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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악을 이긴다[제482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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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악을 이긴다그리스도인들을 무섭고도 끔찍하게 박해했던 시대에 한 성도가 순교하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나에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사랑의 숨결을 뿜어 낼 것입니다. 나를 구타하십시오. 나는 신음 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나를 박해하고 고통으로 몰아넣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나 정신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명하고 있다(롬 12:17~21). 선택이 아닌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마땅한 삶으로 말이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우리의 기대나 능력을 뛰어넘어서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우리의 선한 행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악을 이기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보다 더욱 사악했던 그 세계가 뒤집힌 것은 그들에게 인터넷이 제공되고, SNS를 통한 소통이 있었고, 환경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항복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추구하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신의  바르게 평가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 서로를 철저히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악에 대하여 반응했는데 선이 악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이 너무도 강력하기에 우리는 그 악에 대항할 수 없고, 그럴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제자들을 향하여 악과 대면할 때 선을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다. 복수 대신 선을 베풀라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소록도 나병환자들의 수용소인 애양원교회에 부임한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구호 사업과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여수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출옥했다. 그는 1946년에 목사가 되어 애양원교회를 지원하며 시무하던 중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두 아들을 폭도에 의해 잃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사태 진압 후 가해자들을 살리려고 애썼고 그들의 구명을 위해 탄원하여 결국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았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한 손양원 목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판단하시라는 것을 알고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깊은 수렁에 빠뜨렸던 원수를 향해 사랑을 실천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아첨하는 위선이 그에게는 없었다.  우리는 내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본능적인 복수나, 그들을 향한 심판을 하는 것을 멈추고 반드시 하나님을 최종 심판자로 인정하며 모든 것을 그분께 양도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간사에 존재하는 모든 행간까지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최종 판관자임을 믿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사랑하라   그분이 갚으신다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심판을 하나님께 양도하는 것에 머물며 마음에는 복수심을 가득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지만 선이 악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서 성경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롬 12:20)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것인데 이는 그들의 인생에 부끄러움과 회개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귀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이야 말로 악에 대항하여 우리가 소유한 가장 힘 있는 무기임을 잊지 말자.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자신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비수를 꽃은 우리를 용서하시며 받아주시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으시며 도리어 우리를 영원한 형벌 가운데서 건져 내시며 악을 향하여 선으로 대응하셨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을 기억하며 그렇게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용서받은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엡 4:32). 하나님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다(롬 5:10). 우리도 우리의 원수인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때문이다. 은혜는 모든 기대를 버린 사람들에게 흘러들고, 그들을 통해 흘러나간다. - 찰스 스윈돌 -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시안은 주후 303년부터 305년까지 3년 동안 교회를 잔인하게 박해했다. 교회를 폐쇄하고 성경을 불태우고, 우상 숭배를 강요했고 갖은 방법으로 사도들을 박해하며 죽였다. 그런 후 그는 기독교인들을 모두 박멸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일을 기념하여 ‘기독교는 박멸되었고, 로마 신들에 대한 예배가 회복되었다’라는 글귀를 새긴 동전까지 만들었다. 그 후 로마제국은 멸망당하고 로마의 신들은 신화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기독교와 교회는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며 전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결국은 선이 악을 이긴다.  세상이 점점 악해진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며 품고 용서해야 할 대상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가장 강력한 무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힘입어 받은 그 은혜와 긍휼을 흘려보내야 한다. 선이 악을 이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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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도모하는 지도자가 알아야 할 것[제481호]
201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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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결코 쉽지 않다. 지도자는 때로는 설상가상의 도전에 직면하기도 한다. 무엇을 하든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려고 하지 않거나 당신의 리더십이 전혀 신뢰받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공동체나 조직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신뢰를 받을 필요가 있다. 지도자로서 변화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변화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오래된 교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꼭 필요한 변화라고 하더라도 급속하게 진행될 경우에는 교회 분열이 초래될 수 있다. 지도자는 조직의 다른 리더에게 변화의 필요성을 이해시켜야 한다. 큰 배 일수록 돌이키기가 더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는 주의 교회를 어떻게 인도할지 매우 신중해야 한다. 많은 교회가 변화를 필요로 하지만 그 방법론에서는 지혜롭지 못한 경우를 자주 발견한다. 지도자로서 지금 당신의 교회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다음의 몇 가지를 먼저 고려해 보기를 권한다.관계의 회복이 먼저이다 사람들이 따르는 것은 지도자이지 전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목사는 사람들이 잘 따르도록 양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 주며 다른 동료 리더에게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리더를 신뢰하며 변화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로서 사람들이 의기소침할 때 그들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 그들이 승리했을 때는 마음껏 축하해 주라. 좋은 지도자는 수고와 섬기는 능력으로 존경받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할 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구성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새로운 목적지를 향한 변화를 위한 출발에 앞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점검하라.모두를 계획에 동참시키라경건한 비전은 고무적이다. 성경이 뒷받침하는 비전은 특히 그렇다. 좋은 지도자는 비전을 제시할 때 열정으로 가득하며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는 바를 먼저 실행한다. 변화를 이루려면 비전을 먹고 마시며 비전과 함께 자야 하는데 이를 위해 교회의 비전에 지속적으로 연료를 공급할 팀을 개발해야 한다. 새로운 계획을 짤 때는 이미 짜여진 리더십 팀이나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동참시켜야 한다. 왜 변화가 필요한지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 또한 계획 수립에 그들의 생각이 포함되어야 한다. 온전하고 사려 깊은 계획을 수립할 때 브레인스토밍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반영될 때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뜻이 달라도 분열은 피하라계획에는 대가가 따른다.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교회는 우리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킬 권한이 없다. 교회의 변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면 신중하라.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목적과 방향 면에서 리더십이 분열된다면 변화는 실현될 수 없다. 아마도 지도자로서 당신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반대 의견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찬성하는 쪽으로 일을 추진할 수도 있다.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거부하는 교회에서 일할 수 없어 결국 떠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방향 면에서는 다를 수 있지만 그들 역시 동료 신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만약에 교회를 떠나기로 결정했다면 하나님의 이름과 주님의 몸인 교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사랑과 예의로써 떠나야 함을 잊지 마라.변화는 싸움을 의미할 수 있다지도자의 측근이나 평신도 지도자들은 변화에 동의하지만 일부 교인은 반대하는 상황에서 싸워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서로를 적대시하고 나의 주장이 옳다는 일방적인 주장을 하는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도자는 분열적인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어쩌면 영향력 있는 구성원이 리더십에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이 그 문제를 지적하면 그로 인해서 그는 다른 교인들을 만나 자신의 입장을 숙지시키려고 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든 그 좋지 않은 일과 영향력이 파생되지 않도록 가능한 빨리 대처해야 한다. 지도자로서 영향력 있는 구성원이 순종하기를 거부한다면 당신은 행동을 취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기도하며 그 사람을 팀원으로서 진실하게 대면하라. 좋은 지도자는 문제가 발생하면 곧바로 대처한다. 좋은 지도자는 교회가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한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이끌어 갈 때 지도자는 담대하되, 옳지 않은 싸움은 피하고 인내하며, 따르는 이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 위의 글은 짐 푸트먼의 『교회는 팀이다』(생명의 말씀사)에서 부분 발췌하여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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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는 곧 설교이다 [제480호]
2018/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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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는 곧 설교이다우리는 분명히 예전과는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설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 역시 우리 세대의 특징이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면 집단 망상에 빠져 이것이야말로 더 큰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당신은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이 강해 설교를 더 들으려고 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교계의 흐름과 출판업계의 흐름과 매출을 보면 그렇게 긍정적인 결과를 낙관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강해 설교를 더 들으려고 하거나 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강해 설교의 측면에서 볼 때 복음주의 교회는 대대적인 군축을 강행해 버린 듯한 느낌이다. 성경 강해가 쉬운 임무가 아님은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성경 강해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도리어 성경 강해는 복잡하지 않고 이해하기 쉽다. 성경 강해란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 또는 번역하여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느헤미야 8:8)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잘못 이해할 만큼 어려운 것인가? 잘못 이해할 만한 내용이 있는가? 설교자가 받은 임무는 아주 간단하다. 성경을 읽고 설명하는 것이다.성경을 강해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설명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강해란 본문을 읽고, 해석하고, 집에 가고, 다시 돌아와서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강해 설교에 대한 지침이기도 하다. 물론 설교하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많기는 하다. 성경은 말씀을 전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에스라 7:6) 하나님이 아무나 지명하셔서 이러한 지침을 내리시고 그 명령에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다.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몇몇 사람에게만 주님의 손이 임하신다. 따라서 설교자는 소명이 굉장히 중요하고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 일에 부르심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에스라 7:10이 우리에게 좋은 힌트를 준다. 에스라는 설교를 위한 적임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데 이는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사명과 더불어 연구하는 자세도 설교자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설교자란 하나님이 부르셨고, 회중이 그 사람 위에 주님의 손이 임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사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능숙해지기 위해 성경 연구에 전념하고 준비하는 모습으로 반응한다.신약성경도 이러한 지침을 준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며 목회자의 소명 중 가장 우선해야 할 것에 대해 부탁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다.“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알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1~2)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나 똑똑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학위가 필요한가? 바울은 이 말씀에서 뜻이 분명한 단어만을 사용했고, 구절을 복잡하게 쓰지도 않았다. 그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 경책하며, 경계하고, 권하고, 인내하며 가르치라는 명령일 뿐이다. 이것이 강해 설교의 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왜 이런 설교가 나오지 않는가? 왜 성경 강해가 많은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는가? 왜 성경 강해가 많은 설교단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가? 왜 성경 강해는 많은 설교자에게 낯선 것이 되어야 하는가? 왜 강해 설교는 신학교 졸업 후에 또 다시 배워야 하는 장르가 되었는가? 어쩌면 우리는“강해는 곧 설교이다”라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성경대로 하자면, 강해가 아니면 설교가 아니다. 어쩌면 강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설교라 부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당신을 설교자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문을 읽지도 않고, 설명하지도 않고, 경책하지도 않고, 경계하지도 않고, 권하지도 않고, 인내하며 가르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강해 설교를 선호하는 편이야!”라는 말을 멈추고, “나는 설교자이다, 나는 본문을 읽고, 설명하고, 연구한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반복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설교자와 설교 강단의 회복은 정말 간단한데 비극적일 정도로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 - 위의 글은 알버트 몰러(미국 남침례 신학교 총장)가 ‘셰퍼드 컨퍼런스 2008”에서 한 강의 일부를 발췌 수정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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