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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세우는 사람 130호] 십자가를 경험하라
   조회수 387
2019-09-04 14:42:13

등록일 : 2011/04/18 17:53



십자가를 경험하라!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똑똑히 보라! )

토저는(A.W. tozer)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내려 놓는 바로 그 부분이, 자기 문제의 근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지기를 거부하는 십자가의 한 부분,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 받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 십자가가 가벼울수록 우리의 증거도 상대적으로 무기력해진다. 십자가 아래 서게 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밝히 드러나는 인간의 모든 욕망, 죄 그리고 자기만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의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감사하게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담당한 분이심을 겸손히 고백하며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진노를 거두어 주신 곳도 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다른 누구보다도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3:25~26)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버지께 고귀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처럼”( 5:2) 우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역설하고 있다. 사전에 합의된 계획에 따라 고난을 감수하려는 아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요,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었다.

‘누가 예수님을 죽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유대인들’도 ‘빌라도’도 아닌 ‘하나님’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고난 속으로 밀어 넣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2:23) 유대인에게 내어준 바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다.

왜 아버지는 이러한 일을 하셨을까?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과 죄인들에 그분의 사랑, 이 모순을 해결하시기 위해 그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난 일을 단지 과거의 것으로 돌리고 모르는 체 할 수가 없으셨다. 그래서 만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기로 계획하고 합의하신 것이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지셨다. 죄 그 자체는 몸서리쳐질 만큼 불쾌한 것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셔야만 했다. 하나님의 타협할 수 없는 거룩함과 그분의 사랑, 이 두 가지 속성을 온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였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인들을 용서하신다는 말을 듣는다.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키는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의가 만족될 때까지는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실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인 진리는 명백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방패 삼은 자들만이 구원을 얻는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의가 그들에게로 옮겨진 자들만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

오늘날에도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일컫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죄인들을 위해 피 흘린 예수님의 못 자국이 없다. 또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행복하고 더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말해 주는 교사와 스승도 많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의 내적 자아와 만날 수 있는지’ 그리고 종교와 상관없이 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 준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못 자국을 지니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를 전능자와 화해시키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직접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신 그 하나님을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했다. 이 구원의 중심 사건은 불가능한 것을 변화시킨,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다. 실제로 천국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으로 인해 변화되었다. 피는 사라졌지만 그 못 자국은 우리 죄를 상기시키고 그분은 은혜의 증표로 남아 있다.

십자가를 피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혜도 경험할 수 없다. 십자가는 역사의 문이 움직이는 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여러 목적이 마치 수레바퀴살처럼 한곳에서 모이는 공간이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이것을 지적했고 신약의 사도들도 이것을 외쳤다. 익숙한 찬송가의 메아리처럼 우리가 ‘험한 십자가를 붙들 때’ 그것은 단순히 감상에 젖어 하는 가벼운 행위가 아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 메시지의 핵심이며 침노하는 어둠과 싸우기 위한 우리 힘의 원천이다.

예수님 최후의 말씀

마지막 말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처럼 중요한 말은 없다. 그 말씀에서 우리는 자기 백성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외침 속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의 상처를 감싸기 위해 그분의 상처는 감싸지지 못한 채 드러나 있었다. 우리의 슬픔을 없애기 위해 그분은 큰 슬픔을 겪으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예수님에 대래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보다도 상하였으므로”( 52:14). 예수님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는 모함과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 당시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로마인들을 독려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 몸에 박힌 못을 보고 피 냄새를 맡으며 그분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옳다고 여겼다.

빌라도의 뜰에서 옷이 벗겨지고 손목이 기둥에 묶인 채 납구슬과 뼈 조각이 붙은 가죽 채찍으로 맞고 계신 그분을 떠 올려보라. 그 구슬과 조각들이 그분의 몸을 때릴 때 핏방울이 튀기고, 되풀이되는 채찍질로 인해 벌어진 상처 속으로 핏방울이 파고든다. 그리고 가시 면류관이 머리를 짓누르면 핏방울들이 엉클어진 머리카락과 뒤섞인다. 예수님은 끝까지 십자가를 지려 하시지만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비틀거리신다. 그러자 로마 군병들이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게 한다. 갈보리에서 그분은 옷이 벗겨졌다. 그리고 ‘수백만 개의 뜨거운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렬한 고통이 온 신경계를 뒤흔든다.’ 로마 군병들이 그분의 손바닥에 네모난 긴 못을 박은 후 그분은 마침내 십자가에 높이 달리게 된다. 신경 중추가 큰 손상을 입게 되어 ‘그분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경험한다. 몸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뼈저린 고통이 스며드는 일이 되풀이 된다.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왕이셨다. 그분은 위대함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엎으셨다. 십자가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바라볼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용서뿐만이 아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가장 깊은 상처까지 치유 받게 된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맞교환 되었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옮겨졌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서적인 짐들 역시 그분의 어깨 위로 전가되었다. 그분이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담당하셨다( 53:4~5). 이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불의가 해결되었다는 분명한 확신을 통해 우리가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는 증거다. 십자가야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이 경험하신 고통의 깊이를 그대로 느낄 수 없지만, 예수님의 상처를 동일시하며 느낄 수는 있다. 그리스도가 버림받은 것은 우리가 버림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분이 지옥을 경험한 것은 우리가 천국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는 “오늘날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의 상처로 벌어져 있다. 하나님은 그분과 멀어져서 다른 일에 빠져 있는 우리 모습을 보시며 가슴 아파하신다. 그분께로 가까이 가지 않는 우리를 안타까워하시며, 그분을 잊고 지내는 우리의 모습에 슬픔을 느끼신다. 좀 더 많이 가지려는 우리의 집착에 눈물 흘리신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에게로 나아오기를 갈망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묶이셨고, 나를 위하여 찢김을 당하셨으며, 나를 위하여 버림받은 바 되셨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새 생명으로 부활하셨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란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어떤 우상이다’라고 본회퍼는 말했다.

상처를 가지신 하나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외침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거룩한 땅에 서게 된다. 그분의 외침은 영혼의 가장 깊은 소망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고난을 보게 된다. 예수님이 최후의 고난을 받으시는 그 여정에 함께 동참해 보자. 우리는 이런 탄성을 지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똑똑히 보라!

- 위의 내용은 어윈 루처의『십자가를 바라보다』 내용 중 일부를 요약 편집하였습니다.)

 
첨부파일십자가를_경험하라.doc (37KB)130.jpg (688.5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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