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Home / 칼럼
page-visual_title

칼럼

글보기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제 786호 칼럼]
   조회수 15
2026-08-04 11:07:21

죄의 특성은 ‘가두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합니다(창3:7). 이 대목에서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는 것으로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 판단을 상실하고 나 중심의 가치 판단만 남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안을 상실한, 육안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원한 뜻과 계획을 아는 안목은 잃어버리고 자기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으로만 판단하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것 만이 전부인 양, 자기 생각, 경험, 판단에 갇혀 있으면서도, 갇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지 못한 채 결국 원수 사탄이 바라는 바 그 안에서 자기를 위해 애써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상태로 전락한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보지 못하니 용납하지 못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마자 그들에게 찾아온 반응은 수치였습니다. 자신의 벗은 몸을 보고 수치심을 느껴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낯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보실 때 그들의 벗은 몸에 대해 일말의 경멸을 가지셨을까요? 명령을 어긴 그들에 대해 하나님이 복수심에 불타오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인간을 흙으로 빚어 자신의 호흡을 불어넣어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이 당신의 명령을 어기고 죄의 삯을 짊어져야 하는, 무시무시한 상태에 빠질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들에게 선악과를 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신 분입니다. 그만큼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인정하시고 존중하신 분께서 결코 그들의 어떠함을, 그들의 벗었음을 경멸하실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어떤 동인도 필요 없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셔서 모든 약동하는 생명의 시작, 근원이 되십니다. 생물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만물은 예외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고,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약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로 인해 인간을 심판하시는 그 때에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살리셔서 구원의 택정하심을 완성하는 분이십니다. 정죄하여 파멸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의 눈이 아닌, 나 중심으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나 자신이 인생의 ‘선악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들은 선,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것들은 악으로 보이는 단순한 구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경 말씀이 내게 대해 강변하시는 바, 하나님 눈에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 세상이 보는 대로 나 자신을 평가합니다. 잘 될 때는 다행이지만, 잘 안 될 때는 금세 실패한 인생, 망한 인생이 됩니다. 

두 번째는 타인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 앞에서 아담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해 마지 않았던 하와를 가리키며, “저 여자 때문입니다”라며 뒤집어 씌웁니다. 자기 중심의 눈으로 보니 타인은 그저 나를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 만한 상황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즉 자기 힘으로 애써 자기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킵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의 논리로 자기 의를 내세우며 상대를 정죄합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장차 받으실 영광, 이루실 온전한 모습은 전혀 알지 못한 채, 현재 나의 보고 듣는 바, 아는 바를 기준 삼아 상대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 기준은 역시 ‘나 중심’입니다. ‘내게 유익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세 번째는 만물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만물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지금도 만물은 영광의 자유를 갈망하며 자유의 아들들을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롬8:21-2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정금 같이 연단하셔서 그들을 통해 만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하시는 이 뜻’을 이루시고자 오늘도 택하신 백성들의 삶에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한 가장 최적의 조건으로 삶을 허락하십니다. 다시 말해, 오늘 나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들은 정교한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허락된 ‘가장 좋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 중심으로 보면 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인생이라는 것은 납득할 만한 일들로만 구성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때로 우리에게 있지만,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을 ‘나 중심’의 굴레에 갇혀 있는 나를 빼주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받고 지금 ‘내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겸손히 여쭙고 기다리기보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세상을 탓하거나, 하나님을 탓합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의로웠으니 아마도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아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욥은 종국에 ‘의로운 나를 고통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은 의롭지 않다’(욥34:5-6)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갇혀 있는 자기 생각, 경험, 판단 속에서는 의로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믿음으로 수납하지 못하는 태도가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나 중심의 눈에 갇혀 하나님 중심으로 보지 못하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나의 감옥’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십니다.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히2:14). 자기 중심의 근본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하니 삶의 끝에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탄은 이 죽음을 빌미로 우리를 조종합니다(히2:15). 자기 중심의 생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하여 죄의 영향력을 극대화합니다. 걱정, 염려, 슬픔, 우울, 불안, 분노, 시기 등 온갖 부정한 것들에 사로잡혀 애써 자기 힘으로 살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망한 인생으로 귀결되게 합니다.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죽음을 무력화하셨습니다. 사탄의 무기인 죽음을 무기력하게 하셨으니 그가 ‘쏘는 것’이 사라져 버립니다(고전15:55).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 되실 때, 내가 주인 됨으로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기 중심의 눈으로 나와 타인, 세상을 바라보며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눈으로 나와 타인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생명과 복, 사망과 저주 앞에서 생명과 복을 택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생명과 복의 길로 갈 때, 참 자유이신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 속에서 우리 또한 자유를 누립니다. 요컨대, 자유로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나를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의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으로 화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인생이, 예수님의 인생과 연합하기 때문입니다. 존귀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니 그분의 존귀함이 나의 것이 됩니다. ‘너를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주고 속량하였으니 너는 내 것이다’(사43:1-3) 말씀하시니 이것이 나의 자존감이 됩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 우리는 주님의 선언을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소유된 백성(벧전2:9)의 지위를 누립니다. 

또한 타인을 바라보는 하나님 중심의 눈이 열립니다. 상대를 나의 생존, 유익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나와 다름을 통해 나를 연단하시고 내 자유의 지경을 넓혀 주시기 위해, 오히려 날 위해 수고하는 존재로 바라보게 됩니다. 나를 영원 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의롭다 하시어 받으실 영광과 계획을 두신 것처럼 그에게도 최소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계획과 영광을 두셨음을 봅니다. 그러니 그를 나보다 나은 존재로 여길 수 있으며, 주님께서 나를 용납하셨듯 나도 그를 용납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맹인 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면, 하나님의 크심을 봅니다.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틀렸다 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네가 아느냐” 물으십니다(욥38:1-5). 욥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 안다 생각하여, 심지어 하나님을 틀렸다 말했던 그는 하나님의 크심 앞에 도무지 자신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눈이 열리면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바라보며 믿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용납할 수 있습니다. 

나와, 타인과, 만물을 용납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나를 옭아매는 나 중심의 자아관, 타인관, 만물관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나와 타인과 만물을 용납하며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2차 세계대전 상황에서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악명 높은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증언하기를, 생존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극악의 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인간다움을 선택하고 생의 의지를 다지는 이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자신 역시 그러한 상황에서 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생사를 확인할 수조차 없던 아내를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극적으로 생존한 뒤 알게 된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내는 이미 다른 수용소로 보내져 몇 달 전에 사망한 상태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증언합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한 가지는 빼앗을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마지막 자유이다." 

그의 인간관, 또는 인생관이 성경적이다 아니다를 논하기에 앞서, 하물며 그리스도 예수님의 핏값으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 자유, 복음의 자유는 얼마나 더 유력하겠습니까? 배스 텐 붐 여사의 증언처럼 “하나님보다 더 깊은 수렁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나와 타인과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그것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 자유로 자유를 누리십시오.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실제, 사실적 현장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로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하나될 때,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기름 부으셔서, 즉 성령하나님을 부어 주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중심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나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_디모데성경연구원


첨부파일2026_8_3_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docx (30.5KB)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장바구니

등록된 상품이 없습니다
합계: 0

고객지원

디모데성경연구원은 고객의 의견을 소중히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