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떻게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사도바울은 이것을 갈라디아서 5장에서 두 가지로 말하였다. 18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라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라고 하였고, 16절과 25절에서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며 성령을 좇아 살라고 하였다.
이 말은 비슷한 말 같지만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이상하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라’ 하는 말씀은 수동태, ‘성령을 좇아 살라’ 하신 16절과 25절의 말씀은 능동태이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다.
인도는 누가 하는가? 성령께서 하신다. 따르기는 누가 따르나? 우리가 따라야 한다.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말은 성령께 다 맡기고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인도는 성령께서 하시나 내가 능동적으로 따라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 성령의 소원에 나를 맞추어 살아야 한다.
현재 시제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은 과거 어느 한 시점에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고 매일 매 순간 우리가 성령의 지도에 따라야 함을 의미한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의 ‘인도’라는 단어는 농부가 소를 인도할 때,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호위병이 죄수를 인도할 때, 바람이 배를 인도할 때에 쓰인다. 이것은 무슨 말씀인가? 우리 모두는 성령의 인도도 받을 수 있지만, 사탄의 인도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의 인도를 받을 것인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고 명령하신다.
‘좇아 행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걷다’라는 말이다. 걷기는 걷는데, 내 마음대로 걷는 것이 아니고 줄을 맞추어서 걷는 것이다. 군사들이 제식훈련 때 똑바로 걷듯이 말이다. 그 정해진 줄 안에서 걷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소원을 주시는 것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모든 소원을 우리에게 넣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한 성령의 소원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인도는 누가 하나? 성령께서 하신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간단하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에 맞추어 살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농사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을 수 있을까? 정과 육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우리 안에 주시는 성령의 소원에 따라서 맞추어 살아야 한다.
혹시 유혹 가운데 있는가? 성적 범죄 속에 거하고 있는가? 음란의 관계를 계속 가지고 있는가? 호색하지는 않는가? 더러운 것에 머물지는 않는가? 악한 생각을 품고 있지 않는가? 시기와 질투와 악독과 탐심의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 모든 생각을 단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성령께서 마음속에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는가? 배우자에게 먼저 사과하라고 말씀하지 않는가? 누군가를 용서하라고 성령께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권면하고 계시지 않는가? 자녀와 가족을 조금 더 사랑해 보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우리 마음에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그 사람을 끝까지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주셨듯이 사랑해보라고 성령께서 속삭이지 않는가? 성령께서 어떠한 죄를 지적하시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돌이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성령의 말씀에, 성령의 소원에 맞추어 살아가자.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을 따라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 풍년이 든 들판을 바라보며 알곡을 모아 들인 농부가 그 창고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듯 우리 모두 주님과 사람들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