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Home / 칼럼
page-visual_title

칼럼

글보기
이상적인 부모의 태도 [제 660호]
   조회수 303
2022-04-25 15:30:17


 



이 이야기에 흔히 탕자라는 제목이 붙지만,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아버지다. 우리는 방황하다 돌아오는 아들에게 동질감을 느끼지만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하신 것은 우리에게 하늘 아버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다. 누가복음 25장은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거기 보면 아버지는 한 마리 양을 찾으시고 기뻐하신다. 그 다음 이야기도 동전을 찾는 것만 다를 뿐 요점은 똑같다. 누가복음 1511-32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아버지의 성품을 더 자세히 엿보게 해 주신다. 그분에게서 나는 마땅히 본받아야 할, 부모의 네 가지 훌륭한 태도를 본다.


기꺼이 듣고 모험한다.

이 아버지는 들을 의무가 없었다. 자진해서 들은 것이다. 물론 그는 재산을 물려줄 필요도 없었다. 본인이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들에게 현금을 주려면 아버지는 전 재산의 적어도 3분의 1을 팔아야 했을 것이고, 그러려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본문에 보면 아들이 머잖아집을 떠났다고 했다. 분명히 이 아버지는 그 시간을 잘 활용해서 적어도 한 번은 어쩌면 여러 번 부자간에 진지한 대화를 했을 것이다.

아들이나 딸이 대학으로 떠나거나, 신병 훈련소로 가는 기차에 오르거나, 몇몇 친구들과 아파트에 입주할 때 훌륭한 부모들이 으레 하는 말이다. 어떤 부모라도 기꺼이 자식을 보내려면, 기꺼이 듣고 모험해야 한다. 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 몫의 돈을 주었다.


기꺼이 자녀를 놓아준다.

이 아버지는 전혀 막으려 하지 않는다. 논쟁하지도 않고 애원하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는 아들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려 하지 않고 아들 스스로 살아가도록 놓아주었다. 어느 날 아침, 아들은 짐을 싸서 먼 나라로떠났다. 머잖아 그는 아버지의 당부를 잊어버리고 허랑방탕한 삶에 빠져들기 시작했다(이 말은 헤프고 주색에 빠진 삶보다는 무절제하고 무질서한 삶을 뜻한다). 그는 무모하게 쾌락에 빠져서 재산을 허비했고, 아무렇게나 펑펑 돈을 썼다. 혼자라는 자유를 마음껏 만끽했다. 마침내 그 땅에 기근이 돌면서 그의 생활은 바닥을 쳤다. 절망과 우울과 공포가 뒤섞여서 그는 인생의 맨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청년이 찾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 일 뿐이었다. 당시 유대인에게 얼마나 천한 직업인가! 그나마 벌이는 배를 채울 정도도 못되었다. 배가 너무 고프면 더러운 돼지 밥도 탐나는 법이다. 대부분의 부모라면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아버지는 어디 있나?”

이 방탕한 아들의 아버지는 늘 있던 곳에 있었다. 아들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격려의 편지를 쓰지도 않았다. 더 좋은 아버지가 되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다. 이 아버지에게서 죄책감이나 고민의 증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패배 의식에 빠지거나 아들의 상태를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사실 부모는 그렇게 되기가 아주 십상이다.

아버지의 눈은 지평을 살핀다. 아들의 무사한 모습을 보기 원하고 아들과 함께 있기를 애타게 바라면서 말이다. 아버지는 더러운 돼지우리 안에 그와 함께 있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 중에 단 한 번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다.


하나님이 자녀를 변화시켜 주실 때까지 기꺼이 기다린다.

잘 보면 아버지는 아들이 집에 오기를 간절히 원했으면서도 이래저래 조종하여 아들의 변화를 재촉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기꺼이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아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시도록 기다렸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아들이 돼지우리 속에 뒹굴며 모든 결과를 당하도록 두어야 했다. 부모로서 힘든 일이지만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탕자는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기꺼이 수용하고, 용서하며, 회복한다.

아버지는 멀찍이아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대문간에 앉아서 저 멀리 나타나는 그림자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꺼이 기다렸지만 그 마음은 간절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품에 안는다. 고마울 따름이다. 그는 자기가 옳다든지, 자기를 변호한다든지, 자존심을 세우는 일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기꺼이 아들을 받아들이고, 그의 어리석음을 용서하며, 둘의 관계를 회복했다.


하나님이 사이비 종교나 잘못된 종교의 신들과 가장 크게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은혜다. 추종자들을 값없이, 온전히 용서해준다는 주장은 다른 어떤 종교에도 없다. 아들이 아직도 돼지우리의 악취와 오물로 절어 있고, 또 집까지 먼 길을 걸어오느라 땀으로 범벅되어 있는데도 아버지는 그에게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힌다. 아버지는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낌없이 용서하며, 완전히 회복시켜 주었다. 그리고는 춤을 추었다. 탕자의 모든 죄책감과 수치심을 음악과 춤이 삼켜버렸다.


[위의 글은 찰스 스윈돌성공하는 자녀 양육의 비밀(도서출판 디모데) 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첨부파일2022-04-26_이상적인 부모의 태도.docx (16.5KB)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장바구니

등록된 상품이 없습니다
합계: 0

고객지원

디모데성경연구원은 고객의 의견을 소중히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