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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와 은혜 [제605호]
   조회수 399
2021-02-01 21:51:49



사람들이 무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낄 때, 그 비난을 처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잘 못된 행동 그 자체에 비난을 돌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이 실패한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면 그들은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안도감을 얻기 위해 용서를 필요로 할 것이다. 반면 자신의 성격이나 능력의 실패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치유를 위한 은혜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수치심과 죄책감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를 느낄 수 있다. 


수치심은 인간의 죄의 본성을 감안한다면 타당한 감정이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구속을 베푸시기 원하는 죄의 영역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이 점검되지 않고 우리 가슴속에서 자라게 되면, 수치는 처절한 고통과 심신 쇠약을 초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고후 7:10, 새번역)지나친 수치심은 자책감과 영적, 감정적 죽음으로 연결된다. 수치심으로 가득 찬 사람은 내가 그렇게 어리석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고 거듭 절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아니면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 지르면서 우리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당신은 소경처럼 뵈는 게 없고 또 게을러 빠져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하게 한 거야. 당신은 이제껏 내가 만난 최악의 상대야! 

 

실패의 고통과 치욕은 트라우마와 함께 따라오는 곤경으로 배가 되면서 우리를 매우 격심한 상태에 이르게 한다. 수치심은 그와 관련된 경험을 그냥 털고 일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계속 와 닿는 것이다. 수치심은 우리 개인적인 자존감을 공격하기 때문에 매우 강력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심신을 약화시킬 수 있다.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끼게 되면,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거부하게 된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 자연적으로 뒤로 물러나 숨는 경향이 있고, 결국 하나님에게서도 숨게 된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숨었다. 그러나 그들이 벗은 것은, 그 모습으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들이 범죄하기 전에도 그들을 벗은 상태로 알고 계셨던 것처럼, 우리의 성품속에 있는 실패의 요소들을 미리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찾으신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것은 흠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고안하신 디자인의 일부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족, 친구 그리고 동료보다도 더 우리 인간성의 실패를 잘 아신다. 

 

부끄러움의 치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죄를 지었고, 하나님은 그 죄의 결과를 그들에게 부과하셨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이 벌거벗은 것에 수치를 느끼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가리도록 옷을 만들어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죄악들을 아시고 우리도 역시 가리개로 덮어 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만큼 우리의 모습 이대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가치 있게 여기신다(롬 3:23~24, 5:6~8).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빌 1:6) 계속 변화시키시고 온전케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분은 천국의 건너편에 있는 우리가 결코 완전해지지 않을 것을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분은 우리의 벗은 상태를 덮어주시면서 우리를 계속 사랑하시고, 우리의 삶에서 일하시는 것을 쉬지 않으신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우리의 실패가 비극을 불러왔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 치유의 근원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 속에 파묻을 때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된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 나무 아래 웅크리고 있던 것과 같이, 숨으려고 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망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막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또한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마음 문을 활짝 여는 것은 치유를 위한 가장 좋은 방안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요일 3-4장)우리는 다르 사람들의 실패가 눈에 보일 때에도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골 3:12~17). 하나님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은혜로 채워지도록 수치심의 문제를 던져 주셨다. 은혜는 누구를 행동으로 용서하는 것과는 다르다. 은혜로 충만한 케어 제공자는 깨어진 상황을 극복하는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수치심 속에 있는 사람과 겸비하게 동행하고 수용함으로 긍휼과 사랑을 나눈다. 은혜로 채워진 공동체는 치유와 더불어 돌봄과 자존감을 경험하도록 돕는다. 수치심으로 인한 도피로 연약해지는 현상과는 대조적으로, 회복력은 은혜 충만한 관계를 통해 강화된다. 은혜 열매를 얻으려면 숨지 말아야 한다. 대신 하나님과 은혜 충만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만약 우리 자신에게 자격이 없다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는 은혜는 혼란에 빠지고, 매우 피상적인 경험으로 나고 말 것이다. 즉 은혜가 하찮게 여겨지거나 무시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자신이 실제로는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다른 사람들이 몰라서 그런 호의를 베푼다고 믿고는, 사랑으로 용납하는 치유 능력을 막음으로 은혜를 묵살한다. 수치심은 사람들을 파묻거나 함정에 빠뜨린다. 모든 종류의 실패와 망가짐으로 점철된 우리 인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베푸는 사랑과 존중에 대해 기꺼이 우리 가슴을 열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받을 만한 가치가 없지만 그것이 바로 은혜의 핵심이다. 하나님과 그분이 변화시킨 은혜 충만한 사람들은 은혜를 값없이 베푼다(엡 2:8-9). 사람들이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을 그렇게 어려워하는 이유는, 먼저 자격 없이 은혜를 누려야 할 필요를 인정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없이 무력해지고 겸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트라우마가 일으킬 수 있는 수치심을 포함해 인간 모든 부끄러움을 치료할 수 있는 영적 자원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공급하셨다. 

 

[위의 글은 로케 쉐퍼 찰스 쉐퍼, 고통과 은혜(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 요약한 글입니다] 

첨부파일2021-02-02_수치와 은혜.docx (17.2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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