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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기뻐하라 [제 693호]
   조회수 382
2022-12-20 12:16:51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있느니” 

                                                                                                                                                              (빌립보서 4:11-13)

중요한 세 단어에 주목하면 빌립보서 413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모든이란 단어가 있다. 잘 보면 이 단어는 양쪽 구절에 다 나온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

베드로전서 57절에서 이 단어를 접한 뒤로 나는 성경의 모든이나 라는 말이 좋았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문법상 이 단어가 필요 없을 때도 많으며,그 말이 없더라도 우리는 이런 구절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있기에 본문의 위력이 배가되고 그 함축된 의미도 무한히 확장된다.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실 만큼 작은 일도 없고, 그분이 지켜주지 못하실 만큼 큰일도 없다.

성경에 모든이란 단어가 늘 절대적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다. 구체적 의미는 항상 문맥에서 결정되며, 어떤 때는 본문 자체에 그 의미가 한정되어 있다. 예컨대 여기 빌립보서 413절에 바울은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역본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정말 무제한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말하지 않았다.

l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모세처럼 지팡이를 들어 로마 제국에 온갖 끔찍한 재앙을 내리겠다.

l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삼손처럼 맨손으로 이 감옥을 무너뜨리겠다.

l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엘리야처럼 기도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겠다.

l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공중으로 떠올라 구름 속으로 사라지겠다.


바울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지만, 위에 말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본문의 문맥상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한 말은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속사람에 능력을 불어넣어 주시기에 나는 어디든지 그분이 두신 자리에서 기뻐하며 최악의 시기도 최대한 선용할 수 있다. 자족에 대한 내 시각을 그분이 굳혀주신다. 그분을 힘입어 나는 로마의 옥에 갇혀서도 건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둘째는 배우다라는 단어다. 이 말도 본문에 두 번 나온다. 바울이 강조할 목적으로 반복해서 썼다. “11…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2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우리에게 그렇듯 바울에게도 이런 자족의 태도가 직관은 아니었다. 힘든 상황을 받아들인 것이 그의 천성이 아니었고, 한계 상황에서 주님을 신뢰한 것이 그의 본능도 아니었다. 이는 배워서 습득한 결과였다. 그런 마음가짐과 시각에 이르기까지 시간, 영적 성숙, 정서적 성장, 하나님의 지도가 필요했다.

자전거를 타거나 직장에서 특수 기술을 수행하거나 이탈리아 음식을 요리하려면 배움이 필요하듯이, 영적 차원의 기능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삶을 헤쳐 나가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


셋째 단어는 자족하다인데 역시 두 번 등장한다. “11…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풍부에 처할(자족할, NIV)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니”.

일부 영역본에 나오는 만족하다라는 표현은 그나마 최선이지만 헬라어의 원뜻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바울은 만족스럽거나 양에 찼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스스로 족하게 여기는 태도를 뜻한다. 삶의 기쁨과 활기, 목적과 의지가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왕궁에 살든 감옥에 살든 그는 똑 같은 기쁨과 목적의식을 품기로 했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뜻과 지혜로 그의 시각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긍정적 태도를 유지하는 능력은 우리의 타고난 성향이나 본능적 성격이 아니다. 적극적 사고나 낙천적 구호의 문제도 아니다. 이런 자족은 주님이 연단해주시는 특유의 성숙에서 비롯하며, 그분이 초자연적 힘을 주시기에 가능하다.


우리는 질병 없이 살고, 마음껏 돌아다니며,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이웃과의 갈등을 피하며, 큰 문제를 비켜 갈 수 있다. 반대로 온갖 고초나 속박에 시달릴 때도 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강건한 자세를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어디서나 무엇이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나를 향한 그분의 뜻이 무엇이든, 그분이 내게 무엇을 보내고 나를 어디로 보내시든, 나를 불러 무엇을 하게 하시든, 그것이 그분의 뜻이고 길이라면 그분은 내게 그만한 힘을 주신다.


[위의 글은 로버트 모건, 오늘 내게 필요한 힘(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첨부파일2022-12-20_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기뻐하라.docx (17.8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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