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다양한 놀이문화가 없던 예전에는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라는 노래를 부르며 흙먼지속에서 뒹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 노래의 사오정 버전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한 시대를 풍자하며 유행했던 사오정 시리즈의 탑7에 꼽을 정도라 한다.
“오정아, 오정아 뭐하니?” “밥 먹는다.”
“무슨 반찬?” “밥 먹는다.”
“죽었니? 살았니?” “밥 먹는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오정은 오직 밥에만 관심이 있다. 들려오는 이야기를 이해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자기가 하고싶은 말만 한다.
성경에 이러한 사오정과 같은 한 사람이 등장한다. 인생의 본질과 관련된 메시지를 진지하게 선포하고 있던 주님께 찾아왔던 자이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말씀하시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이 사람과의 대화를 시작하시기전 까지 “겉은 화려하게 꾸미지만 속은 부패한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결국 드러날 것이다.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 우리는 참새보다 귀하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엄중한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셨다. 수만명이 운집하여 복잡한 상황가운데에서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 있었지만 그분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으로 다가온 이 사람은 주님과 주님의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가지고 온 새로운 주제는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눅 12:13)였다. 예수님께 재산을 독차지하려는 형을 고소한다. 억울하게 빼앗긴 자기 재산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일상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도리어 그 문제에 갇혀 삶의 본질을 잊고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시자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를 만난 특별하고 소중한 기회를 못 살린다. 주께서 선포하신 메시지를 집중해서 들었다면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왜 이땅에 오셨는지에 대한 약간의 이해라도 있었을 텐데 사사로운 이권에만 사로잡힌 이 사람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이권 다툼을 능히 해결해 줄 수 있는 판결자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주님은 이 사람이 이러한 오해와 자기 문제에만 함몰된 이유를 “탐심”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
탐심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탐심은 주님과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무관심, 이미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자족과 감사를 상실함으로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에대한 식지 않는 열망으로 인해 결국 하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가로막는다. 결국 모든 것이 자기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결론을 만들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의 은행 계좌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왜곡된 신학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과 무리를 향하여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중요한 메시지를 주셨던 것이다. 단순히 저축을 비난한 것이 아니다. 재물을 향한 책망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태도를 향한 책망이었다. 그렇다면 비유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가 책망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을 현대 사회와 그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 ‘어리석은 물질주의’라고 부르며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소유의 넉넉함을 인생의 본질로 착각한다.
자기를 위하여 부하려고 한다.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현대 경영원리에 입각하여 본다면 탁월한 지혜와 재테크 전략의 소유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야고보서 4:13~17에 허탄한 자랑을 하는 악한자와 같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하지만 주의 뜻에는 관심이 없다. 모든 것을 하지만 주님을 배제시킨다. 여유가 있음에도 그 여유를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으로 활용하지 않는다. 주변 가난한 자에게 관심이 없다. 오로지 먹고 마시며 자신의 평안에만 관심이 있다. 이땅에 자신의 곳간 증축에만 관심이 있지 하늘에 있는 자신의 곳간 증축에는 무관심했다.
둘째, 소유의 넉넉함(소출의 풍성함)이 생명을 연장해 줄 것으로 착각한다.
진짜 삶에 대한 고민이 없다. 진짜 삶이 오고 있음을 생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오직 소유의 넉넉함으로 이 땅에서의 삶에 안정을 추구하고자 했다. 아담의 타락이후 흙에서 온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분명해졌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 현대의 최첨단의 의학이 부분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과연 그러한가?
내일을 염려하는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공중의 새를 보라 …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6, 28)이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생명의 연장을 위해 소유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생명의 연장의 주권은 그분께 있기에 그분께 집중하며 그분과 함께 할 때 이 땅에서의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영원한 생명까지도 책임져 주신다.
셋째, 소유(쌓아둔 재물)가 많아야 부자라고 착각한다.
관대함이 없는 이기심에 사로잡힌 자는 결코 부자가 아니다. 부자가 아닌 부유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잠언 22:9은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라고 말한다. 선한 자는 나누는 자란 말씀이다. 기존의 곳간이 찼다면 그 다음은 나누면 될 텐데 그저 더 큰 새 곳간을 원한다. 뭐든지 고이면 썩고 부패한다. 곡식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흘러가면 더 풍성해진다. 흘려보내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의 사람들이 그 풍요로움을 함께 경험한다.
탐심은 자기만족을 추구하도록 한다. 하나님께 무관심하다. 이땅에서의 오늘과 내일에만 관심이 있지 영원에는 무관심하다. 내 곳간에 쌓는 것에만 집중하지 다른이의 곳간이 비어가는 것에는 무관심하다. 그러다보니 ‘I-my-me-mine’ 신학(?)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다른 신(우상)을 만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자가 된다. 주님은 절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말씀하셨는데도 말이다.
주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하자. 지금의 삶과 사역이 과연 주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함으로 펼쳐지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 더 나아가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향하여 부유한 자인지 점검해 보자. 성경은 다른 이에게 나누는 것을 부유한 삶이라고 가르치시며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 부유한 자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의 일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복음이 되셨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은 내어줌에 있음을 잊지 말고 모든 것을 흡수하여 자신에게 고이게 함으로 썩게 만드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내어줌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풍요롭게 함으로써 하늘에 보화를 쌓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더 이상 어리석은 물질주의의 하수인이 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