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 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해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때론 지루하고 외로운 길이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때론 즐거움에 웃음짓는 나날이어서
행복하다고 말해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위의 시는 자신의 노래 속의 ‘사랑’은 바로 예수님이 주인공이라 말하는 가수 이주호(해바라기)씨의 노래 속에 담긴 고백이다. 참 아름답다! 그리고 감사하다! 그런 분이, 그런 사람이 있어서 말이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함께 하며 동행하고 싶어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역경과 고난에 대해서도 굳은 각오와 함께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힘겨운 상황에 함께 하며 같이 있어주는 것을 통해 서로 간의 사랑이 검증되고 확인되기도 한다.
반대로 사랑한다 말하고, 당신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막상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면 나 몰라라 돌아서거나,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볼 때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존재하는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베드로는 주님께 멋진 고백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말뿐이었다. 그 고백에는 어쩌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해, 배려가 담겨 있지 않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와 같은 낌새(?)가 느껴진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을 향한 주님의 반응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책망이었다.
당신의 고난에 길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며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말한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세 번째로 고난에 대해 말씀을 하실 때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인사청탁을 한다(마 20:21)”.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다툼으로 정신이 없었다(눅 22:24).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주님의 길을 가로막았던 베드로의 좌충우돌 모습은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의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말은 마치 “아니!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요!”라는 말처럼 들린다. 자리다툼에 정신이 없던 제자들의 발을 예수님께서 몸소 씻기시며 섬김을 가르치실 때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라(요 13:8)”고 말한다. 이 말은 마치 “이러시면 안되지요!”라며 세상의 조직과 권력을 더 흠모하기에 자발적 섬김의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는 또한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때 검을 빼 들고 말고의 귀를 친다(요 18:10). “제가 해결하겠습니다!”라는 생각으로 무력을 사용했지만, 도리어 그것은 죄 없던 예수님을 폭력 주동자로 빠뜨리는 위기를 자초한다.
그렇다! 사람의 일에 대한 생각은 도리어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고 다른 위기를 연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그릇되게 한다.
제자란 예수님을 따르는 이를 말한다. 그분과 함께 거하며, 그분에게서 배우며, 그분과 같은 길을 걷는다. 그러기에 제자의 삶이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지, 예수님을 인도하는 삶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삶이지 예수님을 가르치는 삶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희생하는 길로 가는 것이지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기를 추구하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통해 진행되고 완성된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일은 당신이 직접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계획된 그 길을 묵묵히 걸으심으로 이루고자 하셨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자기를 추구하는 삶이다. 내가 원하는 넒은 길을 가려 한다. 내가 원하는 화려한 일만을 하려 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때를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 우리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도리어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가로막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이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진정 사랑을 담은 고백이었다면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가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주님) 함께 간다면 좋겠네….이리저리 둘러 봐도 제일 좋은 것 그대(주님)와 함께 있는 것….그대(주님)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이러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고난주간의 한복판에서 주님도 더욱 흐뭇하게 미소 짓고 계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