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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제519호]


관리자   조회 : 87, 등록일 : 2019/05/14 15:19

 


자녀와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소통이 잘 못하는 일곱 가지 부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총사령관이다. 그는 감독하는 일을 한다. 자녀가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하면 그는 감독하는 태도로 문제를 지적해 내거나 명령을 내린다. 도덕론자도 있다. 그는 늘‘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또는 ‘그것을 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자녀들이 그의 가치관을 이해한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알은체하는 사람은나이를먹을수록자연히아는것이많아진다고믿는다. 말을 할 때마다 ‘내가 너만 했을 때는’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심판자는심지어말하는사람의말이채끝나기도전에이미판단을내려버린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었어’ 또는 ‘만일 네가 지혜로웠다면, 이렇게 했을 텐데’라고 말한다. 비평가가 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그는 모든 논리 중에서 흠을, 모든 일에서 실수를 그리고 모든 제안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기에 바쁘다. 심리학자도 있는데, 늘 자녀를 분석한다. ‘왜 그렇게 했는지 말해 봐’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이야기하거라.’ 위로자는 너무 빨리 동정을 해 버리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까지 파고들 수가 없다. 늘 동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소통이 안 되는 데는 반드시 그 원인이 존재한다. 원인을 잘 파악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으로 나아간다면 대부분의 가정 안에서의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의사소통 자문협회(Communications Consultants Associated)의 회장인 스테일(Lyman K. Steil) 교수는 의사소통에 네 단계의 과정이 있음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 네 단계는 한 개의 삼각형과 같으며 각 단계는 그 아래 단계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단계에서 얼마나 의사소통을 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낮은 단계에서 얼마나 의사소통을 잘 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일상적인 의사소통(phatic communication)이다. 간단히 말해서 ‘잡담’이다. 일상이라는 말은 ‘사람들과 함께 연결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잡담의 역할이다. 우리는 자녀들과 더불어 이러한 것, 즉 학교와 친구, 희망사항 그리고 장래 꿈에 대한 자연스런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한다. 잡담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자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기초가 된다.

두 번째 단계는 카타르시스적인 의사소통(cathartic communication)이다. 이 단계에서 억눌린 감정들이 풀어지게 된다. 이는 자녀들의 성장 과정에 따르는 좌절감을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가 된다. 카타르시스적 의사소통은 자녀의 감정과 욕구불만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데 이는 부모가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 준다고 느낄 때 가능하다. 하지만 이 단계의 의사소통은 첫 번째 단계인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확고한 기초가 다져져 있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세 번째 단계는 정보적 의사소통(informative communication)이다. 아이디어나 정보 혹은 자료들을 나누어주는 단계이다. 많은 부모가 이 단계의 의사소통에 너무 관심을 쏟는 나머지 우선적으로 사소한 대화와 카타르시스 단계의 의사소통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네 번째 단계는 설득적 의사소통(persuasive communication)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노력하고 우리의 관점대로 사물을 보게 하려고 힘쓴다. 부모들은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이 설득적 의사소통 단계에 쏟는다. 부모가 자녀들이 옳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성경의 명령이기도 하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잠언 22:6)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그러나 만일 부모가 앞의 세 단계의 의사소통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지 못한다면 설득적 의사소통이 잘 될 수가 없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영향을 주며 그들을 설득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의 말을 더 잘 들어 주고, 그들이 처해 있는 단계에서 의사소통을 하며, 정보적 단계와 설득적 단계로 옮겨가기 전에 사소한 대화 단계와 카타르시스적인 단계의 의사소통을 충분히 해야 한다. 물론 이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자녀들은 잘 듣지 않는 사람과는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해 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자녀들과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하기를 원하는가? 그들을 반듯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를 소망하는가? 위에서 언급한 의사소통의 네 단계를 삶에 정착시키며 자녀와의 공감을 확장시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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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제519호]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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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소통이 잘 못하는 일곱 가지 부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총사령관이다. 그는 감독하는 일을 한다. 자녀가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하면 그는 감독하는 태도로 문제를 지적해 내거나 명령을 내린다. 도덕론자도 있다. 그는 늘‘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또는 ‘그것을 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자녀들이 그의 가치관을 이해한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알은체하는 사람은나이를먹을수록자연히아는것이많아진다고믿는다. 말을 할 때마다 ‘내가 너만 했을 때는’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심판자는심지어말하는사람의말이채끝나기도전에이미판단을내려버린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었어’ 또는 ‘만일 네가 지혜로웠다면, 이렇게 했을 텐데’라고 말한다. 비평가가 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그는 모든 논리 중에서 흠을, 모든 일에서 실수를 그리고 모든 제안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기에 바쁘다. 심리학자도 있는데, 늘 자녀를 분석한다. ‘왜 그렇게 했는지 말해 봐’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이야기하거라.’ 위로자는 너무 빨리 동정을 해 버리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까지 파고들 수가 없다. 늘 동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소통이 안 되는 데는 반드시 그 원인이 존재한다. 원인을 잘 파악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으로 나아간다면 대부분의 가정 안에서의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의사소통 자문협회(Communications Consultants Associated)의 회장인 스테일(Lyman K. Steil) 교수는 의사소통에 네 단계의 과정이 있음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 네 단계는 한 개의 삼각형과 같으며 각 단계는 그 아래 단계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단계에서 얼마나 의사소통을 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낮은 단계에서 얼마나 의사소통을 잘 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일상적인 의사소통(phatic communication)이다. 간단히 말해서 ‘잡담’이다. 일상이라는 말은 ‘사람들과 함께 연결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잡담의 역할이다. 우리는 자녀들과 더불어 이러한 것, 즉 학교와 친구, 희망사항 그리고 장래 꿈에 대한 자연스런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한다. 잡담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자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기초가 된다.두 번째 단계는 카타르시스적인 의사소통(cathartic communication)이다. 이 단계에서 억눌린 감정들이 풀어지게 된다. 이는 자녀들의 성장 과정에 따르는 좌절감을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가 된다. 카타르시스적 의사소통은 자녀의 감정과 욕구불만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데 이는 부모가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 준다고 느낄 때 가능하다. 하지만 이 단계의 의사소통은 첫 번째 단계인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확고한 기초가 다져져 있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세 번째 단계는 정보적 의사소통(informative communication)이다. 아이디어나 정보 혹은 자료들을 나누어주는 단계이다. 많은 부모가 이 단계의 의사소통에 너무 관심을 쏟는 나머지 우선적으로 사소한 대화와 카타르시스 단계의 의사소통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네 번째 단계는 설득적 의사소통(persuasive communication)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노력하고 우리의 관점대로 사물을 보게 하려고 힘쓴다. 부모들은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이 설득적 의사소통 단계에 쏟는다. 부모가 자녀들이 옳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성경의 명령이기도 하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잠언 22:6)“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그러나 만일 부모가 앞의 세 단계의 의사소통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지 못한다면 설득적 의사소통이 잘 될 수가 없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영향을 주며 그들을 설득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의 말을 더 잘 들어 주고, 그들이 처해 있는 단계에서 의사소통을 하며, 정보적 단계와 설득적 단계로 옮겨가기 전에 사소한 대화 단계와 카타르시스적인 단계의 의사소통을 충분히 해야 한다. 물론 이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자녀들은 잘 듣지 않는 사람과는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해 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자녀들과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하기를 원하는가? 그들을 반듯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를 소망하는가? 위에서 언급한 의사소통의 네 단계를 삶에 정착시키며 자녀와의 공감을 확장시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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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모순 [제518호]
2019/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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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모순 전국시대 초(楚)나라에 무기 상인이 있었다. 그는 시장으로 창과 방패를 팔러 나갔다. 상인은 가지고 온 방패를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방패를 보십시오. 아주 견고하여 어떤 창이라도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창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여기 이 창을 보십시오. 이것의 예리함은 천하일품, 어떤 방패라도 단번에 뚫어 버립니다.” 그러자 구경꾼 중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 예리하기 짝이 없는 창으로 그 견고하기 짝이 없는 방패를 찌르면 도대체 어찌 되는 거요?” 상인은 말문이 막혀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다가 서둘러 달아나고 말았다.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명제, 혹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를 모순(矛盾, oxymoron)이라고 한다. ‘믿을 만한 사기꾼’, ‘가난한 부자’, ‘사랑의 증오’, ‘즐거운 비명’, 찬란한 슬픔’, ‘다 아는 비밀’ 등과 같은 표현이 그러한 것을 나타낸다. 모순은 이러한 것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다움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모순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모순이 나타나지 않도록 늘 진리의 말씀을 따라 나아가며 진실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비난의 원인이 되는 모순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가 삶의 법과 기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오늘날의 세상은 점점 자기가 기준이 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객관적 기준이 희미해 지고 자기 생각과 느낌에 따라 움직이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과연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자기가 삶의 법과 기준이 되니 갈수록 상대적인 비교와 평가가 난무한다. 자족과 감사가 사라진다. 심한 갈증 때문에 바닷물을 먹은 자들과 같은 인생을 펼친다. 악순환에 사로잡힌 삶을 펼친다. 갈증 해소를 위해 급한 마음에 바닷물을 계속 들이마시지만 점점 탈수 증세가 일어나고 입이 바짝 마르더니 결국 혈압이 떨어지고 심장박동수가 높아지면서 의식불명의 혼수상태가 찾아와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현실의 문제에만 함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삶을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자이기에 잠깐 동안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사는 현재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현실이 어렵지만, 어렵고 힘듦을 떠나 해 아래에서의 모든 삶이 헛되다고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해 아래에서의 현실의 삶이 아닌, 하늘의 하나님 아래에서 사는 삶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임재 앞에서 사는 삶임을 날마다 상기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사람들의 비난의 원인이 되는 삶의 모순이 시간이 갈수록 사라지게 될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재정적 위기, 건강, 직업, 사업, 자녀, 부부 관계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당신은 하나님께 어떤 자리를 내어 드리고 있는가? 삶의 어려운 상황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모든 관심은 문제의 해결에만 급급할 때가 많다. 빈곤한 삶이 풍요의 삶으로, 병약한 육체가 강건한 육체로, 실패의 자리가 성공의 자리로 바뀌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모든 상황을 허락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해서는, 그분의 왕 되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모습에 익숙해질 때 비난받기에 합당한 모순은 점점 심화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움’에 기인하여 나타나야 할 모순이 있다. 하나님의 왕 되심,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며 삶의 주도권을 그분께 내어 드리며 평생 복음을 위하여 선교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바울이 이것을 우리에게 잘 가르쳐 준다. 그는 고린도후서 6장에서 자신의 삶에 나타난 거룩한 모순?을 고백한다. “8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10) 당신의 삶에서 발견되는 모순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사람들의 비난을 단번에 끄집어 내는 모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다움’의 매력성을 한껏 발산하도록 하는 거룩한 모순인가?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을 삶의 법과 기준으로 삼는 삶을 통해 현재를 넘어 영원한 삶을 이 땅에서도 누리는 거룩한 모순이 가득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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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말은 없다 [제517호]
2019/04/30
147
사소한 말은 없다 교회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한다. 일꾼, 말썽꾼 그리고 말꾼이다. 말꾼은 말을 통해 사람들과 공동체를 어려움에 빠지게 한다. 그런데 말꾼은 말을 사소하게 생각한다. 본인은 쉽게 말하고, 그 한 말을 쉽게 잊어버린다. 작은 말에는 결코 사소한 것이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꾼의 입을 통해 잡음처럼 드러내는 말로 인해 적지 않은 사람과 공동체가 상처를 받는다. 말에는 사소한 것이 없다. 결코 사소한 말은 없다. 이유가 무엇인가?첫째, 우리의 말을 하나님이 들으시기 때문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야고보서 3:1)야고보는 우리를 향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실수가 많지만 특히 선생은 더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 선생은 많은 말을 하기에 그 많은 말이 많은 실수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주의 형제인 야고보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생각하지 않았다. 부활 이전에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그가 예수님에 대한 비망의 말로 많은 실수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삶에 되담을 수 없는 말로 인한 실수의 흔적을 떠올리며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향하여 내뱉는 말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들으시는 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가져올 보응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많이 등장한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2).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둘째, 우리의 말은 우리의 온전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다. 말의 실수를 줄이려는 노력과 신중함이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빚어간다. 왜냐하면 그러한 과정이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말이 나를 높일 때 이는 교만이다. 말이 다른 사람을 공격할 때 이를 비방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의도적이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비방한다. 기도를 부탁한다는 명분에서 간접적인 비방도 들어 있다. 때로는 말을 전략적으로 옮기면서 자신의 가치를 살며시 드러냄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는 방법으로 비방의 말을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싶은 때에, 말하고 싶은 방법대로 말한다. 마치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그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말한다. 또한 아무리 사소한 말에서도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피조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며 말한다.” - 폴 트립, 『영혼을 살리는 말 영혼을 죽이는 말』 35쪽 우리는 말이 온전한 말이 되기 위해서 마음을 온전히 가꾸어야 한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눅 6:45). 지금의 말이 나를 나타내고 있음을 생각하고 서로에게 끼칠 결과를 생각하며 말을 해야 한다. 남을 세우는 말, 따뜻한 말,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말, 우리가 한 팀인 것을 나타내는 말 말이다. 셋째, 우리의 말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말을 표현하는 탁월한 도구인 혀는 매우 위력적이다. 그래서 말을 제어하기 위해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처럼, 배의 운행을 위해 작은 키가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 강력하다고 말한다.혀는 또한 위험하다. 작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만큼 위험하다. 길들일 사람이 없을 만큼 위험하다.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태우고 죽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거기에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도록 할 수 있는 위선적인 성향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말이 악한 것이 아닌 선한 영향력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 4:6)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말에는 결코 사소한 것이 없음을 잊지 마라. 우리의 입 밖으로 나간 말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반영함은 물론 그 말은 사람을 넘어 가장 탁월한 청각를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이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듣고 계심을 기억하고 말은 우리의 온전함을 드러내며 그 힘과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사소한 말로 사람과 공동체를 죽이는 말이 아닌 살리는 말을 하는 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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