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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라는 괴물 [제 752호]
   조회수 52
2024-10-30 10:43:36


 

매일 거울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열 일곱 살 소녀에게 무엇을 찾고 있는지 굳이 물을 필요가 없다. 답은 뻔하다. 그 소녀는 모든 흠을 찾아서 재빨리 해결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작은 혹과 점들을 다루기 위한 도구들이 화장대 앞에 완벽히 준비되어 있다.

우리가 찾고 있는 유해한 흠은 '시기(猜忌)'.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그 시기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모르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마태복음 20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살펴보자. 이 비유의 도입부는 동네 철물점이나 페인트 가게 주차장에 줄을 서서 일거리를 찾는 남자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은 새벽에 일단의 일당 노동자와 지주 사이에서 이루어진 구두 합의를 묘사하심으로써 시기를 정의하기 위한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지주는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합의한다. 이것은 1세기 비숙련 노동에 주어지던 일반적인 품삯이었다.

일당 노동자들은 지주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의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침 나절에 철물점으로 다시 가는 집주인처럼, 몇 시간 뒤 지주는 시장으로 돌아가 남은 인력이 더 있는지 살펴본다. 그는 그들에게 두둑한 품삯을 약속하면서 일꾼으로 부른다. 그리하여 그들도 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몇 시간 뒤 지주는 다시 시장으로 돌아가 남은 인력이 있는 것을 보고 같은 말을 한다. 그렇게 더 많은 일꾼이 팀에 합류한다. 오후에도, 그리고 해 지기 직전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자, 지주는 품삯을 나눠주기 위해 청지기를 불러 일꾼들을 줄 세우게 한다. 지주는 돈가방을 들고 청지기에게 먼저 해지기 한 시간 전에 일을 시작한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라고 지시한다. 자신이 한 일에 비해 열 배 이상 많은 돈을 받은 일꾼들은 놀란 표정을 짓고 이내 입이 귀에 걸린다.

동이 틀 때 고용된 일꾼들도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은 좋아서 놀란 표정이 아니라 화난 표정이다. 스크린의 초점이 그들에게로 집중된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군거린다. “저자들은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저자들은 왜 특별 대우를 받는 거야?” “저자들은 조금밖에 일하지 않았어.” 예수님이 이 시기심 많은 남자의 입술을 통해 사용하신 표현은 이러하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20:12).

그리스도의 비유에서 지주의 반응은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13~14). 이 논리를 반박하기는 어려웠다. 노동에 관해 그들에게 구두로 한 약속은 지켜졌다. 좋은 분위기에서 합의가 이루어졌고, 일꾼들은 일을 했으며, 고용주는 약속한 대로 품삯을 치렀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깔끔했다. 유일한 문제는 인간 마음의 얼룩이었다. 이 상황은 남들의 것이 더 두둑해보이면 내 것이 두둑해도 두둑하지 않다고 말하는 타락한 인간의 추악한 성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다시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한 가지 원칙을 보여주신다. 그분은 문제의 핵심을 꼭 꼬집어 우리가 시기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신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20:14~15)

마지막 문장에는 시기라는 단어의 기원이 숨어 있다. 이 문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이렇다. “내가 선하기 때문에 네가 악한 눈으로 보느냐?”

? 도대체 무슨 뜻인가? 다 알다시피 우리보다 두둑하게 가진 사람 앞에서 우리의 눈은 이상해진다. 물론, 찡그린 표정과 노려보는 눈빛은 내면의 시기가 표현된 것이다. 누군가가 좋은 것을 우리보다 더 많이 받으면 우리는 악한 눈으로 그를 본다. 그를 싫어하고, 그것이 표정, 특히 눈에서 드러난다. 악한 눈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복이나 혜택을 얻은 사람을 분노와 원망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가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기가 단순히 탐내거나 부러워하는 것 이상인 이유다.

시기는 단순히 상대방이 가진 것을 원하는 데서 더 나아간다. 그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가졌다는 사실에 반감과 분노를 품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을 흘겨보게 된다.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하고 종일 일하고 나서 조금밖에 일하지 않는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면 우리의 눈은 그런 식으로 보게 된다. 상대방을 잡아 죽일 듯 흘겨보게 된다.

시기는 불만이다. 누군가가 누릴 자격이 없는 복과 이점, 기회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 안의 시기심은 주로 눈빛으로 표출된다. 이것은 악한 눈이다. 이것은 나쁘고 불합리하고 악한 분노가 표정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어의 시기’(envy)라는 단어가 비롯됐다.

사람이나 사물을 보거나 응시하는 것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 인비디아’(Invidia). 이 단어의 끝부분에서 영상’(video)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 단어의 앞부분 ’(in)은 라틴어로 ‘~을 의미한다. 누군가 바라보고, 응시하며, 흘깃 쳐다보는 것이 시기’(envy)의 어원이다. 라틴어 인비디아와 영어 엔비는 발음도 비슷하다. ‘시기라는 단어를 들을 때 영상 보는 것을 떠올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겠지만, 그리스도의 날카로운 질문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선하게 대하고 후하게 베푼다고 해서 악한 눈으로 보느냐?”



[의의 글은 도서출판 디모데의 신간인 마이크 페버레즈, 나를 무너뜨리는 내 안의 적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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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2024-10-30_시기라는 괴물.docx (17.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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