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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위에 선 사람 [제540호]
   조회수 497
2019-10-08 17:12:47



 





단 위에 선 사람

 

바울은 말년에도 여전히 앞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는 심판자인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이 ‘그날’(딤후 4:8)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언젠가 마르틴 루터는 자기 달력에는 오직 이틀 밖에 없다고 말했다. 즉, 오늘과 ‘그날’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날이란 무엇일까? 그날에 대한 것 가운데 우리에게 중요하고 위압적인 것은 무엇일까? 만일 그것이 심판자와의 약속이라면 왜 모든 사람이 그것을 그토록 고대하는 것일까?

돌로 뒤덮인 그리스 남부의 들판, 그곳은 옛 고린도 시의 폐허가 있는 곳으로 비바람에 쓸린 대리석 조각들과 부러진 기둥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그 위로는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다. 시장이 있던 곳의 중앙 광장에 들어가 보면 주위보다 높게 서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 대리석 단이 있다.

거기에 서 보자.

그곳은 바로 수세기 전에 사도 바울이 섰던 곳이다. 그때 그는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부추긴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었다(행 18:13). 학자들은 폐허만 남은 옛 고린도의 터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이 높은 대리석 연단이 총독 갈리오가 바울의 사건을 심리하기 위해 앉았던 곳이라고 믿고 있다. 그때 그는 바울에 대해 쏟아진 모든 고소를 기각했다.

그 높은 연단은 그리스어로 ‘베마(bema)’라고 하며 심판석을 뜻한다. 당시에는 운동 경기의 심판관도 베마에 앉았다. 예수님 당시에 베마는 권위와 정의와 보상을 상징했다.

고린도에서 베마에 선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바울은 그곳에 있는 성도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서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베마 앞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10)

바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라고 말씀하시면서 시사하신 보응과 보상의 날에 대해 쓰고 있었다.

바울이 갖고 있었던 열정은 대부분 자기 삶의 결과가 완벽한 정의로 평가될 것이며 자신이 반드시 보상받으리라는 것을 아는 데서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베마에서의 완벽한 정의는 엄격한 법정이나 정체불명의 어떤 법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완벽한 사랑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당신이 어떤 일에 직면했든지 간에, 당시의 삶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인간 됨을 체험하시고 우리의 슬픔을 지고 가신 예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선사하시기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

“아버지께서 …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한복음 5:22).

예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연민과 헌신의 깊이와 넓이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된 종아!”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오늘 베마를 이토록 갈망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곳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보게 될 예수님 때문이다. 그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매사에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큰 희망으로 오늘 하루를 살 수 있다.







첨부파일(2019.10.08) 단 위에 선 사람.hwp (14.5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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