를 내게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는 것에 두는 삶이다.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라고 말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본 적이 없다. 천국이나 지옥도 볼 수 없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성경 저자들과 대화해 본 적도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은혜와 덕도 보이지 않는다.기독교의 이런 중요한 측면들이 하나도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성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그 믿음대로 살아간다. 우리의 현재 삶과 장래 운명의 기초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있다. 예로부터 하나님을 참으로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그랬다.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우리를 앞서간 사람들은 우리에게 뒤따라갈 발자국을 남겼다. 당신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이 놀라운 신앙 여정에 누군가를 위해 발자국을 남기게 되기를 바란다.  - 위의 글은 존 맥아더의 『주와 함께 길을 나서다』(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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