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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약속 [사람을 세우는 사람 269호]
   조회수 320
2019-09-11 11:50:06

등록일 : 2014/05/19 13:2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무조건적이다. 사람의 약속은 대개 조건적이다. ‘무엇을 하면’이란 조건이 따른다. 우리가 하는 약속은 모두가 조건이 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조건이 없다고 말한다. 무엇을 근거로 감히 이런 선포를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그 아브라함을 은혜로 부르셨다. 그런데 신기하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그 땅을 떠나라고 하니까 떠났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땅을 주겠다, 복을 주겠다, 자손을 주겠다.’ 세 가지를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떠난 후에 10년이 지나도 아브라함에게 생긴 것은 재산이 약간 늘어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면 뭐합니까? 저는 상속자 아들도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서 하늘의 별들을 보시며 “저 별들을 네가 셀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브라함은 “셀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네 자손이 저와 같이 많아 질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 했을 때,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다. 이를 창세기 15장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신지라.”

 그 말씀을 마치신 뒤에 하나님이 또 하나의 약속을 합니다. “내가 너에게 땅을 줄 거야.”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질문을 한다. “하나님, 내가 땅을 받을 줄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제사를 말씀하시며, 3년 된 수양과 암염소와 집비둘기를 제물로 준비하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뛰어가 그 짐승을 다 잡고 나서 신기한 일을 행했다. 그 짐승들의 절반을 정확히 갈라서 양쪽으로 늘어놓고 누군가를 기다린 것이다. 바로 하나님이다.

 이 것은 최근에야 비로소 올바로 해석되어졌다. 고고학을 통한 문서가 많이 발견되면서, 아브라함이 살았던 문화적 배경이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중요한 약속을 할 때, 국가와 국가 간에 언약을 맺을 때는 반드시 이 예식을 행했다. 보통 중요하지 않은 약속은 말로 했다. 그런데 중요한 약속은 반드시 짐승을 잡아서 반으로 잘라놓고 두 계약자, 두 약속자로 하여금 그 사이를 지나가게 했다. 그 의미는 ‘우리 둘 가운데 누구든지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짐승과 같이 찢어짐을 당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속히 알아들었다. ‘하나님이 나와 약속, 언약을 맺기 원하시는구나.’ 그래서 짐승을 다 잡아놓고 하나님을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15장을 보니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깊이 잠들게 했다. 하나님을 기다리다가 아브라함이 잠들고 있는 그 사이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 혼자 그 사이를 지나가셨다고 창세기 15장은 말씀한다. 어떻게 된 것인가? 하나님이 계약하자고 하시고서는 두 사람 다 지나가야 하는데 어찌하여 하나님 혼자 지나가신 것일까? 왜 아브라함을 잠들게 했을까?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중요한 약속을 맺으셨는데, 그 약속은 조건적인 약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쌍방의 약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혼자 일방적인, 무조건적인 약속이라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지나가시고, 아브라함이 지나가면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언약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죽을 주마.’라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지나가면 언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이 순종하면 그 복이 아브라함의 것이 되고, 아브라함이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그 약속은 조건적인 언약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다 한들 하나님은 아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행위로 받을만한, 순종으로 받을만한, 그의 삶으로 받을만한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 누구라도 감히 그의 행위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아, 내가 네게 복주기를 약속한다. 그러나 이 약속은 너의 행위와 상관없는 것이다. 너의 순종과 상관없는 것이다. 내가 일방적으로 네게 복을 주마. 내가 은혜를 베풀겠다.’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홀로 그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약속이 어떤 약속인가? 무조건적인 약속임을 기억하자.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 엄청난 약속의 의미를 모르고 자기 행위로 약속을 받아 보려고 노력한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자신의 약속의 당사자로 삼으셔서 지나가게 하신 일이 없다. 그러면 이 약속은 누구에게 임하나? 하나님이 이 약속을 누구와 맺으셨는가? 이 복을 받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다. 그것이 아무리 무조건적인 약속이라고 할지라도 약속에 참여한 자만이 그 약속의 복과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누가 참여할 수 있는가? 아브라함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한 사람 여기에 포함시키셨다.

 하나님이 약속의 대상으로 한 사람을 더 추가하셨다. 창세기 17장, 22장을 보면 계속해서 이 약속이 반복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과도 약속을 맺으셨다. 그런데 그 자손이 누구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식을 행할 때에 우리를 참석시킨 일이 없다. 단 두 사람과만 약속을 하셨는데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런데 그 자손의 단어를 쓸 때 놀랍게도 ‘자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자손‘이라는 단수를 썼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도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신기한 것은 여자의 후손이 단수로 쓰여 졌다는 것이다. 사단의 머리를 박살 낸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가? 뱀이 물었던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 질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식에 참석시킨 아브라함의 후손을 단수로 쓰셨다. 그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혈통을 이어 받아서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그분이 곧 그리스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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