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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선물 [제 704호]
   조회수 114
2023-03-13 22:28:18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러 오셨다. 기본적인 문제를 다시 기본으로 되돌리러 오셨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한다는 부수적인 활동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한다는 기본적인 활동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기본이 되면 부수적인 활동은 사랑의 수고, 기쁘고 지기 '쉬운' 짐이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11:28-30)

 

사복음서 저자 중 마태가 누구보다도 이 역설을 잘 이해한 것 같다. 사실, 예수님의 이 특별한 초대를 기록한 사람은 마태뿐이다. 아마도 그가 죄의 멍에, 특히 창녀들과 세리들, 스트립쇼 하는 여자들과 마약 밀매자들, 탈주자들, 중독자들, 기타 공공연하게 경멸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지고 사는 무거운 짐을 기억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은밀한 수치의 무게 외에도 이런 사람들은 공개적인 수치의 멍에를 지고 살아간다.

 

마태는 또, 처절한 밑바닥 인생들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들은 착한 사람들이 자기네를 못마땅해한다는 사실을 자꾸 확인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공허하고 무표정한 눈빛 뒤에 자신의 수치를 감추며,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자신의 동지 - - 를 심판할 테면 해보라고 세상에 맞선다. 이들이 의인들을 바라보며 도움을 구하려 해도 잘 차려입은 교회 사람들은 거룩한 척 잘나 보일 뿐이고, 그들이 믿는다는 종교에는 이 짐을 저 짐으로 바꿔준다는 약속밖에 없다.

 

의인들의 도덕성에 흠씬 두들겨 맞은 사람들의 단단한 정서적 갑옷, 그것을 뚫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그러나 유일하게 완전한 의인이신 예수님은 그 비결을 아셨다. 굳어버리니 정서의 칼집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은혜뿐이라는 사실을 그분은 아셨다.

 

은혜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기 원하는 훌륭한 성품 거의 모두가 은혜에 들어 있다. 은혜는 겸손한 사람이 수치당한 사람에게 건네는 선물이다. 은혜는 죄가 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일부러 그 너머를 본다. 은혜는 아무리 더러운 때나 딱딱한 껍질 때문에 세상과 분리된 사람이라 해도, 그를 마땅히 친절을 베풀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은혜는 전혀 논리에 맞지 않을 때 베푸는 따뜻한 자비의 선물이다.

 

구약의 히브리어는 은혜를 헤세드(hessed)로 이해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불충함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이 넘치도록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 단어다. 그리스어는 은혜, 즉 카리스(charis)'즐거움, 기쁨, 행복,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은혜는 은혜를 낳는다. 예수님에게서 이 성품이 흘러넘쳤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그분의 초대는 사회의 가장 볼품없는 사람들은 끌어들인 반면, 가장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밀어냈다. 이 배척당한 랍비에게 죽도록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따른 것도 그분의 은혜 덕이었다. 그분은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변호하셨다.

 

마을의 도덕적 밑바닥 인생들이 레위와 그의 새 스승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책망하고 나섰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5:30).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는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고수해야 할 도덕적 신분제와 옹호해야 할 정치적 영역이 있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기뻐하시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들은 해본 적이 없다.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의 지적처럼, "역설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방해하는 것은 까다로운 도덕과 사이비 경건이다. 회개하기 가장 어려운 이들은 창녀와 세리가 아니다. 자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독실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집 밖에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5:31-31).

 

레위는 예수님이 제자로 두기 원하시는 바로 그런 죄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죄라는 죽을병에 걸린 것과 그것을 치유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인정할 만큼 정직한 사람이었다. 레위의 도덕적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은 그를 열두 제자의 하나로 부르시고 새 이름을 주셨다. 그때부터 과거 로마의 부역자는 마태, '하나님의 선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위의 글은 찰스 스윈돌, 『예수, 가장 위대한 생애』(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첨부파일2023-03-14_겸손의 선물.docx (17.1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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