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Home / 칼럼
page-visual_title

칼럼

글보기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는 삶 [사람을 세우는 사람 267호]
   조회수 533
2019-09-11 11:41:20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하고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저술한 현각스님이 서울의 지하철을 이용하다 경험한 이야기이다.

 

저는 가끔 서울 지하철을 탑니다. 미국 지하철보다 깨끗하고 좋지요. 그곳에서 저를 너무나 사랑하고 내가 가는 길을 너무나 걱정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1년 전 어느 날, 지하철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할렐루야, 할렐루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사람은 제 앞에서 멈춰 서서 얼굴을 보더니 '미국 아저씨, 코 큰 미국 아저씨! 왜 안 믿어, 왜 안 믿어'하는 것입니다. 어우! 나 그때 충격받았어요. 그 사람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 목이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한마디 했지요.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안 믿어'

 

"당신 때문에 믿게 되었어요!"라는 말이 들려야 할 텐데 "당신 때문에 안 믿어!"란 말을 더 많이 듣는 시대 속에 살고 있진 않은가? 어쩌면 이것이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근본 원인일 수 있다. 한 사람, 더 나아가 교회의 선한 영향력이 드러나야 하는데,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력이 더 크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도나 교회의 위기는 교회의 거룩성이 훼손될 때 찾아온다. 세상에 거룩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데 도리어 영향을 받거나 세상이 성도의 삶이나 교회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회복하고 드러낼 수 있을까?

 

 

  첫째, 낮은 자의 삶을 살자

  예수님은 우리에게 상석이 아니라 말석에 앉으라 말씀하셨다.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삶을 살라고 직접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써 직접 본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그러한 가르침을 삶에 적용하며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을 꿈꾸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자신의 삶의 유익과 성취에 더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나,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자신을 높은 자리에 올리고자 부단히도 애썼던 제자들의 모습처럼 말이다. 스승은 앞으로 짊어질 고난과 죽음을 바라보시며 그것을 통해 성취될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과는 아무 상관 없는 삶의 태도를 보인 그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높아지고자 하면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거나 그분을 알아가기가 쉽지 않다. 높은 자리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오신 그분처럼 자신을 낮추고자 할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우리를 향하여 섬김을 삶으로 살아내시며 직접 보이신 이유는 스스로 낮아질 때 결국 하나님이 높여주심을 경험하고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성공하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마음을 다 내려놓고 내 앞의 한 사람, 내 주위의 사람과 사회를 적극적으로 섬길 때 그 영향력은 더욱 선하고 강력하게 드러날 것이다.

 

  둘째, 자족하는 삶을 살자

  밥 무어헤드 목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역설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더 많이 쓰지만 덜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사지만 덜 즐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큰 집을 갖고 있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습니다. 우리는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줄어들었습니다. 우리는 소유는 늘었지만, 가치는 줄어들었습니다. 우리는 돈을 버는 법은 배웠지만, 삶을 사는 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시간은 연장했지만, 그 시간에 삶은 채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더 큰 일은 했지만, 더 나은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수입은 높아졌지만, 도덕은 낮아졌습니다. 지금은 가파른 이익과 얕은 인간관계의 시대입니다. 지금은 더 고급스러운 집과 깨어진 가정의 시대입니다. 진열장에는 더 많은 것들이 놓여있지만, 창고에는 아무것도 없는 시대입니다.

 

  이 글은 끝없는 만족을 추구하며 방황하는 오늘의 시대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역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당신은 자유로운가?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만족할 줄 알라 말한다. 자신 또한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을 배웠고 이 자족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고백한다.(빌 4:11-12)

 

  끝없는 만족을 위하여 삶을 소비하는 자가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공급 하심을 경험하고 증명하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스스로 노력하여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함정이다. 거기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 성실한 삶으로 대처하며 주어진 모든 것에 자족하는 마음과 태도는 우리를 향한 또 다른 하나님의 최선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더 높은 단계를 향하여 끝없는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삶의 환경을 스스로 한 단계 낮추는 자족의 삶을 통해 다른 이에게 유익을 흘려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된다.

 

  셋째, 좁은 길을 걷자 

  세상의 유행과 가치관을 따라가는 길은 화려하고 넓은 길이다. 그 흐름에 편승하며 걷는 것은 어려운 길이나 삶이 아니다. 세상 가치관에 익숙한 사람들과 같은 삶의 방식을 취하는 삶에는 구별됨이나 매력성이 묻어나오지 않는다. 세속적인 가치관들이 끝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이 세상의 문화를 경계해야 한다. 경계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거슬러야 한다. 절대 기준을 상실하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성경의 가치관을 통해 '예' 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며 하나님께로 부터온 것을 향하여 자신의 삶의 기준을 맞추고 묵묵히 사는 삶이 좁은 길을 걷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약점은 정답은 아는데 그냥 아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알고는 있는데 그 정답대로 살지 않는 이 약점에 발목을 잡혀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며 소리 지르며 환호하던 화려한 길을 마다하고 골고다를 향한 좁고 험한 길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 직접 말씀하신 그 길을 걸어가셨다. 이 길은 예수님의 길일뿐만 아니라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생명력을 지니고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걷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길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영광스러운 길이다. 이 길을 걸을 때 때론 믿음 없는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서도 넓고 화려한 길을 꿈꾸던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화려함이 기준이 아니다. 그 길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그 길을 걸을 때 그 길 끝에서 영광의 주님과의 멋진 재회를 하게 될 것이다.

첨부파일social-influence.jpg (140.8KB)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장바구니

등록된 상품이 없습니다
합계: 0

고객지원

디모데성경연구원은 고객의 의견을 소중히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