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호소하는 기독교 신앙은 과연 맹목적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신앙을 정의할 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불문하고 어떤 것을 믿음을 뜻한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정의와는 정반대의 이야기이다. 예를 들면, 요한복은 8:32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진리에 대한 질문을 무시하라거나 단순히 맹목적인 신앙을 뜻하는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22:34~40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유도신문을 하였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님은 마음을 잠가 버리고 그냥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베드로전서 3:15에서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라고 했다. 또 바울도 디모데에게 조언하기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라고 하였다. 기독교는 진리에 호소한다. 그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역사적 사건인 부활에 기초한다. 또한 신앙을 더욱더 지적으로 이해함에 따라서 성령께서 더 많은 믿음을 주심을 발견한다.
신앙은 100%의 확신 없이도 합리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가 비행기를 조종할 때 나는 그것이 추락하지 않으리라고 100%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불확실한 우주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사물들은 변하고 잘못되기도 한다. 아무것도 100%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것을 100%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신이 그것을 점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질문한다. “당신은 나에게 어떤 의심도 생기지 않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럴 때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질문한 사람은 “봐요, 당신은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이 말은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믿음은 맞다. 그러나 맹목적인 믿음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한다. “잠깐만, 당신은 100%의 확신으로 부활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그 사람은 낄낄 웃으며 말한다. “보시오, 당신은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는 것 뿐이요.” 즉,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뜻이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가 가변성 때문에 비행이 안전할 것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비행기를 점검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아무것도 점검하지 않고 그저 비행기 속에 들어가서 이륙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이요 맹목적이다.
믿음은 비행기를 점검하는 데에 있다. 압력 장치를 조작해 보고 공기를 점검한다. 비행기가 안전하다는 99%의 확실성을 얻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런 후에 비로소 비행기를 조종하며 몸을 맡긴다.
그것이 지적인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지적이어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기 전에 그분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라. 역사적 증거를 보고 성경에서 보도하는 그분의 기적, 부활, 그분의 가르침을 보라. 맹목적으로 믿지 마라. 당신의 믿음의 대상을 알아야 한다.
성령은 우리를 지적인 믿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성경적이며 다양한 역사적 증거를 사용하심을 믿는다. 그리스인의 믿음은 맹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대단히 지적이다. 감정은 지성이 거부하는 것을 즐거워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식을 위해서 지성을, 선택을 위해서 의지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감정을 주셨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과의 최대의 관계성 가운데 작동될 필요가 있다.
- 위의 글은 조쉬 맥도웰(크리스찬 다이제스트)의 글을 옮긴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