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대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 교수와 앵거스 디튼 교수는 갤럽이 2008~2009년 실시한 미국인 45만 명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하여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 회보에 발표했다. 미국인들의 경우 연간 소득 7만 5천 달러까지는 소득이 늘어날수록 매일의 행복감이 커지나 그 이상은 행복감에 차이가 없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삶에 대한 만족도는 소득이 높을수록 커지는 것으로 조사됐지만 디튼 교수는 연봉 10만 달러를 받는 사람이 연봉이 20만 달러인 자리로 옮길 경우 더 큰 성취감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반드시 매일매일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님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끼는가? 주님은 팔복을 통하여 행복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 당시 그분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행복의 내용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l 바리새인 : 행복을 전통과 율법주의에서 찾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에 집착하고 조상의 전통을 순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l 사두개인 : 행복을 현재, 즉 모더니즘과 자유주의에서 찾고자 했다. 옛것을 버리고 현대식으로 업데이트된 문화와 종교를 신봉했다.
l 엣세네파 :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금욕을 주장하며 광야로 자신을 내 몰았다.
l 셀롯당(열심당) : 혁명을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로마의 정치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행복으로 알았다.
이러한 특정 계파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며 인간의 행복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난함을 직시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다. ‘가난하다’는 단어는 의미에서 차이를 보여 주는 두 종류의 단어가 있다. 구걸해야 하는 정도의 심각한 가난을 의미하는 ‘프토카스’와 일반적 의미의 가난, 즉 그저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의 가난을 의미하는 ‘페나스’라는 단어이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에서 ‘가난’이란 의미를 ‘프토카스’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하셨다.
구약에서 등장하는 ‘가난’이란 물질적인 궁핍함을 의미한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만이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에 가난함은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포함하게 됨으로써 영적인 의미를 자연스럽게 지니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난의 의미를 채용하시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파산한 자, 하나님께 구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자임을 인식하는 삶이 가장 복 있는 삶임을 가르쳐 주고 계시다. 물질적 가난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간절해지는 것처럼 뛰어넘을 수 없는 우리의 존재적 한계에 대하여, 영적으로 파탄된 우리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며 항복하는 삶이 진정한 복임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것이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주장하는 세속적 가치와는 정반대이다.
누가복음 18:9~14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복을 누리며 하나님께 인정된 삶을 누리는 자가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있는 세리와 현세의 복을 누리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며 주장하는 바리새인이다.
세리는 성전에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멀리 서 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며 자신이 죄인 됨을 인지하며 자복한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서서 따로 기도하되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며 자기를 자랑하며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했다. 자신이 세리에 대하여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를 의롭다 하셨는가? 세리였다. 그는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세리는 경제적으로 결코 가난한 자가 아니다. 결코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자였지만 자신의 영적인 가난함, 영적으로 파산 상태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도 세리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다. 오히려 세리보다 더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그는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시 40:17)라고 간구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느냐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성취 여부로 행복을 추구하거나 느끼지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로 행복의 척도가 됨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으로 행복을 측정해야 하는가? 다른 데 있지 않다. 지금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께 항복한, 가난한 자로 서 있는가로 측정할 수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파산 상태의 절박함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분께 소망을 두도록 한다. 그리고 이렇게 절박한 자들을 향하여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겠다”(사 66:2b)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가난한 삶에 함께하신다. 이것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복된 삶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가난한 자, 복 받은 자인가? 당신의 행복 지수를 측정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