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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진정 사랑하십니까? [제 784호 칼럼]
   조회수 42
2026-06-25 16:48:44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곤 합니다. 예배의 뜨거운 감동으로, 말씀을 들을 때의 충격으로, 묵상할 때에 깨닫게 된 사실로, 기도와 찬양의 고양된 감정으로 등등 다양한 상황에서 말입니다. 상황은 다양하나 그 원리는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 주시는 지각과 감정으로 은혜를 깨닫고 실감하여, 자신을 뉘우치는 회개와 함께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도약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합니다. 특히, 우리 믿음의 2세대들이 부모의 믿음을 의지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스스로, 자신만의 신앙고백을 드려야 할 때(대략 중학생쯤 되겠네요)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시절 즈음의 ‘은혜를 실감하고, 자신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하는 경험’은 그들 인생의 가치를 정립하고,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는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이와 같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은 참 귀하고 복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는 모두 사해집니다. 지난 날의 것이나, 오늘의 것이나, 다가올 내일의 것이나 죄는 모두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씻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을 입고 살기에 근본적인 죄성 곧, 죄의 잔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성의 핵심은 다름아닌 ‘나 중심’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로부터 수여되는 지혜와 힘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힘으로, 자기 뜻대로, 자기 만족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이런 습성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근원적인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히2:15), 이 두려움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작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나를 위해 살게 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인 양 그것에 갇히면서도, 갇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 판단, 생각, 경험은 믿을 게 못 됩니다. 그것이 제 아무리 진정성 있고, 순수하며, 희생적인 사랑 고백이라 할지라도 태생적으로 자기 중심적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한계를 하나님께서는 잘 아시기에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깊이 살피시고 그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고백과 의지, 바람 등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 중에서도 틀림 없는 검증 툴이 있습니다. 바로 형제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요한 사도의 말씀은 명백하여 모호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 안에서 한 몸 된 교회의 지체,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위해 아들의 목숨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서도 똑같이 아들 예수님의 목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그를 위하고, 귀히 여기며, 그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기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지체들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실만큼 애지중지 사랑하시는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그의 사랑하시는 뜻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그 뜻에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들 중에서도 특히, 내가 가장 원수 같이 여기는 그 사람, 나와 가장 안 맞는 그 사람, 내가 가장 싫어하는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곧 나의 현재 사랑의 수준입니다. 내가 가장 불편한 사람, 가장 안 맞는 사람에게 우리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기대하기는 커녕 손해 보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한 조건 즉, 내가 상대에게서 하등 얻을 것이 없다는 조건은 그를 향한 우리 마음을 꾸밈없이 드러냅니다. 그를 사랑받는 주의 자녀로 대하는지, 한 사람의 고귀한 인격으로 대하는지, 아니면 그저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한 도구로 대하는지 그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정확히, ‘형제를 향한 나의 사랑’의 수준이요, 이는 또한 정확히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언급했듯,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흘러 들어오면 우리의 살아있는 양심은 그 사랑 앞에 무릎 꿇을 것이며, 그 사랑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려 할 것이며, 이는 곧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논리를 따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사랑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이는, 제 아무리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한 사랑 고백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더라도 실상 “하나님을 시인하나 입술로는 부인하는” 것입니다(딛1:16).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6:12)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우리가 주 안에서 형제자매 된 우리의 지체들을 차별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한다면, 즉 용서하고 용납한다면 우리의 죄가 사해집니다. 여기서의 ‘죄 사함’은 우리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는 근원적 죄 사함이 아닙니다(상기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이 ‘죄 사함’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죄의 권세, 사탄의 괴롭힘으로부터 우리를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한 평생 종 노릇하게 만드는 원수의 매임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사실적 실체가 되어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열립니다. 헤세드를 베풂으로 이방의 여인이었음에도 하나님의 복에 동참한 룻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남 좋은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에게 좋은 일’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다음의 결론도 가능합니다. 당신이 만약 사랑해야 할 사람, 용서해야 할 일들이 많다면 당신은 그만큼 많이 사함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많이 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말씀하셨으니 또한 당신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형제 사랑으로 하나님 사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형제 사랑으로 당신의 사랑을 검증해 보십시오. 교회의 지체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당신 자신을 주님 앞에서 깊이 성찰하십시오. 우리를 용납하신 주님의 마음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만 달란트 빚 탕감 받았음을 기억하며 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 주십시오. 그렇게 주의 몸 된 교회와 연결되고 결합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사랑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_디모데성경연구원


첨부파일2026_6_25_하나님을 진정 사랑하십니까.docx (29.2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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