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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인 교회와 목회가 필요하다 [제456호]
2018/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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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인 교회와 목회가 필요하다

 

오늘날 ‘새롭고
다르다는 것’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독특하면서도 다른 차별성을 구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분위기 속에서 가장 위협받는 받는 곳이 교회이다. 늘
새로움과 차별성을 추구하며 창의적인 것을 요구하는 시대인데 교회는 늘 본질을 붙잡고 이러한 시대의 요구를 항상 저항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시대 착오적인 기관으로, 과거와 권위주의의
유물로 치부하며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냉소적 분위기도 한 몫을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세상 한가운데 세워진 교회의 유용성은
끝이 난 것인가? 하나님의 집으로서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며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움을 받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그리스도인들만의 리그에만 존재하고 그 안에서만 유용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인 것을 말이다.

급격한 변화와 혼돈 속에서도 교회는 새로운 미래를 선도하고
더 나은 시대를 꿈꾸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단어는 ‘창의성’이다.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그 시대 속에서 충분히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획일적이고 평범한
상태의 형식과 의식에만 머무르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온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그들을 감동시키며 변화시켰던 것과 같이 복음이 개인의 삶과 지역 사회 그리고 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당신과 교회는 더욱 창의적이어야
한다.

창의성은 모범적인 생활양식을 수반한다. 효과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창의성이 삶의 전 영역에 골고루 퍼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창의성은 배울 수 있다. 처음부터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개발과
훈련을 통해 배우게 된다. 배울 수 없다면 창의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창의적인 교회와 목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창의성이 사라지면 한편으로 매력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또한 창의성이 당신과 교회 공동체에 다음과 같은 것이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 배움을 지속시켜 준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배운다. 당신이 배우고 있다는 것이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된다. 배우기를
멈춘다면 성장을 멈추고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은 쇠할지라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창의성이 당신으로 하여금 지속적인 배움의 장으로 이끌 것이다.

 

둘째, 변화하는 사회와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충족시켜 준다.

성경적 진리는 불변한다. 결코 진리는 타협될 수 없다. 변화할 수 없다. 하지만 문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형성되고 발전한다. 이 문화의 형태는
타협되지 않는 진리를 기준으로 분별되어야 하고 걸러져야 한다. 때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진리의 적용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사회가 빠르고 폭넓게 변화할 때 우리의 방법 또한 변해야 한다. 복음의 내용이 결코 변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옷을 포기하고 버리지
않지만 옷과 관련된 패션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듯이 창의성은 당신으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 위에 견고히 서서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지속하며 사회와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

 

셋째, 신선함과 생동감으로 의사소통에 영향을 미친다.

진리를 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접근해 가시는 예수님의
창의적 접근 방식과 수사법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측 불가능한 창의적 방식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은
물론 그들의 발걸음을 끌어당겼다. ‘교회는 늘 그래’, ‘그리스도인은
다 똑같아’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반응과 호감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결국 당신의 창의성에서
시작된다.

 

한국 교회는 시대와 그 사회를 이끌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도리어 교회가 이 시대와 사회를 따라가기에
급급해 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교회가 시대와 사회를 따라가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와 사회를 이끌어갔던 이전의 교회 현장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것이 많이 존재했다.

창의적인 교회와 목회에 필요한 방법과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신과 교회는 존재하는 그 현장에서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창의적인 사역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이 당신과 교회가 창의적 목회와 사역의 디딤돌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의 주변에는 예수님이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본질과 그 의미를 담지 못한 것이나 형식과 옛 관습으로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고 고민하자. 혹시라도 그러한 것이 발견된다면 그 의미와 가치를 회복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창의적
교회와 목회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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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지 말고 '복'을 구하라 [제455호]
2018/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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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지
말고 ‘복’을 구하라

 

‘번영신학’은 복음이 아니다. 이것은 건강과 부유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부유함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도록 하며,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부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번영신학은 기독교의 기독교다움을 훼손시켜왔다. 그리고 이러한 번영신학과 한국의 샤머니즘의 교묘한 조화를 통해 기독교의 안팎에서는 ‘복’이라는 단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로 인해 ‘복’을 구하거나, ‘축복’을 해 주는 기도는 기복주의 신앙이라며 통째로 묶여서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치고 구하도록 해야 한다. 복의 가치는 단순히
물질에 있지 않고복을 구하는 것은 단순히 부자로 사는 것을 구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실 수도 있고, 가난하게 하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유하다고 복을 받은 것이라고, 가난하다고 복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질의 부유함이나 가난함, 이 모든 것은 단순히 도구에 불과하다. 이것을 이용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복을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16~17)

 

야고보는 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선한 것이 없고 우리가 사랑할 만한 것도 없고 우리의 아버지, 즉 빛의 아버지에게서 오지 않은 어떤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인생에서 선한 것을 찾는다면 어디서 찾겠는가? 이 세상 속에서 그것을 찾겠는가? 재물과 권력과 명성을 통해서 그것을 찾겠는가? 쾌락을 통해서 그것을
찾겠는가? 아니다.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오직
그분에게서만 우리는 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당신을 떠나서는 어디에도 선한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 이외에는
어디에도 복을 받을 곳이 없으며,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역대상 29:11~12)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다. 그러므로 주님 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복을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복을 허락하신다.

 

복은 하나님께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주어진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비보다 더 자비로운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주기를 기뻐하시기에 나누어 주신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하나님을 화내고 무섭고 인색한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러내도록 요청하였다. 그때에 하나님은 산에 둘러싸여서 서 있는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며 말씀을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애굽기 34:6)

 

이스라엘의초대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무관심과 어리석음으로 삶을 추락시킨 사울왕을 향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사무엘하 12:7b~8)

 

이미 많은 것을 주셨는데, 혹시라도 더 필요했다면 하나님께서 주셨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주시려는 분이다. 결코 인색하신
분이 아니다.

 

복은 간구하는자에게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복 주시기를 좋아하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복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의 저장고가 영원과 닿아 있음을 알고 있다.
또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만약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정말로 알고
있다면 구해야 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7~11)

 

우리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주시되 ‘하나님께 구하는 자들’에게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구하라. 도리어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교만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주시려고 하신다. 우리를 위한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 어떤 경우 우리 자신을 위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깨닫지 못할 때도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며, 주 안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할 만한 복을 간절히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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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잘하였다” 칭찬받는 삶[제454호]
201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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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잘하였다” 칭찬받는 삶

 

예수님이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맨 먼저 선포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그분을 위해
한 일에 대해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보상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분은 산상수훈에서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성경 맨 마지막 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 역시 그 주제가 같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7:27)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상해 주실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종말의 때나 우리 육신이 죽음으로 말미암는 개인적 종말의 다음에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것이다(고후 5:10).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알기에 영원한 삶과 그에 따른 상급을 생각하며 이 땅에서 실제적이면서도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성실히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된 2018년,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삶의 기회를 영원한 삶에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삶에서 다음과 같은 6가지의
주된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셨다.

첫째는 생명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분을 찬송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출생과 사망 사이에서,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간다(요 3:6, 4:23~24, 살전5:23)

둘째는 죽음이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아니지만, 육적으로는 죽음을 경험한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유기체 이상의 존재다. 예수님도
모든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눅 23:43)

셋째는 목적이다. 우리는 죽은
다음에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그 목적지는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예수님은 사후에 우리가 가게 될 곳은 천국과 지옥 두 군데 뿐이라고 말씀하셨다(요 3:16~18, 마 23:33)

넷째는부활이다. 우리는 부활한
몸, 영원히 썩지 않는 새로운 몸을 받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이 새로운 몸은 영원히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요 5:28~29,
고전 15장, 빌 3:21)

다섯째는 보상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 영원에 대한 보상도 받고 보응도 받을 것이다(요 5:22, 고후 5:10, 계 20:11~15,
마 11:21~22, 23:14)

여섯째는 영원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가 가졌던 믿음과 행했던 행동의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혹은
부재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마 25:46)

 

위의 여섯 가지
사건을 일렬로 나열해 보라. 그리고 자세히 관찰해 보라. 그러면
분명히 우리의 삶의 어떤 한 가지 사건이 영원에 대한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만이 영원한 인생이 하나님이 진정 원하셨던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삶을 더욱 소망하며 그 삶을 지금 이 땅에서 이미
시작하고 또한 궁극적으로 준비하며 사는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관심과 초점을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맞추어 사는 자로서 말이다.

오늘이 영원을 위해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 오늘을 어떻게 살겠는가? 영원이라는 큰 그림에 비추어볼 때 당신이 세운 계획과 목적,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태도와 방식은 하나님께 “잘하였다” 칭찬받을
만한 것들인가? 2018년을 이러한 관점으로 시작하고
사역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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