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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확신 [제 5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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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6 11:38:02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바울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에 끝까지 충성할 수 있었다(고전 3:7, 고후 12:11). 바울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 “사도중에 가장 작은 자….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3:8)라고 불렀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4:7)고 썼다.

바울은 자신을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물을 담은 볼품없는 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 보물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고후 4:6) 지식이다. 바로 복음을 말한다. 바울은 복음을 위탁 받았고 그것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는 이 복음을 모든 보물 중에 가장 귀하며, 어떤 보물보다 그 가치가 뛰어난 혹은 모든 보물을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진흙으로 만든 볼품없는 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바울 자신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위탁하신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우리는 결국 흙으로 만들어진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놀라운 대조가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이 복음으로 죄인들에게 계시된 것이다. 복음이 연약하고 허물 많고 추한 메신저인 질그릇에 담겨 온 세상에 전해진다.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에 대하여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이 시원하지 않다”(고후 10:10)고 조롱했다. 바울은 그런 비난을 반박하고자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비난에 수치스러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을 진흙을 말려 만든 값싼 질그릇에 비유했다.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 없는, 쉽게 깨지고 언제든지 대체가능하며 평범하고 볼품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오직 만든 자와 주인의 처분에 그 용도가 결정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울은 과장해서 말한 것이 아니었다. 여타 사람들처럼 바울도 불완전한 존재였다.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바울이 스스로에 대해 말한 내용은 모든 목회자에게도 해당한다. A.T. 로버트슨(A.T. Robertson)의 말대로 하나님이 볼품없는 악기와 가냘픈 목소리를 사용하실 없다면 어떤 음악도 만들지 않으실 것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연약하고 허점이 있다.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믿음의 영웅은 모두 흙으로 만든 인간에 불과했다. 혹은 그보다 더 좋게 보아도(바울의 메타포를 그대로 적용하면) 전적으로 흙으로 만든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질그릇은 오직 그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실력 덕분에 유용성을 인정받는다. 그 자체로는 그대로 방치하면 돌처럼 굳어져 쓸모 없는 진흙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진흙으로 번역된 형용사는 오스트라키노스(ostrakinos), 진흙 그릇(terra cotta)에 해당하는 단어다. 그는 고급 도자기가 아니라 아무 장식도 하지 않은 볼품없고 평범한 질그릇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20절에서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말한다. 질그릇은 집안의 집기 중 가장 저렴하고 흔한 그릇이다. 쉽게 처분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귀하게, 때로는 천하게 매우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바울 시대에 왕이나 부자들은 보통 금을 비롯한 귀중품들을 단순한 질그릇에 보관하곤 했다. 이렇게 귀중품을 담은 질그릇은 땅에 묻어 안전하게 보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그릇은 실제로는 집안의 잡다한 물품들을 담는 것처럼 일상적인 용도로 쓰기에 더 적절했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가톨릭에서 상인으로 숭앙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마르틴 루터를 지적하며 사용한 언어는 너무나 상스러워서 여기에 그대로 소개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는 마르틴 루터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보잘것없는 탁발승, 비듬 같은 놈, 해충 같은 익살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루터를 요강에 비유하는 식으로 모욕하기를 즐겼다.

토머스 모어는 루터를 술주정뱅이 신부라고 거듭 조롱했다. 루터는 기분이 좋을 때면 (바울처럼) 그 사실을 흔쾌히 인정하곤 했다. 그는 여러 면에서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고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머쓱해질 정도로 루터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상기시키는 말을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이 흙으로 만든 그릇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는 모두 흙에 속한 자들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이사야 역시 비슷하게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6:5)라고 말했다. 이사야의 이 고백은 바울의 유명한 탄식을 떠올리게 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고린도전서 413절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그는 쓰레기통을 비우면 바닥에 남는 냄새나고 더러운 찌꺼기를 가리키는 두 헬라어 명사를 사용한다. 바울이 자신을 과대 포장하거나 미화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영광스러운 복음의 능력은 원래 우리 소유가 아니다. 우리는 이 보배로운 보물을 담는 질그릇일 뿐이다. 우리는 연약하다. 평범하고 볼품 없으며, 쉽게 부서지고, 천한 존재다. 그러나 우리 연약함 때문에 복음의 능력이 축소되지는 않는다.이 복음은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

 

 

[이 글은 존 맥아더의 신간, 목회흔들림 없이 신실하게(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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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2020-11-17_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확신.docx (16.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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