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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 [제507호]
   조회수 562
2019-09-18 14:04:25

등록일 : 2019/02/19 11:20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

밥 쇼그린과 제럴드 로비슨은 『강아지 성도 고양이 신자(Cat & Dog Theology) 』라는 책에서 강아지 성도를 “당신이 나를 귀여워해 주고, 먹여 주며, 보살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보니 당신은 하나님이 분명해요!”라는 고백을 하는 자로 묘사한다. 고양이 신자에 대해서는 “당신이 나를 귀여워해 주고, 먹여 주며, 보살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보니 내가 하나님인 것이 분명하군요!”라고 설명한다. 당신은 강아지 성도인가? 아니면 고양이 신자인가? 
그리스도인은 자기 신분을 망각하면 안 된다. 자기 신분이나 정체성을 망각하는 순간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힌 불균형의 삶에 빠지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서로 다투고 분쟁하며 자기의 공적(공로)을 과시하려는 미성숙함이 가득한 공동체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나님이 칭찬할 만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자기 신분을 분명히 알고 산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린도전서 4:1)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 여러분은 사도인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라는 의미이다. 일꾼이란 누구인가? 공적 위치에 있는 자를 돕는 사람이다. 조력자, 협력자, 수행원을 의미한다. 일꾼은 주인이 아니다. 일꾼 위에는 더 높은 권위가 있는 주인이 있기에 일꾼은 그 주인의 명령에 따르고 순종한다. 권위자가 아닌 권위자를 돕는 자이다. 주인이 아니라 일꾼이기에 스스로 자기를 향해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맡은 사람이란 관리자(Stewards)를 의미한다. 살림의 전반적인 운영을 감독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을 ‘맡은 자’라 표현한다. 무엇을 맡았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비밀이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골 1:27),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골 2:2),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엡 6:19).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일꾼을 주인으로 착각한다.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일꾼이요 청지기로 생각하지 않는다. 지도자들이 심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고전 3:7~8)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 종을 주인의 자리에 올려놓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대립하며 싸운다. 자기가 원하는 종을 주인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기도 주인 행세하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신분을 분명히 알고 결코 주인 행세를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삶에 대하여 스스로 주인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을 종으로, 자신을 마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하지 말아야 한다.
 
2. 일꾼으로서 무엇을 요구받는지 알고 산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린도전서 4:2)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우선순위와 당면 과제는 충성이다. 충성이란 “믿을 만한,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신실한”이라는 의미이다. 충성이란 맡겨진 것에 자기 전부를 쏟는 것이며 마음을 바꾸지 않고 섬김의 대상을 향해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충성스럽지도 않은 일꾼의 반대말은 “악하고 게으른 종”(마 25:26)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불러 주신 주인 그리고 맡겨진 일에 대해 충성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일꾼(민 12:7)이었다. 얼마나 충성스럽고 믿을 만했는지 하나님은 그와 은밀하게 대화하시지 않으시고 명백히 얼굴을 대면하시며 말씀하셨다.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아브라함도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느헤미야 9:8에는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라고 밝힌다. 시편 101:6에서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모세와 아브라함과 같이 충성스러운 사람과 함께하셨다.
일꾼은 주인의 관심사를 위하여 시간, 재능, 에너지 등을 바치고 사용한다. 맡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 화려함, 사람들의 평가나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보다 주인과 위탁받은 것에 대한 신실함, 성실함, 정직함, 충성스러움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늘 그분과 그분이 맡긴 일에 한결같이 신실한 자가 되어야 한다.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은 늘 한결같이 불러 주신 주님과 맡겨진 일에 충성한다.

3.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존중하며 산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전서 4:5)

당을 짓고 파벌 싸움을 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기에 빠른 공동체였다. 판단이란 객관적 평가를 넘어 상대방을 재판하듯 결정하고 판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법관이 되어 결론을 내는 것이다. 왜 파벌이 생기며 분열이 되는가?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서로 판단하고 정죄한 후 그 판단의 결과를 기초로 끼리끼리 뭉치기 때문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최종적인 판단자가 주님이라는 것을 잊기 때문이다. 일부 고린도 교회 성도에게서 이러한 판단을 받고 있는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람, 혹은 세상 법정에서 판단을 받더라도 결코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다고 밝힌다.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말한다.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 밝힌다. 그렇다고 이것이 주님 앞에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고백하면서 말이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당당한 바울 그러나 그것을 의로 여기지 않는 겸손함을 드러내는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주께서 최종 판단자이심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역에 대한 최종 결정자가 아니다. 우리 또한 누군가를 향한 최종 결정자가 아니다. 우리는 최후의 심판자 앞에 서게 될 자들이지 최후의 심판을 행하는 자가 아니다. 마지막 심판자는 주님이시다. 주님만이 우리의 삶에 은밀히 존재하는 어둠의 일을 아신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옳지 않는 숨은 동기도 아신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이야 말로 최종 결정자로서 자격이 있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리 앞서서 섣불리 판단하지 마라. 주님이 어둠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것을 드러내시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때 우리의 오해와 편견을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 공동체 안의 지체, 지도자, 사역, 우리와 관계를 맺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판단은 도리어 우리 스스로와 공동체를 불행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모두가 힘겨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부름을 받았다.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분명한 자기 인식 속에 주인과 맡겨진 일에 대해 늘 한결같이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완전하신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마지막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우레와 같은 칭찬의 소리가 분명히 울려 퍼질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강아지 성도로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자.
첨부파일(2019.02.19)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docx (18.4KB)507.jpg (689.5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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