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을 거두라
고속도로에서 속도위반으로 걸린 운전자의 궁색한 변명을 보면 “속도를 제한하는 아무런 표시도 보지 못했다. 도로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다. 제한 속도를 초과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해서 그랬다. 다른 사람들도 속도를 위반하는데 왜 나만 잡느냐? 차량에 이상이 생겨서 그랬다. 화장실을 가야 해서. 급한 일이 생겨서. 과속이긴 했어도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였다. 아마도 속도위반으로 단속에 적발된 운전자 중에는 이러한 변명을 자연스럽게? 경험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류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변명’ 일 것이다.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렸던 것처럼, 인류는 ‘자기변명’ 뒤로 자신을 숨기는 일들을 이어오고 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란 하나님의 찾으심에 대하여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라 말하며 반응했다. 여인 또한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 말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았어도, 누구한테 배우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인류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변명’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변명도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400년 동안 속박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기 위한 계획을 진행하실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지만, 그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시지만, 그는 “슬프도소이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니 이다”라 말한다. “큰 용사여!” 하고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찾아오지만, 그는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아비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 말한다. 니느웨를 향하여 부르심을 받은 요나는 단순히 말로 변명하는 것을 뛰어넘어 아예 행동으로 표현하며 다시스로 도망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그들의 변명을 거두게 하시고 변명할 당시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역사를 눈으로 목격하며 경험케 하신다.
쉽지 않은 여러 가지 현재의 삶과 사역의 현장 속에서 당신은 혹시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가? 변명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는 않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변명거리로 삼는 세 가지의 대상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는 여자가 열매를 주어 먹었습니다”라 했던 것처럼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하나님 탓을 하며 변명을 늘어놓을 때 주로 표현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일 것이다. 이 표현 속에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변명이 함축되어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이다.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라고 고백했던 것과 같다. 자기의 초라한 모습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김으로 하게 되는 변명이다. 이 변명은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를 만드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꾸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하려 한다.
셋째는 상황이다. 이것은 하와가 “뱀이 나를 꾀므로….” 라 말하는 것과 같다. 상황을 탓하는 것이다. 즉,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저히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라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황과 그 속에서 등장하는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왜 이러한 변명을 하는가? 그것은 상황을 통제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결국 자기 자신의 초라함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 결과 하나님은 자신의 이성의 한계에 가두어 버리고 결국 상황은 크게 확대함으로 상황 탓을 하게 된다. 성경에는 많은 변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변명을 용인하시지는 않는다. 변명했던 사람들이 결국 그 변명을 거두어들이게 하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경험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을 그들을 통해 이루어가신 것을 보게 된다.
한국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많은 영역에서 어렵고 힘들다는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다. 어렵고 힘겨워하는 신음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교회는 어떠한가? 사역의 현장은 어떠한가? 안 될 수밖에 없고, 힘들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가장 쉬운, 그러나 가장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변명’이다. 지금은 각종 변명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오해 걷어내고, 자기를 만드신 분과 상황을 통제하시는 분이 누구 신지를 깊게 묵상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