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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설교[제485호]
   조회수 275
2019-09-18 12:18:08

등록일 : 2018/08/07 09:33

 

보이는 설교

 
  요즈음은 보이는 라디오가 유행하고 있다. DJ이나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소리로만 들려주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어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앉아 방송을 진행하는 진행자의 모습을 이제는 영상으로도 볼 수 있게 서비스를 하고 있다. 소리의 청취를 넘어 이제는 영상으로 시청하는 라디오로 거듭나고 있다. 라디오 프로가 왜 ‘보이는 라디오’를 추구하고 있을까? 이는 단순히 듣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이 훨씬 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보이는 설교가 되었으면 한다. 물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를 눈으로 보며 메시지를 듣고 있기에 보이는 설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영상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밝히는 보이는 설교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통해 메시지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눈은 설교자를 보고, 귀로는 메시지를 듣지만, 생각과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모든 감각을 사용함으로 메시지를 들으며 생각과 마음이 그 메시지를 상상하고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설교의 탁월한 모델이시다.

  위대한 설교자이신 예수님은 비유로 청중들을 매료시키셨다. 예수님의 풍부한 화법은 청중의 마음을 일깨우고 생생한 묘사를 통해 사람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하심과 동시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셨다. 예수님은 매우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시려고 감동적인 비유를 드신다. 니고데모와 거듭남, 우물가의 여인과 생명수, 머뭇거리는 제자들에게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간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다

  소경이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본다. 외로운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실 때 가까이 다가선다. 도처에서 들리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사죄, 믿음, 격려, 그리고 청지기됨에 대한 중요한 신앙들을 알게 된다. “너희가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면”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는데”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방들이 있는데…” 라 말씀하시며 청중들의 마음을 끌어당기신다. 예수님은 또 비유를 사용하여 대적들에게 맞서신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소경된 인도자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예수님은 청중들의 귀에만 의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비유와 이야기를 사용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상상하도록 만드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그들이 보았던 것들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귀납적이고 청중 중심적인 스타일은 청중들을 설교에 끌어들였고 그 결과 그들은 듣고 보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학습 과정에 참여하였다. 예수님의 비유는 청중들의 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속에 새기게 했고 그들을 자극하여 삶의 변화로 이끄셨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를 통한 설교를 배우고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의 모범적인 설교는 사람들이 듣기만 하는 것보다 보고 행하는 것에 의해서 더 잘 배운다는 사실을 고려한 설교였기에 들려주는 것에서 그 기능을 다 하는 것만 같은 오늘날의 우리의 설교와는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신학교육의 여타 분야처럼, 설교학도 왼쪽 뇌 우성인 단어, 언어, 분석, 이론, 신학, 추상, 논증, 그리고 가정에 집중하였다. 성경과 선지자들 그리고 특히 예수님에 대한 강조는 수사적인 규칙과 주의하여 쓴 원고 속에서, 즉 전통적인 설교학이 선호하는 논리적 언어 속에서 사라졌다. 시각적이고 은유적이고 독창적이고 전체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도리어 인식적이고 추상적이고 좌측 뇌의 지시적인 것에 의해 중요성이 가리워졌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오늘날의 설교를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성경적인 전통보다는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으로의 변화로 대체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헬라어로 설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아람어로 설교하셨는데,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관계가 있는 셈어족의 방언이다. 예수님은 상업과 농업의 언어로, 공동 생활과 시민의 언어로 설교하셨다. 즉,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뿐 아니라, 보고 설교에 참여하도록 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셨다.

  우선적으로 설교자는 설교 본문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잘 전달하기 위한 관찰과 깊은 묵상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작업은 기본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어쩌면 이 과정속에서 헬라어적인 사고와 수사학이 필요할 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서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만약에 여기서 멈추고 설교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많은 시간을 공들여 연구한 본문의 내용이 청중들에게 잘 전달될 가능성은 약화된다. 청중들의 삶의 변화를 불러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설교방식에서 드러난 것 처럼 ‘보이는 설교’가 되도록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마무리된 원고를 출력함으로 설교 준비가 끝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설교자의 손에 쥔 그 원고가 설교자 자신에게도 보이는 설교로 다가오는지, 청중들이 원고속에 담긴 이 내용이 단순한 소리가 아닌 그들의 마음과 생각속에서 보이는 설교로 준비된 것인지를 한번 더 점검해 보아야 한다.
첨부파일485.jpg (331.2KB)2018-08-06_보이는_설교.docx (15.9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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