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해당 기사의 헤드라인과 리드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황 “챗GPT로 미사 준비 말라” … 신의 영역까지 파고든 AI』, 한국경제 2026년 3월 10일자 - 불교 경전 학습한 ‘붓다로이드’ - 스님처럼 걷고, 절하고, 합장… - ‘종교 이별’ 시대, 대안 떠올라 - MZ세대 “AI 조언 목사만큼 신뢰” - “인간만의 ‘초월적 경험’ 뒤흔든다” - 일부 종교선 반발·윤리지침 검토
요약하자면, AI가 승려도, 목사도, 종교도 대체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종교가 사라지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불교에서는 불교 경전을 학습한 생성형 AI ‘붓다봇 플러스’가 탑재된 인간형 로봇이 승려를 대신해 포교·교육 활동을 하고, 천주교에서는 사제들이 AI로 작성된 미사 강론으로 미사를 집례하고, 기독교에서는 상당수의 목사들이 챗GPT로 설교 준비와 목회 상담을 하는 것이 이미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라고 합니다. 승려나 사제, 목사의 조언보다 AI의 조언을 더욱 신뢰한다고 밝힌 MZ 세대들이 40%에 육박하고, 세대가 거듭될수록 그 경향은 더욱 뚜렷이 나타날 것이니, 그야말로 종교가 필요 없는 시대, 종교를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기자는, ‘누미노제(Numinose)’를 언급합니다. 누미노제는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에게 경외감을 갖고 매혹되는 종교적 경험”으로서, “인간의 언어로는 형언할 수 없는 전율과 신비, 비합리적 감정”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가 그의 저서, 『성스러움의 의미』 에서 이를 정의했는데, 그에 따르면 누미노제가 종교의 핵심이자 본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AI가 발전하면서 이와 같은 믿음을 뒤흔들고 있다고 기자는 보도합니다. AI가 종교(인들)를(을) 충분히 대체하고 있으니 종교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초월적 경험과 감정이 현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따라서 자연히 ‘종교 이별’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AI가 종교인들을 대체하는 것과 현대인들이 더 이상 누미노제를 필요치 않게 된 것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왜 현대인들에게 누미노제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까요? 위에서 언급한 바, ‘누미노제’는 초월적이고 거룩한 존재를 만났을 때 느끼는 ‘무섭고, 매혹적인, 신비한 감정’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갈망하는 이유는 인간 내면에 근원적인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원적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의존적입니다.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늘 품고 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우상을 찾거나 초월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두려움은 결핍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추구하며 그분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도록 디자인 된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결과, 근원적인 결핍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만족이 그 내면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애써 노력하지만, 결과는 "터진 웅덩이"(렘2:13) 즉,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망함 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면 깊은 곳의 근원적 두려움을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을 더욱 부추길 뿐입니다. AI는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제나, 무엇이라도 질문에 대한 양질의 대답을 제공해 줍니다. 현실적 질문은 물론이거니와 소위 ‘영적’인 질문까지도 막히는 법이 없습니다. 승려나 사제, 목사와는 달리 시간을 내 줄 것을 요청하며 약속을 따로 잡지 않아도 됩니다. 모르는 것은 당연히 없습니다. 묻는 것마다 신뢰할 만한 정보들을 척척 제공해줍니다. 그러니 미지의 것이 점점 사라집니다. 모르면, 두려우면 물어보면 됩니다. 신발끈을 예쁘게 묶는 방법, 가성비 좋은 제품을 고르는 법, 내 건강 상태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 나의 자기소개서를 쓰는 법, 어느 회사에 취업하고 어떻게 이직하면 좋을지, 어떤 사람과 언제 결혼하는 게 좋을지,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이나 영적 세계에 대한 물음에까지. 그러니 신비적 체험이 굳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지금 내게 실용적이면 그만인데. ‘실용적’이라는 말, 요즘 세대들에게 매우 잘 어울립니다. 1980~90년대, X세대, 밀레니얼 세대를 ‘Me Generation’으로 지칭했다면 요즘 젊은이들, ‘Me Me Me Generation’쯤 되겠습니다. 핵개인의 시대1) 속, 남들이 무엇을 하든, 뭐라 하든 ‘알빠노’2) 라는 무심한 한 마디를 던지고 그저 마이웨이를 갈 뿐입니다. 그러니 ‘AI의 영적 조언을 목사의 조언만큼 신뢰한다’는 응답이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에서 특히 높게 나타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이 ‘영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는지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 현실적으로 유의미한 것을 제시해주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AI가 더 쓸만하니까 말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심각한 질문 앞에 섭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도 무용한가? 교회는 필요한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목사는, 교회는 이제 필요가 없을까요? 그저 AI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 신앙을 나름 지키면 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AI는 결코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AI는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을지언정 의미를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AI는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지식을 오늘도 쉼 없이 학습하고 있습니다. 학습 속도와 그에 따른 지식이 증가하는 속도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지식으로 내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고유한 뜻과 계획, 그것을 이루심으로 받으실 영광, 또한 그리하여 내게 상속하실 기업과 하늘의 영원한 상급을 AI에게서 배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직 이 비밀로서만 영혼의 근원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창세 전 예비하신 은혜의 계획, 또한 그에 앞서 우리 각 사람을 조건 없이 택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우리 안의 두려움이 내쫓깁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을, AI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고, 인간이 AI를 통해 태산 같은 지식을 얻는다 하더라도 정복할 수 없습니다. 다만 미지의 것을 정복하는 것처럼 보일 뿐. 무엇보다, 기독교는 누미노제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자는 AI 때문에 종교가 사라지는 현시대 상황을 말하면서, 그 핵심적 원인으로 종교의 본질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역시 누미노제를 본질로 삼는 종교라는 전제 위에서 목사도, 교회도 점점 의미를 잃어간다는 논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누미노제, 즉 초월적인 경험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렵고도 신비로운 경험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경험으로서, 객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나의 누미노제가 제 아무리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하고 신비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객관적 계시, 즉 말씀의 검증과 내 삶을 통한 공동체의 인증을 받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누미노제가 아니라,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요, 나아가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3)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으로, 역사를 통해, 오늘 나의 현실 속 모든 조건, 상황을 통해 진리를 계시하셨고, 계시하시며, 계시하실 것입니다. 신자인 우리는 성경을, 역사를, 나의 인생을 텍스트 삼아 진리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 중심으로 그것을 '읽고', '재해석'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모호한 주관적 경험을 내세우며 위안을 주는 종교가 아니라, 성령하나님에 의해 개안(開眼)된 이성으로 역사를, 세상을, 인생을 바로 읽게 하고 존재의 참 의미를 찾아 ‘가야 할 길’을 알게 하는 종교입니다. 나아가 그 길을 자원함으로 선택하여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종교입니다. 이러한 삶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는 인생’이요, 바울 사도가 고백한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인생’입니다. 이와 같은 삶에, 구원받아 여생을 부여 받은 우리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기독교는, 삶에서 선택 가능한 여러 부가가치들 중 하나로서가 아니라 대체불가한 유일무이한 것으로서 필요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몸으로 연결되는 실체, 곧 공동체성—교회 됨—이 회복돼야 합니다. ‘진리’, ‘참된 의미’는 오직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기름부음’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기름부음의 현장이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 곧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실체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성령하나님의 초월적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의 서로 사랑함, 용서와 하나 됨, 목양과 순종의 위치·질서를 통해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기름 부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관계’를 합법적 근거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근원적 두려움에서 해방하시는 하늘 지혜를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를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형제자매의 발을 서로 닦아 줌으로, 하나 됨으로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 아래 있으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나에게 적실한 복음으로서 진리가 발견됩니다. AI가 제시하는 수천, 수만개의 ‘옳은’ 답들 속에서, 그러나 홍수처럼 범람하는 무의미한 지식 속에서, 우리에게 유효한 한 가지 진리가 우리의 사랑함 속에서, 기름부음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단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시기를 바랍니다.
--------------------------------- 1) 송길영 작가가 제시한 개념. ‘핵가족(核家族, nuclear family)’과는 구분되는 용어로서, 어떤 한 사람이 의사결정의 주체성을 갖고 상호의존성을 탈피해 혼자서 살고 싶어하는 삶을 핵개인(核個人, nuclear individual)으로 지칭. 핵개인의 시대는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이 상호 네트워크의 힘으로 자립하는 특징을 갖는다. _송길영 작가 인터뷰 https://youtu.be/zAqno46pkNs 참고 2) '내가 알 바가 아니다'의 줄임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뜻을 의미하는 신조어_네이버 국어사전 3) 『거기 계시는 하나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기독교 철학자이자 장로교 목사, 복음주의 운동가인 프란시스 쉐퍼(1912~1984)의 작품이다. 각각, ‘하나님은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은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성경)를 통해 자신의 성품과 우주의 의미를 계시하셨다’는 것을 역설한다.
_디모데성경연구원
※ 위 글은, 한국경제, 『교황 “챗GPT로 미사 준비 말라” … 신의 영역까지 파고든 AI』 _ 2026년 03월 10일자 기사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https://plus.hankyung.com/apps/newsinside.view?aid=2026030990291&category=NEWSPAPER&sns=y) ※ 위 사진은 해당 기사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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