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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본주의 정신과 기독교의 반응 [제 762호 칼럼]
   조회수 216
2025-05-21 16:29:41


 

현대의 자본주의는 산업 자본이 주요소를 이루던 과거의 자본주의와 다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 창출하는 자본은 현대의 자본주의를 지탱, 운용하는 데 있어서 부가적인 요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된 요소는 단연코 금융(은행, 보험, 부동산과 같은 것들)입니다. 현대의 자본주의에서 금융 창출 수익은 산업 부문 또는 서비스 부문과 비교할 때 국가 수입에서 월등한 비율을 차지합니다. 자동차 회사가 자동차 판매보다 차 구입을 위한 대출 업무에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식이지요. 증가한 금융 활동 역시 현대 자본주의에서 금융의 중요성을 선명하게 합니다. 즉, 금융계의 돈의 액수와 거래 빈도는 다른 경제 활동의 그것을 압도합니다. 예컨대 하루 외화 환전 거래 횟수가 한해 동안의 전 세계 무역 총 거래 횟수와 맞먹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특성은 금융이 다른 영역에서의 수익률 쇠퇴를 메꿀 쉬운 해법이 되게 하는 동시에, 제품 또는 서비스 생산과의 직접적 연결 고리를 피하게 합니다. 금융은 더 이상 직접 다른 분야의 생산을 돕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자체의 생명을 책임집니다. 물론 금융은 여전히 산업 및 서비스 부문에 유익하고 필수적인 도움을 줍니다. 예를 들어 기업은 설비 구축이나 유통, 재고 비축을 위해 대출이 필요하고 이렇게 대출받은 돈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하여 얻는 이윤으로 갚아 나갑니다. 그러나 이는 경기 침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그와 같은 산업, 서비스 부문의 경기 침체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금융은 금융상품 자체를 거래함으로써 수익을 발생시킵니다. 즉 대출, 주식 등이 그 자체로 상품이 되는 2차 시장을 형성하고 이에 따른 수익으로 비금융권 부문을 지탱하는 것입니다. 


한편 2차 시장에서의 상품(예컨대 주식) 가격을 결정 짓는 요소는 단순히 기업의 ‘현재 수익성’과 짐작되는 ‘미래 수익성’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주식 거래에 있어서 직접적 가격 결정 요인은 해당 주식에 대한 ‘현재의 수요’ 및 ‘예상되는 수요’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주식이라도 다른 투자자들의 행동에 대한 예상이 현재 수요를 부추기는 요인이 될수록, 예상 수요는 더욱 올라가며 따라서 그 기업의 수익성과는 상관없이 주식의 가격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심리라는 무형의 요소가 반영되는 이유로 2차 시장에서 금융 자산의 가치는 하루하루 급등 또는 급락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상기의 두 가지 특징(금융 지배의 원리, 금융과 생산 사이의 분리)을 가진 금융은 결과적으로 기업, 정부, 개인의 경제 활동을 훈육합니다. 기업은 주주 가치를 강화를 수위의 가치로 두고 최대 수익성을 집요하게 추구합니다. 정부는 경기 침체로 인한 세입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고 그 국채를 산 채권자들에게 휘둘리는 경제 정책을 시행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런 기업과 정부에 고용된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생계 유지를 위해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립니다. 빚 자체에 훈육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금융 자본주의에 매여 수익성의 극대화를 위해 ‘쥐어 짜여야’ 하며 단순히 생존을 위한 불안으로만 일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하나가 되어, 자본주의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 주체로서 행동할 것을 강요 당합니다. 누구든 자신의 행동에 따르는 비용과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냉혹한 현실에 마주합니다. 과거(예컨대 빚)는 현재와 미래를 옭아매어 오로지 현재의 포로로 살게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끊을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연속성이 형성되어 현재와 근원적으로 다른 어떤 미래도 상상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금융 지배 자본주의의 정신으로서 우리의 사고 구조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금융 자본주의 정신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기독교는 근원적 시간 불연속성의 종교이며 그에 따라 근원적으로 파열적인 변혁에 대한 기대를 고취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채를 통해 과거와의 끊을 수 없는 연속성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와는 달리 기독교는 과거와 현재가 수립해 놓은 우리 자신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소망을 드러냅니다. 바로 그것이 새 생명으로의 회심이 의미하는 바이며, 죄악 된 ‘옛 사람’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더 이상 죄의 효력 아래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서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토대 위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극적인 격변에 의해, 한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의 철저한 변화에 의해 우리 자신과 결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을 초월해 끌어올려 짐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생 전체를 뒤로 하고 떠날 수 있는 것이며 이 시대 정신과 구별되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은 새로운 정신으로 현실을 지혜롭게 대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캐스린 태너,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IVP)의 일부 내용을 발췌, 요약, 재구성하였습니다. 이후의 자세한 논의를 살펴보기 원하시면 해당 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첨부파일2025_05-21_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docx (16.9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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