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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것과 낡은 것의 혼합 [제 6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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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3 08:24:49



새 것과 낡은 것의 혼합 

기독교는 왜 비신자들에게 불가항력을 잃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줄곧 항거했어야 할 것들에 항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교회를 재미있는 곳으로 만들려 애써왔으나 실제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은 더 드물어졌다. 게다가 교회 바깥의 대다수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계속 우호적이지만, 그분의 몸인 교회를 보는 눈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문제가 있다. 이런 현상은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네 몸 주위에 있기는 싫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대대로 존재했으나 지금까지 별로 중시되지 않는 그 사실은 바로 현대의 주류 기독교가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함 때문에 기독교는 광장에서 변증의 여지없이 무력하다. 오늘날 도처에 널린 포퓰리즘 버전의 문화적 기독교는 두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는데, 그것이 우리 신앙의 허수아비 버전을 만들어낸다. 안타깝게도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이 허수아비가 실제 신앙으로 인정받는다.

앞으로 나아갈 길

먼 옛날에 ’(The Way)라 불리던 유대인 집단의 구성원들은 모든 난관을 뚫고 로마 제국 안팎에서 이교 세계의 주목을 끌었고 결국은 헌신을 이끌어냈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현재 하고 있는(어차피 별로 통하지도 않는) 일의 태반을 멈추고, 당대의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신자들에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1세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 기독교가 공기로 전염되는 병처럼 퍼져 나갔다. 1-2세기 신자들의 신앙은 무언가 달라서 매력과 설득력이 있었고 불가항력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예수 운동은 왜 1세기에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이를 멸하려던 숱한 정치적, 종교적 공작까지도 끝내 이겨낼 수 있었을까? 유대교 성전과 로마 제국 사이에 끼여 있던 예수 운동은 창시자와 함께 소멸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로마와 예루살렘은 교회를 공통분모로 하나가 되었다. 2천 년 전에는 십자가가 제국의 권력을 상징했으나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개선이 아니라 새것이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새것을 선보이셨다. 그분은 낡은 것의 새로운 버전이나 기존 것의 최신판을 제시하려고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더 좋아지게 하려고 오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새것을 도입하시려고 아버지께 보냄 받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불가항력적인 분이 되신 것은 새로운 메시지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 자신 때문이다. 그분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좋아했고, 그분도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들을 좋아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마땅히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려져야 한다. 우리가 못된 행동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비신자들을 초대하여 동참하게 할 때, 그들도 그 초대에 흥미를 느끼다 못해 응하고 싶어져야 한다.

예수 운동

예수님은 새로운 버전의 유대교를 들여오신 거시 아니다. 예수 운동은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만인과 만국을 위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새 언약, 새 계명, 새 운동을 세우러 오셨다. 그분의 새 운동은 국제적이다. 새 언약은 고대 세계의 모든 종교에 배어든 행위와 제사 중심의 제도를 성취하고 대체한다.

1세기 교회는 제국과 성전의 기존 시류를 새 신앙에 받아들여 통합해야 한다는 압력을 이겨냈다. 이는 교회가 보기에 그만큼 교회와 그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증거다. 3백 년 가까이 교회는 낡은 방식을 수용하여 통합해야 한다는 압력을 차단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Contantinus) 대제가 회심하고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면서 교회는 박해 받던 소수에서 권력을 쥔 다수로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낡은 방식에 맞서던 항거는 거의 순식간에 수용과 동화와 통합으로 대체되었다.

개혁

16세기로 훌쩍 넘어가보면 개혁가들은 제국과 성전의 가치관, 문화, 풍조를 교회에서 몰아내고자 일생을 바쳤고 때로 목숨까지 잃었다. 개신교의 탄생은 많은 이에게 예수님이 들여놓으신 새것의 소생을 의미했다. 그러나 싸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 포도주를 제국과 성전의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려는 유혹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다. 불완전하나마 개혁가들은 어느 세대에나 필요하다. 예수님이 도입하신 새것 속에 낡은 방식이 스며드는 흔적이 보일 때마다 사도 바울처럼 노기충전해질 사람들이 필요하다. 확신컨대 현대 교회가 이토록 불가항력을 잃은 이유는 새것에 낡은 것을 섞고 혼합하여 동화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정보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우리 신앙 변증 될 수 없는 이유도 새것에 낙을 것을 섞고 혼합하여 동화하기 때문이다. 2천 년 전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그렇게 했다가는 결국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된다.

[위의 글은 도서출판 디모데의 신간 앤디 스탠리, 교회를 살리는 불가항력의 복음 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첨부파일2021-02-23_새 것과 낡은 것의 혼합.docx (16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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