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는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1954년에 역사가인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비합리성과 상대주의로 나아가는 서구 문명을 지적하기 위해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포스트모던’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던’이란 단어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현대 서구 문명의 뿌리는 17세기의 과학 혁명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미경과 망원경의 개발 그리고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의 발견 덕분에 이 세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었고,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 생겨났다. 18세기 계몽주의 아래 모더니즘은 정점을 찍었다.
‘계몽’이라는 단어는 서구 사회를 비추는 새로운 빛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새로운 ‘빛’이란 인간의 이성을 말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이해력이 아니라, 객관적인 이성으로서 계시나 초자연적인 영향에서 독립된 존재다. 이 이성은 오로지 과학적 발견과 경험적 증거로 증명되는 것에 기초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진리와 실재를 규명하는 새로운 방법이 등장했다. 진리는 더는 하나님의 계시나 교회 공의회를 통해 발견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 관찰과 측정 도구로 규명되었다. 시각, 촉각, 미각, 청각, 후각 등의 오감이 참된 진리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 때문에 과학적 합리주의는 진리를 결정하는 새로운 등대가 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과 기적, 초자연적인 사건은 설화의 영역으로 격하되었다.
현대로 넘어오자 낙관주의는 과학과 과학적 방법이 사람들이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믿음과 함께 자라났다. 인간 지성과 과학적 합리주의의 ‘진보’는 서구 문명의 발전을 촉진했다. 그리고 근대성은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과 함께 등장했다. 인간의 이성을 독립적인 개체로 높이는 동시에 초자연을 거부하면서, 인간 안에서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인간 중심적이자 물질적이며 합리적인 세계관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세기 후반 모더니즘의 낙관론은 포스트모던의 냉소주의로 변했다. 과학적 합리주의 방법으로 보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구시대적 근대 사상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는 인정받지 못했다. 인간이 객관적 진리를 결정하기 위해 생각해낸 모든 기준은 인간 이성의 주관적 산물인 언어로 표현되는데, 인간의 언어는 문화에 기반하고, 사회에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포스트모던 주의자는 ‘진리’에 관한 의구심을 제기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던 주의자는 보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진리를 다양한 사회와 문화 배경에 속한 공동체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진리를 이성과 과학의 방법으로 결정하는 모더니즘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직관과 본능을 진리를 결정하는 방법으로 수용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성과 다문화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은 객관적 기준의 존재를 부인했다.
전근대 서구 문명(중세 시대)에서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 곧 진리를 초자연적인 하나님과 이 세상을 향한 그분의 뜻 안에서 찾았다. 근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자 사람들은 절대적 진리의 기준을 거부해버렸다. 단지 특정 공동체가 자신에게 맞는 ‘기준’을 결정할 뿐이었다.
서구 사회는 현재 ‘무엇이 실제 참인가?’와 같은 과거의 질문을 답습하고 있다. 이 질문은 태양과 별들은 신이 아니라 ‘불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던 이오니아 철학자 탈레스 이후 200년에 걸쳐 고대 그리스인의 철학적 사고를 주도했다. 1992년 ‘가족계획 대 케이시’ 사건을 담당했던 저스티스 오코너, 케네디 그리고 수터 판사는 공동 판례에서 다음과 같이 자유를 설명했다. “자유의 핵심은 인간이 스스로 생명체, 우주의 의미 그리고 인간 삶의 신비를 규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는다. 자유를 이처럼 이해하면 낙태뿐 아니라 유아 살해도 정당화할 수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영원불변한 성경적 세계관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지 못한다면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영역에 상상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영성’에 대한 관심은 고조되었지만, 이 영성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런 기회를 선용하여 눈앞의 영적인 대화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모던 시대에는 불가능했지만, 이제 이웃과 직장 동료들과 공통점을 찾을 기회를 얻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바람을 타고 마르크스 주의나 인본주의와 같은 무신론적 세계관이 꽃을 피웠던 것 처럼, 포스트모더니즘 도한 서구 사회에 ‘대안 영성’과 범신론적 세계관의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다채로운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다. 현대의 모습은 마치 그리스 후기의 고대 아테네의 모습과 무서울 만큼 유사하다.
[위의 글은 크리스천 오버먼의 ‘어섬션’(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