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에 대한 두 가지 견해
요즘 우리 국민들이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변화이다.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를 보더라도 변하지 않고서는 안 될 위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주변에 발생하는 숱한 일들을 보면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 주변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갈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갈망하고 노력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변화를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변화를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없이 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기 때문에 변화를 체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그 변화에 대한 갈망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성도가 되어야 할 텐데,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야 할 텐데,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고 소원이다.
우리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에 관한 견해는 수십 가지고 나뉘며, 크게 두 가지로 요약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사람이 밖에서부터 안으로 변화된다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정반대로 안에서부터 밖으로 변화된다는 주장이다. 전자는 우리가 조금씩 우리의 행위를 교정함으로써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 밖의 종교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수없이 들어와 있다. 겉으로는 기독교를 믿는 것 같지만 성경을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가만히 관찰하면, 교회 다니면서도 인간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교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견해는, 사람은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밖으로 변화돼간다고 말한다. 근원적인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행위를 약간 고침으로써 우리가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가지를 쳐봐야 소용없다. 뿌리를 고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주장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파악하라
첫 번째로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과 종교는 올바른 진단을 내리지 않는다. 인간이 누구이며, 죄가 무엇인지, 오늘 우리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내지 않고 있다. 그렇게 처방하니까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병든 우리가 당신 앞에 찾아갈 때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얘야, 우리가 우선 원인이 무엇인지 규명하자.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토론하자. 너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자신이 의원이라고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해결책이 없다. 예레미야는 처음에 자기가 의로운 줄 알았다. 그래서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다. ‘목사니까 나는 이만하면 의롭겠지.’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영감이 그에게 임하더니, 예레미야는 그동안 자기가 쌓은 의를 환상 가운데 보기 시작했다. 예레미야는 너무 놀라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오! 하나님, 내가 쌓은 의가 더러운 옷과 같군요.”
이사야는 어느 날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러 성전 앞에 갔다. 사회가 너무 타락했다. “하나님, 이 사회를 고쳐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이 그에게 임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처음으로 올바로 파악했다. 이사야가 자기의 모습을 보고서 “오! 주여, 나는 부정한 자로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받아들여라
우리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 먼저 내 모습을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이것을 하나씩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기 위함이라고 율법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율법을 그런 의도로 주신 적이 없다.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셨는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종합해 보면 이유는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기준이 없으면 잘못된 것이 없다. 정답이 없으면 오답이 없다. 과녁이 없으면 명중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다. 인생의 정답을 주셨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딱 하나이다. 율법은 형벌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만들었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율법의 요구는 아무리 작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죽음으로 그 죄를 갚아야 한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셨다. 그것은 바로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그 분을 예수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 그 분은 우리와 다른 제 2위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너희들이 지급해야 할 율법의 요구, 너희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죄의 형벌을 내가 대신 다 갚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어도 그리스도 십자가의 못 박히심 안에 나를 동참시키신다. 내가 그 분과 연합한 것이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 인간이 변화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받아들이면 가능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라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성경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요구하신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라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다.
성경의 진리는 간단하다. 우리는 가지이다. 가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친히 손을 대신다. 썩어버린 그 뿌리에서 우리 가지를 잘라내셔서 건강한 뿌리에 접붙임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뿌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꼭 붙어 있어야 한다. 그 뿌리를 통해서 수분을 주시면 내가 물을 마셔야 하고, 영양분을 주시면 영양분을 먹어야 하고, 비타민을 주시면 비타민을 먹어야 한다.
오늘 접붙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 많지만, 주님께 제대로 붙어서 뿌리와 강하게 연결된 그리스도인이 적다. 구원받고 나서 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 뿌리와 상관없이 살아간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비극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 그분이 오셔서 내가 달려야 할 그 자리에 대신 달리시고 돌아가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에 접붙임을 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 우리의 입술을 하나님이 주장하고 계시는가?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이 관장하고 계시는가? 우리 돈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살아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