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은 남녀노소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단 최면에 걸린 마냥 예외 없이 스마트폰 속 세계에 열중합니다. 각종 기사, 게임, 드라마, 영화, 숏츠 등등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이 넘쳐나는 바다 속에서 그 순간을 즐깁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항상 동행하는 친구 삼아 수시로 꺼내 봅니다. 눈에 보이지 않거나 손에 잡히지 않으면 금단현상 마냥 불안해합니다. 자기 전에도 한참 들여다보다 머리맡에 놓고 잡니다. 눈 뜨면 가장 먼저 찾습니다. 이를 위해 매달 돈을 지불합니다. 이쯤 되면 내가 스마트폰의 주인인지, 스마트폰이 내 주인인지 헷갈립니다. 숏폼 형태의 컨텐츠가 우리의 뇌에 심각한 해를 끼친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연구 결과입니다. 도파민에 중독되게 하여 뇌의 보상 체계를 망가뜨리고 소소한 일상 속 즐거움에 점차 무감해지게 만든다는 사실 말입니다. 자극적인 음식에 익숙해져 섬세한 맛의 음식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합니다. 이는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과 유사합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마치 세상이 흑백tv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일상에서의 감사, 소망, 의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다 알면서도 스마트폰의 종으로 삽니다. 스마트폰의 종으로 살면서도 종으로 사는지 자각하지 못합니다. 몰론,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이미 우리의 삶에 너무나 깊숙히 들어와 버려 완전한 절연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측면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됐든 우리가 이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스마트폰의 종으로 사는 사이 우리의 뇌는, 특히 스마트폰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우리 자녀 세대들의 뇌는 자극에 익숙한 뇌,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뇌, 일상의 즐거움을 상실한 뇌로 형성되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뇌의 건강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점차 사랑이 식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스마트폰 쳐다보느라 주변 사람을 돌아볼 여지를 상실합니다. 내 옆사람이 어떻게 느낄지, 무엇을 필요로 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관심은 오직 ‘나’입니다. 나의 아성을 높이 쌓고, 나의 아성 안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도킹하는 나의 세계 속에서 내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들을 소비하는 것에 익숙하니 ‘너’에게 관심 가질 여력이 없습니다. 관심 가질 이유가 있다면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일 뿐. 상대를 한 사람의 인격으로 여기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 소비하는 대상으로 삼을 뿐입니다. 현대인들은 ‘1.5인 가구’를 지향한다고 합니다. 1인 가구도 아니고 2인 가구도 아닌 1.5인 가구라니 어딘가 이상합니다. 어떤 의미인가 살펴보니, 이는 누구에게도 얽매이거나 방해받기를 원치 않기에 혼자 살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누군가와 전략적 유대 관계를 추구하는 형태라고 합니다. 주거 시설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간의 적정 거리를 두며 맺어진 계약을 토대로 내가 필요한 것을 서로에게서 얻는다는 것입니다. 언뜻 젠틀하고 나이스한 관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상대를 소비할 뿐 결코 ‘인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는 비인간적인 시대 풍조를 공기처럼 들이마시며 살아갑니다. 점점 우리는 내 옆에,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나의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고귀함을, 소중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기구한 사정으로 망망대해로 둘러싸인 무인도에 표류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정신 차려보니 무인도의 해변이고 구조 요청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섬의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갑니다. 천신만고 끝에 높은 곳에 올라서서 주변 사정을 파악하고 임시로 기거할 거처가 있을만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놀랍게도 그곳에 먼저 표류하여 생존하고 있던 한 사람을 마주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가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두려움은 잠시, 더없이 반갑지 않을까요? 심지어 그가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 우리는 부둥켜안고 통곡할 지도 모릅니다. 말이 안 통하는 어떤 나라의 사람이라면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그와 소통하고 함께 생존할 방법을 모색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고서야 우리에게 허락된 사람들, 나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귀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통증입니다. 성경이 이미 우리에게 예언에 주신 바, 이 시대는 자기 사랑의 시대, 불법이 성하여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구원의 여망이 점점 사라져 가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옆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가슴 없는 인간’이 될수록,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요원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람들을 통해,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하나 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시고, 이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바로 이 같은 감각을 상실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성찰할 기회를 상실하고, 아버지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사라집니다. 그러니 구원의 여망이 점차 희박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입니다. 이런 연유로, 스마트폰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차지하셔야 할 영역을 대신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 타인과 나 자신, 나아가 하나님을 바라볼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나를 더욱 강화합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를 통해 주시는 생명의 메시지, 목양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는 데에까지 나아가게 합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하늘을, 주변을 바라보십시오. 나와 함께하는 동료, 형제자매, 내 아내, 남편, 내 가족, 내 자녀의 얼굴을 마주하십시오. 그들 영혼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들의 사소한 ‘관계 연결 시도’에, 어쩌면 지금도 계속 보내고 있을 지 모를 ‘구조 요청’에 호응하십시오. 이러한 교회 공동체로서의 연결과 결합으로 머리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시기 바랍니다.
_디모데성경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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