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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을 만난다는 것 [제 790호 칼럼]
   조회수 33
2026-10-01 17:00:03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육체의 예수님께서는 이미 약 2천여 년 전,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셔서,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가르치시다가 40일 후 승천하셨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는 2천년이 넘는 시간의 간극, 수천 km가 넘는 공간의 간극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 뵙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너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지 않고서야 그분의 존귀하심, 고상하심을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존귀하심을 알지 못하면 주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은 진정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예기치 못한 인생의 고난, 위기 앞에서 주님의 ‘평안하라’는 말씀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는 다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그저 오며 가며 흔히 마주치는 동네 아저씨 정도로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차원에서 예수님을 잘 알 수는 있습니다. 성경이나 신학 서적을 뒤져 그분께서 얼마나 존귀하시고 고상하신 분이신지 머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구체적인 여러 정보들을 익힐 수도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 시편이 예언한 실체로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고,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오셨고 등등 여타의 정보들 말입니다. 그렇게 성경 퀴즈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할 만큼, 또는 높은 수준의 신학 논문을 작성할 만큼 그분에 대한 박식한 지식을 가졌다고 한들 주님을 진정 ‘아는’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늘 지혜가 임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예레미야 9장 24절에서 말씀하시는 바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시는 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개인의 차원으로 이를 적용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의 인생이, 말씀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인생과 하나가 되었으므로 나의 인생 처음과 끝, 곧 전부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공의로 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인생은 희비가 교차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욥은 알몸으로 나와서 알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고백했습니다.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이 뒤섞여 제로썸으로 귀결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 인생을 구성하는 그 모든 것들은 나의 인생 전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의 조각들입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원하는 일이든 원치 않는 일이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빠짐없이, 예외 없이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거대한 경륜과 정교한 섭리는 뒤로 물러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 연약함, 실패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삼으십니다. 성경의 숱한 사례들이 이를 증언하지만, 그 중에서도 뚜렷한 한가지 사례를 들자면, 이스라엘의 실패입니다. 애굽에서 그들을, 하나님께서 건지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신실하게(?)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고,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이어 주전 586년 남유다까지 멸망당했습니다. ‘약속의 백성’이라는 자존심 하나만큼은 내줄 수 없었던 그들이었지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성전은 모조리 박살 났고 불태워졌으며, 영원한 나라라 믿었던 그들의 조국은 비참하게 유린당했습니다. 실패 중의 실패요, 절망 중의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와 절망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남겨둔 약속의 백성들을 지극히 겸손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때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열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통해 향후 복음이신 예수님이 전해지는 선교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아가 그들을 회복시키실 때에 오히려 이방인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심으로 이방인들 중에서조차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으시는 모략을 이행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끝까지 유효하여 쉼 없이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 비밀스런 신비가 우리 삶에서도 이루어짐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아는 것이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실패와 절망이 더 이상 실패와 절망이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영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모략으로 뒤집히는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아파했던, 놓지 못했던, 칠흑 같았던 어둠의 순간조차,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가리키는,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별과 같은 순간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주님께서 맹인을 만나셨을 때, 그의 인생을 새롭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의 ‘날 때부터 맹인 된’ 사실이, 그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임을, 아들 되신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로 가득함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보잘것없는 나의 지난날, 오늘, 다가올 내일에 가득함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여전히 빛이신 부활의 예수님을 ‘영으로’ 만나 뵙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보지 못하는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시고 내 인생의 아픔, 실패, 좌절, 절망을 화관, 기쁨, 미래,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뵙는’ 역사는 교회 됨으로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의 느낌과 생각과 관계없이 이는 우리에게 선명한 진리로 주어졌습니다. 교회 생활이라는 실체 속에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영으로 만납니다. 예수님의 지체 곧, 성도와 성도의 구체적인 만남, 부대끼며 호흡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서로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서로를 통해 만나 뵙습니다. 목양의 영적 질서 아래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함, 하나 됨,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섬김과 순종을 통해 성령하나님의 초월적인 지혜가 부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상기의 신비를 앎으로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존귀하심을 알고 그분을 자원함으로 사랑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뵙는 복된 순간이 날마다 쌓여가고 더욱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_디모데성경연구원


첨부파일2026_9_30_부활의 주님을 만난다는 것.docx (28.5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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