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을 매우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지성과 감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뻐하며 그것을 선택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됩니다. 에덴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굳이 동산 중앙에 두신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하심으로써,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상대에게 사랑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이며 그렇게 해서 얻는 사랑 역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피조물의 한 종류로서가 아니라 귀한 인격으로 대하시기에 이러한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 우리와 참 사랑을 나누며 교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발적 선택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고 존중하시는지, 죽음의 위험을 허용하기까지 그리하십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선택하지 않는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들어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던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과 끊어져 모든 은혜의 공급을 상실하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과의 단절, 이웃과의 단절, 모든 피조물과의 단절로 인해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이토록 가혹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분명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어린 자녀에게 날이 시퍼렇게 벼려진 칼을 주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칼을 잘못 다루었을 때의 결과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에게 부모는, 행여 칼을 잘못 사용하여 맞이할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그 ‘리스크’를 감수하고 칼을 맡깁니다. 리스크보다 칼을 잘 활용해서 얻을 유익이 더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 자녀가 칼이라는 도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충만히 누리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지극히 귀히 여기시고 존중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복된 선택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마땅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복이시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과 복, 사망과 저주 사이에서 생명과 복을 택할 때 복이요,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은혜의 공급이 회복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3)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기 매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지도 못하는 데다 설령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자 하는 의욕이 당장 넘친다 하더라도 이내 사그라들기 일쑤입니다. ‘태생적 죄인’이라는 우리의 한계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더 이상 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의 모든 죄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죄를 말갛게 씻으셨습니다. 흰 눈처럼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육신에는 여전히 죄의 흔적, 죄성이 남아있습니다. 그 태생적인 죄성, 죄로 오염된 흔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죄의 악순환이 이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눈앞에서 보고도 하나님을 떠나는 데에는 급속히 빨랐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숭배했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악평했으며, 불평과 원망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성하고 정복한 땅 가나안에서도 역시, 이스라엘은 범죄, 징계, 회개, 구원, 태평함의 순환을 반복했습니다. 왕이 다스리던 때에도,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권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다 못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셨던 때에도 여전히 그들은 죄의 악순환을 끊지 못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준행하면 생명을 얻을 율법을 주시며 생명길을 택하라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생명 대신 사망을 선택했습니다. 사망에 끌려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한계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온전한 대제사장, 흠 없는 예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영단번에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같은 모양으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남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할 수 있는 길, 사망과 저주에 끌려가는 대신 생명과 복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영적 차원의 사실을 실체로 이루시는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새로운 살 길, 열린 길로 가게 하는 구체적, 사실적 실체가 교회입니다. 교회 됨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교회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순종함으로 머리이신 예수님께 순종합니다. 순종함으로 교회의 손과 발이 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나를 예수님으로 살게 하신다”는 하늘의 일이 땅의 일이 됩니다. 보이는 영적 권위자, 지체들을 섬기고 사랑하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랄 때, 하나님의 뜻이 자연스럽게 분별이 되고,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믿지 않던 시절, 말 못하는 우상이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교회가 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끌려가듯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양과 염소를 나누듯 주님의 백성들을 나누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때, 양 편에 선 자들이나 염소 편에 선 자들이나 그들의 동일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의 행동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행했거나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는 것이지요. 교회 됨으로 ‘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복을 사모하십시오. 그 시작은 교회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복된 선택을 시작으로 성령 하나님께 자연스럽게 이끌리시기를 바랍니다. 되는 선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 딸 되시기를 바랍니다.
_디모데성경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