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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기쁨, 영원한 사귐[제478호]
   조회수 353
2019-09-18 12:13:32

등록일 : 2018/06/19 15:29

 


충만한 기쁨, 영원한 사귐 

  B.C. 4세기경, 시라쿠사의 도시 국가에 다몬과 판티아스가 있었다. 이들은 피타고라스파 철학자로서 죽마고우였다. 젊은 학자였던 핀티아스가 시라쿠사의 왕인 디오니시우스 1세를 분노하게 하는 가르침을 하였기에 왕은 그를 잡아들였다.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형에 처하게 된 핀티아스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집에 가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오도록 청원을 하지만 왕이 들어 주지 않는다. 그때 친구인 다몬이 대신 옥에 있기로 하고 핀티아스는 집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오기로 한 약속의 날이 다가왔음에도 핀티아스는 나타나지 않는다. 왕이 약속대로 다몬을 처형하려 할 때, 뜻하지 않은 강도를 만나 부상을 당한 핀티아스가 상한 몸을 이끌고 나타났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고, 친구와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신뢰의 모습을 본 왕은 핀티아스를 사면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돈독한 우정과 친구간의 사귐을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목숨을 내어 주는 진한 우정, 아름다운 사귐의 이야기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는지 모르지만 이것과는 결코 비교가 되지 않는 놀라운 사귐의 이야기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소개된다. 그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시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것만큼 값진 것이 없다고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친구인 제자들과 인류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으신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결코 유효 기간이 없는 영원한 사귐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 그로 인해 그분과의 사귐,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
 
주님과의 사귐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수님과 우리의 사귐이 시작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사도 요한은 그분이 나타나셨기 때문이라 말한다(요일 1:2). 사도 요한은 나타나신 예수님을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자세히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요일 1:2)라고 고백한다.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한 앎과 경험, 사귐이 얼마나 확실했는지를 사도 요한은 밝히고 있다. 사도 요한은 이미 몇 년 전에 요한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을 소개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면서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의해 복음이 왜곡되며 너무도 다른 복음이 판을 치게 되면서 성도와 교회 공동체 안에는 기쁨이 사라지게 된다. 진짜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닌 왜곡된 예수님을 배우고 붙잡고 살아감으로써 부작용이 심했던 것이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한일서 2:18)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향한 여정에 최선을 다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최선을 외면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선이자 사랑의 확증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분과의 사귐에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잘 안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가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왜곡이 가져오는 심각한 부작용이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에 대한 관심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며 외도를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누군가를 사귀면 모든 관심이 그 사람에게 쏠린다. 그 사람을 알아간다. 모든 것을 그 사람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기쁘고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함께 동거하는 삶을 소원한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사귐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가?

서로 간의 사귐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귐과 교제(Fellowship, Koinonia)는 고대 헬라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가장 깊은 인연인 결혼 관계를 묘사할 때 즐겨 사용되던 표현이었다. 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 이 단어는 ‘공통분모’ 혹은 ‘공동 소유’라는 뜻의 더 넓은 의미로 쓰였다.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서로 간의 사귐이 있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1)라고 말한다.
  주님과의 사귐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서로 간의 사귐은 당연히 있어야 하며 이 사귐은 확장되어 한다. 서로를 향한 사귐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누군가가 내게 그러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서 각자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다가오셨듯이  주님과의 사귐이 있는 우리는 먼저 적극적으로 다른 성도를 향하여 다가가야 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적극적인 모습으로 속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주님과의 사귐이 시작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나타나신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다른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관계의 회복은 더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더 넓어지며 사귐이 확장되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결국 주님과,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위한 복음의 중매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과 다른 사도가 보고 들은 바를 우리에게 전함은 우리가 그들과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요일 1:3). 자신과 예수님과의 사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며 듣는 이들 또한 그러한 사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전한다’는 말은 ‘증거한다’는 것과는 비슷하지만 이 말에는 ‘위임받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귐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나눠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증거를 넘어 주님에게서 위임받은 일이다.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인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귐, 주님과 우리의 사귐, 우리 서로 간의 사귐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전하는 것이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의 의미이다. 듣는 이들이 이해를 못해도, 설득이 안 되어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행복하고 기쁨 사귐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시적인 소재들로 일시적인 기쁨을 찾고 누리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정도에 만족할 수 없다. 영원한 주님을 소유하였기에, 우리의 마음, 감정, 모든 소망을 만족시켜 주시는 주님과의 사귐이 있기에 충만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게 완성될 날을 소망하며 주님과의 사귐, 서로 간의 사귐,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이러한 진정한 사귐 가운데로 들어오도록 은혜를 구하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첨부파일(2018.06.19_)_충만한_기쁨_영원한_사귐.hwp (16KB)478.jpg (345.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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