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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적 경청인가, 치유적 경청인가? [제 698호]
   조회수 129
2023-01-30 22:26:13


 

 

대학원에서 만난 많은 교수들은 내가 만난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 속한다. 그들은 진심으로 친절하고 온유했으며 사랑으로 모든 학생을 받아주었다. 그들은 내가 성경을 가장 중요한 지침서로 생각하고 구세주를 믿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또한 나에게 다른 사람들의 지침과 그들의 종교를 선택하는 것도 인정하라고 가르쳤다.

 

나는 그들로부터 경청하는 사람으로 섬길 상처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평안을 찾도록 도울 있다고 배웠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죄에 대해 언급하든지 언급하지 않든지, 그들을 편안하게 있다고 배웠다. 이런 경청 과정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필요 없다고 배웠다. 세상에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도록 도울 있는 자원들이 충분하다고 배웠다.

 

훌륭한 교수들은 인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우주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진화한다고 믿었다. 또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경건하지는 못한 사람들이었다.

 

성경은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1)라고 말한다. 말씀을 상반되는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불경건한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의미다.

 

비록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지만 나는 인본주의자들의 제자였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인본주의자들처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죄를 직면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쉬운 길을 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을 고마워했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추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4:27).

 

세상의 평안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같지 않지만 따로 떼어서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이런 경청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그를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하지 못한다. 안심하게 할지는 모르지만 복을 받게 하지는 못한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성령께 나아갈 있는 특권을 주셨다는 복된 소식을 가르친다.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서 귀한 진리를 분리시킨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속에서 편하게 살도록 돕는 것은 매우 무자비한 행동이다. 죄가 문제라면 인간적인 해결책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있다. 문제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도우심을 자신의 문제에 적용시킴으로써 본질적인 도움을 받는지 알아야 한다.

 

인본주의자들은 좋은 사람들이지만, 우리 문제를 도울 있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다.

 

유익한 경청에는 가지가 있다. 공감적 경청과 치유적 경청이다. 공감적 경청에서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은 상담가는 내담자로 하여금 그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마음속에서 모두 털어내도록 돕는다.

 

치유적 경청에서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은 상담가는,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들을 털어내도록 돕고 성경적 지식을 근거로 문제를 진단하도록 돕는다. 털어놓은 문제 중에서 하나라도 죄의 문제로 진단되면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사함과 정결케 함과 능력을 구해야 한다. 이렇게 공감하는 경청의 목적은 치유적 경청의 목적과 크게 다르다.

 

 

 

[위의 글은 헨리 블랙커비, 『왜 목사가 되려 하는가 어떻게 목회를 하려 하는가』(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첨부파일2023-01-31_공감적 경청인가 치유적 경청인가.docx (15.9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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