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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사람들을 향한 관심 [사람을 세우는 사람 229호]
   조회수 274
2019-09-10 17:10:08

등록일 : 2013/08/13 15:31





<불의한 사람들을 향한 관심>

 

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향하여, 혹은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하여 ‘불의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현재 모습을 바라보며 세상 사람들이 ‘불의한 무리들’이라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일부 건강하지 못한 몇몇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 전체를 공격하는 시각에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싸워야 할 필요성도 못 느낀다. 그러한 비난 앞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공동체는 성경의 가르침과 뜻에 비쳐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가 회개하며 다시 한 번 회복해야 할 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공동체가 사람에 대한 편견을 만드는 것 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여기서 말하는 편견이란 사회, 문화, 도덕적인 시각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이 복음이 필요하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의 망각을 말한다). 그것만큼 자신과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편견을 근거로 사람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저 사람이 우리 교회에 나온다면…..” “지금 우리 공동체에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데…..” 물론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기 위한 기능과 역할의 측면에서는 필요한 고민이라 생각도 되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향하여나 공동체를 바라보며 득과 실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지 않는 것임은 틀림없다.

우리에게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이러한 편견이 우리의 내면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사람에 대한 관심, 특별히 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그 결과 예수님이 그토록 책망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외식의 종교성 안에 자신을 숨겨놓은 사람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들은 나름의 명분과 논리로 세리들을 매국노의 영역에 가두었다. 자신들의 율법의 기준에 못 미치는 이들을 죄인들로 취급했다. 매국노가 애국자가 되도록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죄인들이 의인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가슴으로 그들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다. 오히려 편견이 있는 이들에게는 진지한 회개를 촉구하며 강력한 메시지를 주셨고, 이 편견의 희생자들(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러한 매국노나 죄인들이 다시금 애국자나 의인의 길로 들어설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을 향하여서는 발걸음을 옮기시고 팔을 벌려 품어 주셨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통념속에서 불의한 무리이라 정죄된 이들을 향한 무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끌렸다. 그분께 다가왔던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교(D. Phil., 구약학)에서 신학을 하고 펜실베이니아 주 하트필드에 위치한 비블리컬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는 데이비드 T. 램은 자신의 저서 『내겐 여전히 불편한 하나님 God Behaving Badly, p.208』(IVP 2013) 에서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의 관점에서 ‘불의한 무리’  의 측에 속했던 세리, 죄인, 창녀들과 같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께 끌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첫째, 예수님은 이야기하셨다. 누가복음 15장 이후 몇몇 장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비유에 비유를 거듭하여 말씀하시는 진정한 이야기꾼이셨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드라크마, 돌아온 탕자, 약삭빠른 청지기, 부자와 나사로, 불의한 재판장, 그리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마지막 세리의 비유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었다(눅 18:9~14). 사람들을 배척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올 수 있도록 하셨다.

 

둘째, 예수님은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찾아다니셨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 잃어버린 양의 비유다. 목자(예수님)가 양 아흔아홉 마리(바리새인?)를 남겨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세리와 죄인)를 찾아다녔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무리를 쫓아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까이 가셨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듯 그들을 찾아다니셨으며, 틀림없이 그들은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관심을 느꼈을 것이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 되신 하나님 개념은 구약의 에스겔서로부터 나온다(겔 34:11~16).

 

셋째,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셨다. 비유에 등장하는 목자처럼,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사랑하셨기에 그들을 찾으면 잔치를 여셨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더불어 먹고 그들과 더불어 축하하신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들은 예수님께 끌렸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이해한다면, 조직폭력배들과 창녀들이 그분께 끌린 것은 놀랍지 않다. 놀라운 것은 오늘날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본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혐오감이나 심지어 반감이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가깝다.

 

지금 당신은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누구를 찾아다니는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첨부파일jesus-reaching-out.jpg (40.3KB)2013-08-12_불의한_사람들을_향한_관심.docx (18.2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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