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목회자 중 상당수가 건강을 위해 월요일마다 테니스나 골프, 자전거타기, 등산한다. 그러나 나는 허리와 목디스크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스스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못하게 되면 마음이 울적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이런 현상을 ‘Depression’, 침체라고 표현한다. ‘Depression’이란 정서적 침체, 의욕상실(de+pression)을 말한다. 기운을 뺀다는 뜻이다. 즉 ‘용기와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 또는 기가 꺾인 상태’이다. 좀 더 다양하게 풀이하면, 침울한 감정, 실망감, 슬픔, 만성적 피로, 권태, 무관심, 분노, 죄책감, 영적 퇴보, 의욕상실, 신앙의 저하 등을 말한다. 몸과 마음의 탈진이다. 그동안 명랑하게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울적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힘든 상황이 오래가다 보면 침체에 빠질 수 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몸이 오랫동안 아프거나 만성적 질환이 계속되다 보면 의기소침해질 수 있다. 하는 일이 잘 안 되고, 계속 악순환이 되면 의욕상실에 빠지게 된다. 너무 오랫동안 힘들면 침체할 수밖에 없다. 자연환경에서도 햇볕이 부족한 그늘진 곳에서 사는 사람이 우울증에 많이 걸린다. 이처럼 삶의 현실에서 자주 느끼는 침체는 누구에게든지 찾아오는 현상이다. 심지어 믿음이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침체에 빠진 적이 있다.
다윗이나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위인도 깊은 절망과 흑암의 침체 속에서 시달리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나 엘리야 선지자, 그리고 바울 같은 사람도 영적 침체를 경험하였다. 한때 영국교회에 놀라운 부흥을 일으켰던 찰스 스펄전도 깊은 슬럼프와 침체에 빠진 적이 있다. 그는 “나는 오늘 영국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인 메트로폴리탄 성전에서 웅장하게 설교하고 있지만, 내 마음의 상태는 고뇌와 상심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나의 영성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흔들리고 있으며, 나의 영성은 이상하게 저하되고 있으니 여러분께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처럼 훌륭하고 존경받는 스펄전도 이렇게 심각한 영적 침체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선구자 M. Luther도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여 지옥의 문턱까지 경험하였다고 고백했다. 그렇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마음이 가라앉을 수 있다. 영성이 저하될 수 있다. 심령이 우울해질 수 있다. 이런 현상이 욥기 3장에서는 매우 실제로 나타난다. 욥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공허 때문에 서글픈 외로움과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였다. 마음이 황폐해졌다. 피폐해졌다.
사람은 누구든지 힘든 상황이 계속되면 침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욥기의 적나라한 메시지다. 성경은 정직하다. 욥의 훌륭한 점을 칭찬하면서도 그의 약점도 있는 그대로 노출한다. 욥은 재산을 잃고, 건강도 잃고, 명예도 잃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래서 그도 인간으로서 정서적인 우울함과 영적 침체에 빠진 것이다. 욥은 자기를 위로해주러 온 친구들의 건장한 모습 앞에서 지금의 초라한 자기 모습과 비교해보니 자신이 너무나 서글프고 처량하게 느껴졌다. 감정적 혼란을 겪었다. 마음이 착잡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신앙적 회의가 느껴지며, 자학 증세까지 찾아왔다. 그렇다.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할수록 스스로 위축되고, 자괴감에 빠진다.
이처럼 욥은 망가진 몸과 멍든 심령으로 절망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더구나 하나님은 욥이 왜 그처럼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단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는 고난 중에 있었다. 이처럼 초점 없는 고난이 우리의 영혼을 더욱 침잠케 한다. 의욕을 상실케 한다. 심령을 황폐케 한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처량하여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욥기 3장을 자세히 보면 욥은 자학증세 현상으로 세 가지 부정적인 의문을 표출한다. 왜 내가 태어났나? (1~10절) , 왜 내가 살아났나? (11~19절), 왜 내가 살아야하나? (20~26절).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항변한다. 그리고 엄마가 자기를 출생할 때 차라리 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비관에 빠진다. 더 나아가서 그는 지금처럼 처참하게 고생하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염세주의에 빠져서 말한다. 자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의 무릎이 자기를 받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이미 죽어서 평안히 쉬고 있을 텐 데라고 우울한 탄식을 한다.(12~13절)
엄마가 자기를 임신했을 때 차라리 낙태되었거나 죽었더라면 이런 고생을 안 했을 것이라는 염세적 한탄을 한다. 죽음 예찬론자가 되었다. 그래서 욥은 고통이 부재한 영원한 세상을 더 부러워하기 시작한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도피처로 해석했던 것이다. 인생이 너무 힘들다 보니 욥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탄하며 비관적 회의에 빠진다. 그는 갈수록 깊은 슬럼프 상태에 도달한다. 본문 26절의 결론이다. “내게는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지고, 두려움만 끝없이 밀려오도다!” 한 마디로 그는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자기 신세가 한탄스러웠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침체의 근본요인이 무엇인지를 분석해 낼 수 있다. 본문 욥기 3장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가 어떤 단어를 많이 사용할수록 침체에 빠지는지 정확하게 규명해준다.
첫째, 「나」에게 집중할수록 침체하기 쉽다.
욥은 「나」라는 말을 20번이나 반복한다. 욥기 3장은 온통 「나는, 내가, 나에게, 나를」이다. ‘내가 왜 이런 운명이냐, 왜 나에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느냐?’라는 질문을 수없이 반복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모든 생각과 기준을 「나」에게 집중할수록 우울해지고 의기소침에 빠진다. 스스로 영혼의 어두운 밤(dark days)으로 들어간다. 먹구름 인생을 살게 된다.
기독교 사상가 파스칼은 이점을 깨우쳐준다. “불행의 원인은 늘 나 자신이 만든다. 몸이 굽으니까 그림자도 굽는다. 어찌 그림자가 굽는 것을 한탄할 것인가? 나 이외에는 아무도 나의 불행을 치유해 줄 사람이 없다.” 그렇다. 「나」에게 초점을 맞출수록 스스로 왜소해지고 의기소침해진다.
둘째, 「왜」라는 부정적 의문을 품을수록 침체하기 쉽다.
욥은 「왜」라는 말을 6번이나 반복한다. ‘왜 내가 태어났는가? 왜 내가 살아났는가?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회의적 질문을 반복하다 보니 스스로 위축되고 낙심한다. 성경을 통해 얻는 중요한 원리적 해답이 있다. 「왜」라는 부정적 질문을 할수록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라는 긍정적 질문을 할수록 희망이 솟아난다.
현대인들 20명 중 한 명은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먹구름 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명랑함 대신 울적함으로 침체하여 살아가고 있다. 안갯속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불안과 긴장으로 시달린다. 그래서 점점 더 절망의 구덩이로 빠져들고, 체념과 자학 증세를 보이며 마음이 황폐해진다. 그러나 우울증을 너무 과민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어떤 심리학자의 표현대로 ‘우울증이란 마음의 감기’에 불과하다. 영혼의 감기는 간단하게 치료받을 수 있다.
미국의 설교자 찰스 스윈돌은 디프레션을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디프레션은 나를 남루한 옷을 입은 선지자로 만들어 준다. 처음에는 초췌하게 보이지만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고 나면 하나님의 사람다운 영적 기개가 높이 드러나게 해준다.” 참 멋진 해석이다. 마치 흑운의 색깔이 짙어질수록 곧 소나기가 내리며 밝은 햇볕이 환하게 비추는 것과 같다. 인생의 먹구름 다음에는 반드시 은혜의 무지개가 떠오른다. 우리는 고통의 현실에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면 마치 하나님께서 더는 돌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 인생이 여기에서 끝난다고 스스로 체념하고 좌절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당신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으신다.
루마니아의 기독교 지도자 코리 텐 붐 여사는 자주자주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이 건져내지 못하실 정도로 깊은 절망의 구덩이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의 환경, 내가 지금 처한 어두운 상황, 나의 초라한 모습에 집중하지 말고 인생의 위대한 조각가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윗도 인생이 너무나 험난하고 힘들어 영적 침체와 디프레션에 빠지기도 했으나, 그가 침체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비결은 간단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영혼을 향하여 이런 역동적인 믿음을 선포한다(시편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시편 62편 5절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소망이 저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이시니. 오직 주만이 나의 산~성,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 나의 구원 나의 영~광, 하나님께 있으니,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 되시네. 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이시니. 오직 주만이 나의 산~성,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며 산다면 우리는 더는 인생을 고행으로 살지 않고, 여행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만큼 우리는 의기소침과 무력감에서 해방된다. 우울함이 아닌, 명랑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 회의적이 아닌, 희망차게 살아갈 수 있다. 비관적인 아닌, 낙관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빈곤의식이 아닌, 부유 의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욥이 나중에 영적 침체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23장 10절에서 힘차게 선언한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분이 아시기에, 그분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아픔을 치료해 주신다. 치료 후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고결한 성품의 사람으로 승화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의와 좌절의 골짜기에서 끌어내어 주신다. 복의 정상으로 올려다 주신다. 하나님은 여전히 행복한 미래로 나갈 수 있는 새 힘을 주신다.
욥기 3장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은 욥의 디프레션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꾸짖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욥의 탄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가슴으로 이해해 주신다. 욥이 잘 회복되기를 기다려주실 뿐이다.
욥기의 주제는 욥의 인내라기보다,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38장까지 기다려주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고통 중에서 신음하는 자들의 애환을 다 들으시고 이해해주신다. 다만 어서 속히 침체에서 헤어 나오기를 원하실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위로의 영으로 오신다. 회복의 영으로 찾아오신다.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신다.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어두운 밤에도 침체에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침체에서 헤어 나올 수 있다. 다시는 울적하게 살지 않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조봉희 목사(지구촌교회 담임, 디모데성경연구원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