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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터치해주는 사람 [사람을 세우는 사람 308호]
   조회수 226
2019-09-11 12:20:01

등록일 : 2015/02/24 09:54





John Naisbitt는 『Megatrend』라는 책에서 미래 사회를 결정지을 거대한 주류를 다음의 열 가지로 예견해 준다.

1. 근세기 산업사회는 이미 정보화 사회로 나가고 있다.
2. 양자택일의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다종 선택의 사회로 전환한다. (창고형 대형 마켓의 대중화)
3. 국가적인 단일경제에서 세계 경제로 전환한다. (국제 사회의 다국적 기업으로 전환)
4. 단기전망의 사회에서 장기전망의 사회구조로 재편된다.
5. 중앙집권에서 지방분권 조직으로 개혁되어 나간다. (지방자치제와 소수민족 부족주의 국가형성)
6. 조직사회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전문점, 전문병원, 전문기관 선호)
7. 대의 민주주의 정치구조에서 참여 민주주의로 전환한다. (구경에서 참여자로)
8. 피라미드형 구조에서 수평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발전한다. (개미 구조에서 거미 시스템으로)
9. 공업도시를 떠나 전원도시에로의 지역적 대이동이 일어난다.
10. 미래 흐름은 하이테크와 하이터치라는 두 방향으로 동시에 흐른다.

특히 21세기 하이 테크놀로지 시대에 사는 현대인에게는 그 어느 것보다도 사랑의 하이터치가 필요하다. 21세기는 메탈 문명에서 멘탈 문화로, fact 시대에서 felt 시대로 정화되어 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멍들고 찢어진 가슴을 치유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그런 사람이 등장한다. 욥기에 등장하는 제4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엘리후이다. 그가 출현함으로 욥기의 전환은 32장부터 새롭게 이루어진다.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욥기 32:6-10)

엘리후는 그동안 친구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공격과 상처를 받아 꽁꽁 닫힌 욥의 마음 열기 작업을 성공하게 한 훌륭한 상담자이다. 욥의 차가운 가슴을 따뜻하게 치유해준 상담자다. 욥기 31장까지의 구조는 서로 공방전이다. 서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되받아치는 내용이다. 그런데 엘리후의 말에는 모두가 마음을 열고 귀 기울여 듣는다. 엘리후, 그가 얼마나 훈훈하게 가슴을 터치해주는 따뜻한 성품의 사람이었으면 그랬을까?
오늘 우리도 어떻게 하면 사람의 가슴을 터치해주는 성품을 개발할 수 있을까?


1. 인격적으로 말하자
세 친구는 소위 head language를 썼는데, 엘리후는 가슴의 언어, heart  language로 말한다. 세 친구는 말은 거칠고 난폭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급하게 단정하며 말했다. 그런데 엘리후는 자신의 인품으로 말한다. 모든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며 말한다. 현대인들의 큰 약점은 욥의 친구들처럼 말이 급하다. 거칠게 말한다. 날카롭게 말한다. 그래서 비인격적으로 공격하는 말을 하는 경향이 많다. 오늘 우리는 성숙한 인격으로 말하는 자가 되자.


2. 객관적으로 말하자
엘리후는 자기 개인 생각을 주입하는 대신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모델을 보여준다. 그래서 세 친구뿐만 아니라 욥의 문제점까지도 적나라하게 분석하며 지적해준다.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욥기 32:9-10)
자기는 나이도 어리고 인생의 연륜도 짧지만 자기 의견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호소하며 말한다. 특히 자기는 상대방을 억누르려는 의도가 아니라 세워주려는 뜻으로 말을 하는 것이라고 안심시켜 준다. 이에 비하여 우리는 너무나 주관적인 말을 쉽게 한다. 자기주장, 자기 철학, 자기 사상, 자기 방법을 주입하려고 한다. 특히 율법적인 신자일수록 자기 주관이 지나치고 세고 강하다. 미숙한 사람일수록 주관적이고, 성숙한 사람일수록 객관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배려하는 깊은 가슴의 사람이 되자.


3. 감동적으로 말하자
엘리후가 말하는 모든 내용은 개인적 사견이 아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다. 이것이 그가 세 친구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는 성령께서 자기 심령에 깨달음을 주신 애용을 말하는 것이라고 공감을 끌어내며 대호를 열어간다. 그러나 사람의 손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욥기 32:8)

그는 욥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주고 싶은 뜨거운 가슴으로 말한다.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욥기 32:18)

그래서 자기는 어느 한 편만을 두둔하거나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을 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순수한 동기를 설명한다.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욥 34:3-4)

그야말로 그는 가슴으로 소통하는 훌륭한 대화자다. 서양 격언처럼 "한 갤런의 쓴 약보다 한 방울의 꿀이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다." 이처럼 부드럽고 훈훈한 가슴의 언어가 효력이 있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무정한 시대에 카타르시스의 사람이 필요하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힘을 내는 가슴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옥한음 목사님은 카타르시스 목회를 하라고 간곡히 당부하셨다. 현대인들은 가슴의 감동을 박고 싶어 한다. 컴패션이라는 긍휼 사역 선교단체를 이끌어가고 있는 서정인 목사님은 너무나 훌륭한 감동의 사람이다. 그는 언제까지 꼭 필요한 상황에서 눈물을 보여주는 카타르시스의 사람이다. 나부터 이런 사랑의 성품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한다.


4. 희망적으로 말하자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세 친구의 말은 너무나 이성적이고 잔혹했다. 지나치게 율법적이었습니다. 정죄 그 자체였다. 그야말로 언어폭력이었다. 절망만 시켰다. 그런데 엘리후의 말은 불안과 탈진 상태에 있는 욥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시켜 준다. 희망을 품게 한다. 엘리후는 욥에게 크고 좋으신 하나님을 대망하게 한다. 모든 것을 회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도록 해준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분의 은총으로 행복을 회복해주실 것이라는 희망의 복음을 말해준다.(33:26) 그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이처럼 엘리후의 상담은 욥에게 두 가지 M자로 압축할 수 있다.
-Mercy of God is great. 하나님의 긍휼 하심이 크다.
-Majesty of God is great. 하나님의 장엄 하심이 크다.

그래서 엘리후는 37장 결론에서 이렇게 희망찬 결론을 내린다.(22~24절) 『하나님은 찬란한 금빛 광채로, 북쪽 잿빛 하늘을 밝게 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희망적이고 복음적인가? 욥에게 미래 회복을 기대하게 해주는 완벽한 치유상담이다. 그야말로 가슴을 터치하는 성품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엘리후가 등장함으로 깊은 영적 침체와 탈진에 빠졌던 욥이 드디어 회복되기 시작한다.

엘리후는 성령의 감동으로 욥의 내면세계를 치유해준다. 그의 멍든 가슴과 골이 패인 앙금이 치유 받을 준비를 시켜준다. 욥이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도록 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복 은총을 대망하도록 준비시켜준 것이다. 엘리후는 욥에게 인생의 어두운 밤이 지나가면 밝은 새 아침이 온다는 희망을 심어준다. 고통의 밤 저 건너편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새벽이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즉 삶의 질곡을 통과하기만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보상은총이 주어짐을 내다보라는 희망의 복음을 말해준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모델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흘러 넘쳤다. 바리새인들은 지식적으로, 교리적으로 잘 가르쳤으나 가슴을 터치해주지 못했다. 그러니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더욱 힘들고 지치게 만들었다. 자존감마저 무너뜨렸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축복과 은혜가 흘러넘치는 감동이 있었다.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주었다. 지친 영혼과 상처 받은 가슴을 어루만져주시고 보듬어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모두가 은혜를 받고, 압박과 억눌림에서 고침 받고 자유함을 얻었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이 가슴을 터치해주는 사람이 되자.

- 조봉희 목사(지구촌교회 담임, 디모데성경연구원 자문위원)-

첨부파일440x210_hands-touching-each[1].jpg (38.4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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