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이야기식 설교
예수님은 이야기의 대가이셨다. 그분은 이야기하는 문화에 사셨고 그 시대의 가치 기준과 도덕, 관습 등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이야기하셨다. 특정한 주제나 개념을 이야기로 가르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 집을 나간 아들, 씨 뿌리는 자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로 긍휼과 용서 그리고 개인적인 책임과 같은 중요한 개념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자신이 실제로 말하고자 하셨던 것에 청중이 귀를 기울이게 하려고 부제나 가벼운 소재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요지에 대한 실례가 아니라 도리어 요지 그 자체였다. 예수님은 간단한 이야기에 과정과 소재를 모두 결합시켜 청중이 잘 이해하도록 자주 그 이야기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말씀해 주셨다. 신학은 나중에 발전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저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서론, 본론, 결론과 같은 전개와 틀에 갇히지 않으시고 한 가지 이야기로 한 가지 개념만을 전달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보잘것없는 물매를 가진 소년 다윗을 보고 그에게 어른 용 갑옷을 입히려고 했던 사울왕처럼, 예수님의 설교에 여러 가지 더 나은 복장을 입히려는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를 우리의 입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 논리적인 논쟁을 재정하여 나열하려고 하지 말자. 다만 예수님이 이야기 없이 설교하지 않으셨다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야기식 설교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는가? 에즈베리신학교 교수였던 랄프 루이스가 아래에 남긴 글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비유를 사용하심 예수님이 매우 좋아하신 이야기체의 형식은 귀납적이다. 예수님은 비유를 이야기하심으로써 청중 스스로 요지와 그것의 함축적 의미를 찾아내도록 하셨다. 물론 모두가 이러한 비유의 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인간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간의 삶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준다.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이며, 실존하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일상생활의 흔한 일을 보여 준다. 이야기는 매우 단순했다. 그 단순성은 예수님의 설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화로 풀어 가심 성경에 나오는 가장 기본적인 몇몇 신학적 메시지는 기록된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우물가의 여인과 나눈 대화의 예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말이다. 대화는 처음에는 위험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청중에 대한 진실한 그리스도적인 사랑의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대화는 청중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실제적이고 명백한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청중의 귀를 통하여 들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들의 눈을 통하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항상 질문을 하심 예수님은 153번이나 질문하셨다. 질문을 통해 사람들을 잠잠하게 하셨고 사람들을 참여시켰을 뿐만 아니라 진리와 헌신을 촉구하셨다. 설교자에게 많은 질문이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한두 가지 중요한 질문은 설교에서 효과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질문은 청중을 자극하여 탐구하고 찾아보도록 하거나 사람들을 설교로 끌어들일 수도 있고 혹은 삶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교와 대조 예수님은 청중에게 유사점과 차이점을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산상설교에서만 해도 예수님은 142가지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러한 은유(metaphor), 상징(figure), 유비(likeness)는 청중의 생각과 기억 속에 뿌리박혀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게 한다. ‘이것과 같고 저것과 같으니라. 이것은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라’ 와 같은 예수님의 비교와 대조는 청중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경험, 생활, 생각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보통사람들의 삶을 직시하심 예수님은 설교하실 때마다 먼저 접촉점을 정하시고 그 다음에 자신의 경험에서 끌어낸 친숙한 어떤 것에 호소함으로써 청중의 주의를 집중시키셨다. 예수님의 설교는 지적인 분석을 통한 학문적 실행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순한 윤리적 충고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청중의 삶과 내면의 감정과 가장 의미 있는 관계를 깊이 파헤치셨다. 예수님의 설교의 주된 요소는 삶과 경험이었다. 예수님은 항상 청중의 관점에서 그리고 청중과 나란히 서서 시작하셨다. 그리고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하셨다. 그러나 청중의 더딘 속도를 아셨다. 그래서 “내가 아직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설교의 결론을 내릴 때까지 경험 중심적인 청중의 관심을 계속 끌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메시지의 모든 부분을 청중의 삶의 경험에 긴밀하게 연결시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