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쇠똥구리는 초식동물의 똥을 먹고 살아가는 곤충입니다. 초식동물의 똥은 자연에 드문 완성형 자원이라고 합니다. 음식물(주로 식물) 조직은 이미 분쇄돼 있고, 소화액과 미생물로 분해돼 있으며, 수분, 탄소, 질소가 한 덩어리로 압축된, ‘혼합 영양 블록’(?)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동물들이 기피하기 마련이니 그야말로 똥은 쇠똥구리에게 생존을 위한 최적의 틈새 자원입니다. 쇠똥구리는 이 똥을 경단 모양으로 동그랗게 빚은 다음 데굴데굴 굴려 서식지로 가져가 땅속에 묻습니다. 쇠똥구리는 경단 하나에 알 하나를 낳는데 똥 속에서 부화한 유충은 똥 경단을 먹고 자라며 일정 시기가 지나 땅 위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쇠똥구리의 비범함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쇠똥구리는 경단을, 상대적으로 길이가 더 길고 힘이 센 뒷다리로 굴리는데 아무래도 물구나무서기 자세로 똥 경단을 굴리다보니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굴리다보면 어느새 경로를 이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게 길을 잃을 때, 쇠똥구리는 높은 곳으로, 똥 경단 위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낮에는 태양을 기준 삼아, 밤에는 별들을 기준 삼아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가야 할 길을 찾습니다. 태양이나 별들의 위치를 기억하고 움직임을 이해하며 자신의 방위를 찾는 생물은 단 두 종류, 인간과 쇠똥구리 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믿지 않는 이들은 이를 두고 진화의 결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결과요,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섬세하게 작용하시는 섭리(攝理)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 만물을 붙들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히1:3). 쇠똥구리가 본능적으로, 별 생각 없이 신비로운 능력을 사용하여 신비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이 온 천하에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는” 모습인 것입니다(시19:3-4). 섭리는 다스릴 섭(攝), 다스릴 리(理)로 돼 있습니다. 이 중 攝(다스릴 섭)을 자세히 살펴보면 재미있습니다. 손수변(扌), 그리고 귀 이(耳)가 세 개 겹쳐진 소곤거릴 섭(聶)으로 돼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만물의 귀를 손으로 잡아당겨 말씀을 속삭이심으로 다스리시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물론 한자가 성경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이치를 깊이 관찰하여 만들어져서 그런지 어딘가 말씀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그렇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섭리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마치 속삭이듯 만물에 응하여 하나님의 공의(미쉬파트: מִשְׁפָּט)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쇠똥구리가 똥을 빚어 경단을 만들고, 길을 잃을 때 하늘을 바라보며 가야 할 길을 찾는 것 등 그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이거나 이신론의 실체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섬세한 손가락(출8:19, “권능”: 개역개정)에 의한 섭리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으로, 섬세하게 섭리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예정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에6:1)
바사 제국에 흩어져 살던 유다 민족들은 하만의 음모로 민족 전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합니다.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세워지고, 확정되어 상황이 반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 왕후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갑니다. 이는 규례를 어긴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왕은 에스더를 사랑스럽게 여깁니다. 은혜를 입은 에스더는 왕을 잔치에 초대하지요. 그런데 그날 밤에 왕은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은 하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오게 하고 이를 읽습니다. 그리고는 역대 일기에서 모르드개의 공적을 읽게 됩니다. 왕이 모르드개의 공적을 치하하기를 결심하면서부터 이야기의 흐름은 급반전됩니다. 막다른 길에 몰려 꼼짝없이 죽을 날을 기다리던 유다 민족의 운명이 반격의 흐름으로 뒤바뀌는 것입니다. ‘하필’ 그날 밤, 아하수에로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욥바에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다시스는 지중해 서쪽 끝, 오늘의 스페인). 모압에서 돌아온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웠습니다. ‘마침’ 보아스는 그날 베들레헴에서 돌아왔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나리오였습니다. 그러니까, 와스디가 아하수에로의 명을 거부하고, 모르드개가 (이방인과 통혼하는 것을 금하는 유대인이었음에도) 사촌 동생 에스더를 후궁으로 데려가는 것에 순응하고, 그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음으로 유다 민족이 말살의 위기에 처하고, 에스더가 궁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결의로 나아가 그의 눈에 사랑스럽게 보인 것 등 이 모든 것은 아달월 12일, 13일을 오히려 보복의 날로 삼아 유다를 구원하시려는 예정을 위해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다만 세계사와 같은 거대 담론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 택하심을 따라 이루실 뜻과 받으실 영광을 두셨고 이를 하나님의 섬세한 손가락으로 섭리하시어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경륜에 편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소곤거리시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내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쇠똥구리가 본능으로 신비한 능력을 드러내며 살 듯 나에게 심으신 하나님의 공의대로 자연스럽게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소곤거리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공동체, 곧 교회를 통해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세우신 권위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엡1:22-23, 엡3:15-16, 골1:18, 행20:28, 계1:20).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11,17,29) 예수님께서 머리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몸 된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응할 때, 하나님의 경륜에 편승하는 ‘결정적 사건’을 행합니다. 그 ‘결정적 사건’이란, 이를테면 지체된 형제자매들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연 속 필연으로 만나게 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가 되어 사랑이신 예수님과 연합하니, 나에게서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가 그들을 섬깁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이는 작은 일, 하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실상 알고보면 이것은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섭리를 아우르는 크신 경륜에 올라타는 일입니다.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했던 아브라함(히13:1), 그저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보아스의 밭으로 나간 룻(룻1:16-17, 2:2-3),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함으로 주님께 칭찬받은 이들(마25:31-40)을 기억하십시오. 아하수에로는 그저 잠이 안 왔고, 역대 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음에도,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시는 섭리에 따라 행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는 상관없이 그저 만물 중 하나 정도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공동체를 통한 말씀이 우리 귀에 응해 하나님의 공의대로 자연스럽게 행할 때, 버림받지 않고 하나님의 크신 경륜의 일부가 되며, 영원한 천국 상급을 쌓습니다. 오늘 당신을 지역교회로, 공동체로 부르신 하나님의 복되신 뜻을 깨닫고 경륜에 편승하는 기회를 사시기(엡5:16) 바랍니다.
_디모데성경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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