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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믿음, 그 사이에서 [제 782호 칼럼]
   조회수 18
2026-05-28 16:00:43

필자는 대학 시절, 창조과학회 소속 한 생물학 교수님의 강의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당시, 진화론의 모순을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주장하셨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종과 종 사이의 중간 단계 화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자들의 주장과 같이 진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누적되어 이루어졌다면 어류와 양서류, 양서류와 파충류, 파충류와 조류 등 각 종의 특성을 모두 가진 생물의 화석이 마땅히 발견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외부 환경적 요인이 각 단계의 생물종으로 하여금 자신이 살던 환경을 벗어나도록 압력을 가한다 하더라도, 그 압력으로 인해 각 단계의 생물들이 자신의 신체구조를 바꾸고자 노력할 리도 없으며, 종과 종 사이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차이를 결코 만들어낼 수 없다고도 역설하셨습니다. 한껏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화술로 말입니다. 그 강의는 필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시라는 믿음만큼은 흔들리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창조과학회에 참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앞서 ‘중간 단계’와 관련하여 ‘원숭이나 고릴라 같은 유인원이 사람으로 진화했다’라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사족보행을 하던 유인원이 서서히 허리를 펴면서 직립 보행을 하고 어딘가 열등한 짐승에서 우월한 인간류로 변해가는 그림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실제 많은 교과서나 과학 관련 서적에서 해당 이미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진화론에 따르면 이 그림은 사실 진화론을 오해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 영향 때문에 흔히 크리스천들은 ‘진화론이 맞다면 어째서 동물원의 원숭이는 인간이 되지 않는가?’라든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유인원이 사람이 돼 가는 모습은 찾을 수 없지 않는가’라는 식의 물음으로 진화론을 반박하고 창조론을 주장하곤 합니다. 

사실, 진화론에서 인간의 진화에 관해 말할 때에는 ‘인간이 침팬지에서부터 점점 우월한 종으로 진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인간과 유인원은 공통조상으로부터 갈라져 각각 다른 종으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공통조상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지만(추측할 뿐이지만) 그 공통조상으로부터 어느 시점에 원숭이와 인간은 종이 서서히 분화되어 원숭이는 원숭이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진화를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원숭이와 인간 사이 중간 단계의 화석은 애당초 있을 수 없고, 공통조상-인간 사이의 중간 단계 생물, 공통조상-원숭이 사이의 중간 단계 생물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없다’고 단언하는 중간 단계 화석도, 진화론자들은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시조새나 틱타알릭과 같은 화석들이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각각 파충류가 조류로, 어류가 양서류로 변해가는 중간 과정의 생물 화석으로서, 파충류와 조류의 특성, 어류와 양서류의 특성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종과 종 사이의 도약은 아니지만 종 내에서의 진화를 보여주는 증거로 오돈토켈리스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오돈토켈리스는 거북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생물의 화석인데, 완전히 발달한 배딱지를 지녔지만, 등딱지는 부분적으로만 형성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거북이 등껍질의 진화 과정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로 간주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정도 근거의 주장으로 생물의 진화를 확실히 입증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해 보입니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중간 단계의 화석이 분명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진화의 중간 단계에 있는 생물이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렇게 생긴 생물이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시조새를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단계 생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시조새가 파충류나 조류 모두의 특성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다소 독특한 새일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틱타알릭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류의 특징도 가졌으면서 양서류의 특징도 모두 가진 신박한 동물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화석으로서가 아니라 현존하는 생물로 발견되었다면 ‘독특한 생물의 일종으로서 그 자체로서 고유하게, 완전한 형태로 진화되었다’라고 판결될 것입니다. 오리너구리나 망둥어 같은 묘한 녀석들처럼 말입니다. 화석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가 산 채로 포획되어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실러캔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화석으로 나타나는 형태학적 특성이 곧장 진화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해석이 달라지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 증거’로 간주되는 중간 단계 화석의 수가 극히 적다는 것도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약화시키는 요인입니다. 그런 화석은 앞서 언급한 시조새, 틱타알릭, 오돈토켈리스를 제외하면 초기 고래나 말의 화석, 초기 인류 화석 정도가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물론, ‘전이형’ 즉 중간 단계 화석이라고 주장되는 수만 점의 화석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 역시 진화론의 해석의 렌즈를 통과한 것들입니다. ‘전이형’이라는 용어 자체가 진화론적 입장을 전제하고 있는 데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전이형’으로 볼지 그 기준에 따라 범위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극히 제한적인 몇몇 화석으로 장구한 역사 전체를 그려보려는 시도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으로서 진화론을 반박하고 싶다면 적어도 진화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우리의 무지와 경솔함, 배타성을 더욱 강화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충분한 사실 확인과 고찰을 거치지 않고 ‘중간 단계 화석은 발견된 적이 없다’라며 핏대를 세우는 것은 그 주장의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상대로 하여금 더 이상 대화할 의지를 상실하게 합니다. 앞서 언급한 ‘원숭이는 왜 사람으로 진화하지 않는가?’의 문제 역시, 진화론의 관점에서는 질문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진화의 증거를 요구하려면 공통조상과 인간 사이 중간 단계 화석, 또는 공통조상과 원숭이 사이의 중간 단계 화석을 요구해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이 그 요구에 따라 제시한 중간 단계 화석을 객관적으로, 일관성 있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고 강화하는 의견만을 듣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맞다는 식의 접근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교회나 유관 기관에서 몇 번 들은 창조과학 강의를 바탕으로 다 안다는 듯 오만한 태도로 과학을 대하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의 발전을 위해 희생한 과학자들의 수고와 진정성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현대를 살며 자동차, 비행기, 스마트폰 등 예외 없이 과학의 산물을 그 혜택으로 누리고 있음에도 말입니다(저는 지금 창조과학 강의나 세미나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양질의 컨텐츠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랜 지구론은 진화론을 옹호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라는 식으로 과학자들의 양심을 의심하거나, 과학 방법론의 특성상 불가피한 일부 한계를 문제 삼아 연구 결과 전체를 매도하는 태도 역시 지양해야 합니다. 과거 무신론자였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회심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지질학자 이진용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 지질학자로서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지구 나이) 45억년을 잠정적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가 하나님을 부인하려고 일부러 거짓을 말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듯이.” 

“(크리스천들이 지질학의 ‘동위 원소 연대 측정법’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앞에 가는 차의 속도가 시속 100km라고 하자. 그런데 차의 속도를 재는 기기로 측정을 하였더니 시속 99.9km가 나왔다고 하면 그 기기를 틀렸다고 하는가? 어떤 일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균형 있게 살펴야지 어떤 사소한 것을 침소봉대하여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진화론이 과학인 것처럼 창조과학 역시 과학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창조주의 초자연적 개입은 논외로 하고 그 결과를 과학적 방법론으로 설명하는 모델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적 이론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해당 과학의 기준에 따라 채택할만한, 새로운 귀납적 증거가 등장하면 언제라도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과학은 진화론에 맞대응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서, 실상 피동적입니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진화론은 공격수, 창조론은 수비수입니다. 다시 말해, 진화론이 어떤 모종의 이유로 수정된다면 창조론 역시 그에 따라 수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것이지요. 창조과학은 진화론에 대응하여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고 아는 바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각기 종류대로, 7일만에, 말씀으로, 흙으로 빚어, 친히, 완전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조차 매우 겸손하게 받아야 합니다. 다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은 늘 경계해야 합니다.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인지 6천년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7일은 24시간의 날들인지, 장구한 세월인지 알 수 없습니다(이 글을 읽으시는 분의 교단 신학을 따르시면 됩니다). 성경은 우리 영혼과 삶의 구원을 위한 책이지,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창세기 1~3장의 창조 기사가 사실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주장처럼 설화나 신화에 불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입니다. 다만, 측량할 수 없이 크고 높으신 하나님께서 우주의 미물과도 같은 인간의 차원으로 기록한 말씀으로서 사실입니다. 우리 이해의 범위와 한계에 맞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구원을 위해 진리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보가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눈과 귀를 가리고, 밝히 드러난 사실마저 외면하는 어리석은 아이처럼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과학이 말하는 것과 그 학문의 성과를 존중하되, 그 자체로서 완벽할 수도 없고, 해석에 따라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분명한 진리가 깊이 우리의 뇌리에, 심령에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치 성경과 상충돼 보이는 세상 학문이나 현상 앞에서도 우리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과학의 결과가 성경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면 어떻습니까? 초자연적인 개입 자체를 처음부터 배제하고 출발하는 것이 과학이니 어쩌면 응당한 귀결 아닐까요? 한편으로, 자연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보편 은혜와 우리 삶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주신 성경(곧, 특별계시)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행하는 것 아닌가요? 그와 같은 괴리 때문에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리는 쪽보다 오히려 그런 괴리를 넘어, 못 이루실 계획이 없고 못 하실 일이 없으신 크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요컨대, 이와 같은 과학의 성질을 안다면 우리는, 과학과 상관없이 믿음을 견고히 지킬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상대를 존중하는 겸손, 과학과 믿음에 대한 메타인지를 바탕으로 창조과학을 진화론의 대안으로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각 교단의 전통과 신학적 유산의 범위 내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 위에서 말입니다.  


 _디모데성경연구원


첨부파일2026_5_20_과학과 믿음 그 사이에서.docx (29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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