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처음 출판될 때는 40만 단어를 수록했다. 그런데 현대사회가 발달하면서 언어의 숫자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지금은 61만5천 단어를 수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만큼 말을 많이 하며 산다는 현상이다. 그래서 신조어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2009년 3월에 출간된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매우 이색적인 단어 하나가 시선을 끈다. 영어로 ‘frenemy’라는 단어다. 이 말은 원래 1953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최근에 정식 표준어로 사전에 수록된 것이다. frenemy (friend + enemy)라는 뜻은 절반은 친구이고, 절반은 적이라는 혼성어다. 즉 사람은 얼마든지 친구이면서도 적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욥과 그의 친구들이야말로 frenemy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먼 거리에서도 고난 겪은 친구 욥을 위로해주러 찾아왔다. 참으로 우정이 돈독한 친구들이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욥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때려눕히는 적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욥의 친구들은 욥의 아픔을 공감하는 대신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이 4장부터 ~ 26장까지 계속 이어진다. 욥에게 얼마나 가혹한 공격을 연발하는지 갈수록 과격해진다.
욥기에는,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것이, 거의 3바퀴 나오는데, 어떤 학자는 욥기의 문맥이 3단계로 진행된다고 정리해준다. 첫 번째 단계는 논의(discuss), 두 번째 단계는 논쟁(debate), 세 번째 단계는 논박(dispute)이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논의로 시작하여 점점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마지막에는 잔혹한 논박으로 악화한 것이다.
세 명의 친구들이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얼마나 몰아붙였는지 욥의 얼굴과 가슴에 가혹한 펀치를 무차별 날린다. 그야말로 집단 구타를 한 셈이다. 그들이 처음에는 욥을 도와주러 왔으나, 점점 더 욥에게 해를 끼친다(help to harm). 처음에는 최고 연장자 엘리바스가 욥의 현실에 대하여 공박하기 시작한다. 특히 엘리바스는 욥의 기개를 꺾으려고 세 차례나 몰아붙인다(4장, 15장, 22장). 그다음에는 빌닷이 옛 성현들의 교훈을 인용하여 욥을 권위적으로 누른다(8장, 18장, 25장). 그리고 세 번째는 소발이 가장 단호하면서도 독선적으로 깔아뭉갠다. 얼마나 잔혹하고 거세게 “너는 고생해야 싸다”라고 윽박지른다(11장, 20장).
우리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충고해 주다가,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을 위해 말해준다면서 오히려 상처를 준다. 그야말로 상처 난 부위에 소금을 뿌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처 받은 사람에게 어떻게 해서는 안 되는지를 숙지해야 한다. 즉 우리가 어떤 가정으로 충고해주느냐 보다, 어떤 가슴으로 위로해주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이 욥기에서 들려주는 중요한 메시지다. 어떻게 해야 가혹하게 공격하는 대신, 따뜻한 가슴으로 공감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첫째, 약점을 건드리지 말자(4:3-6)
욥의 친구들은 그동안 욥이 훌륭하게 살아온 점을 칭찬하기보다는 야단부터 한다. 본문 3절부터 보면 지금 욥이 신앙적으로 약해져 있는 모습을 가혹하게 나무란다. 그래서 욥이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그동안에는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내라고 상담해주던 자가 이제는 자기에게 힘든 일이 생기니까 스스로 맥을 못 추는 약골이 되었다고 나무라는 것이다.(5절)
그들은 욥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며 짓밟는다. 그들은 욥이 겪고 있는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더욱 가중시키고, 정신적 고통을 더욱 악화시킨다. 오늘 우리도 칭찬보다 책망을 먼저 하는 경향이 많다. 잘한 것을 칭찬하지 않고 잘못한 것부터 지적한다. 우리는 때때로 작은 잘못을 너무 난도질하여 더 큰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기를 꺾어 놓는 경향이 있다. 작은 실수를 눈감아주기보다 침소봉대하는 성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에게는 장점이 85%이고, 약점이 15%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점을 무시하고, 장점을 활성화해주어야 한다. 잘 못 하는 것을 지적하기보다 잘하는 것을 칭찬해주어야 한다. 옥에 티를 흠잡지 말아야 한다. 약점을 보완하기보다는 강점을 육성시켜주어야 한다.
우리는 비난(sarcasm)보다는 받쳐줌(support)이 필요하다. 이론(logic)보다는 사랑(love)이 필요하다. 충고(advice)보다는 인정(affirmation)이 필요하다. 우리는 약점을 지적하기보다, 장점을 칭찬해주는 따뜻한 격려자가 되어야 한다. 약점을 공격하여 절망감을 느끼게 할 것이 아니라 아픔을 공감하므로 희망을 품게 해주어야 한다.
둘째, 함부로 정죄하지 말자(4:7-11)
욥의 친구들은 욥이 겉으로는 경건한 체했지만, 남모르게 죄를 범한 것이 있어서 천벌을 받았다고 정죄한다. 그들은 모두 색깔이 똑같은 안경을 끼고 욥을 심판한다. 욥이 당한 패가망신은 그가 남모르게 지은 죄 때문에 심판받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들은 「인과응보의 법칙」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선입관과 편견으로 욥을 정죄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슬이 퍼런 자세로 욥을 사정없이 때려잡는다. 금세기 최고의 성경학자 유진 피터슨이 번역한 「메시지」의 내용은 적나라하다(7~9절).
「생각해보게. 정직한 사람이 쓰레기 더미에서 운명을 마친 적이 있었는가? 정직한 사람이 망하는 법을 본적이 있는가?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악을 밭 갈고 환난을 뿌리는 자는 환난을 거두게 된다네. 그래서 하나님의 입 기운으로 멸망하고, 그분의 콧김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된 것이라네.」 이처럼 그들은 비수 같은 말을 쏟아 부었다. 그들은 고통 중에 있는 친구를 동정하고 위로하기보다, 그를 마음껏 깔아뭉갰다. 그들은 상상과 가정으로 욥을 정죄하며 죄를 뒤집어 씌었다. 욥에게 남아 있는 기력마저 단칼에 베여버린 것이다. 이처럼 나쁜 충고일수록 상대방을 더욱 의기소침하게 한다.
우리는 간혹 병원에 문병을 가든지 고통당하는 사람을 방문할 때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 생각 없이 던지는 말에 자칫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 교우가 있다. ‘집사님, 이번에 입원하면서 마음에 가책되는 것이 없으세요?’ 이처럼 은근히 정죄하며 죄책감을 촉구하는 입장으로 말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렇게 응수하라. ‘당신 혹시, 박수나 부채 도사 출신이세요?’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 중에, 믿음은 좋은데 성품이 좋지 않은 자들이 있다. 신앙은 좋은데 인간성이 잘못된 자들이다. 소위 율법주의 신앙이다. 율법과 의는 있는데 은혜와 사랑이 없다. 보수적인 신자일수록 인정 없는 도덕주의자가 될 수 있다. 잔인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함부로 정죄한다.
나는 신학대학에서 공부했다. 대부분의 친구가 너무 어린 나이에 전도사로 사역했다. 그러다 보니 인간성이 균형 있게 갖추어지기 전에 너무 율법적 신앙을 가지는 폐단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친구와 함께 동아리를 조직했는데, 그 이름이 「인간회」이다. 사역자가 되기 전에 인간부터 되자는 운동이었다. 매우 좋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때 나와 함께 활동했던 친구는 지금 부산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성품이 참 좋은 친구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과 함께 성품 개발을 힘써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산상설교 메시지다.
사역보다 사람됨이 우선이다. 일보다 인품이 더 중요하다. 여하튼 우리는 정죄하는 대신 함께 아파할 줄 알아야한다. 먼저 공감하고 동정하고 위로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정죄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잘못을 비판하거나 심판하는 대신 오히려 긍휼히 여겨 주시고, 사죄 은총을 베풀어주신다(요8:11. 12:47~48). 예수님은 오늘도 공격대신 공감을 해주신다.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힘드니? 내가 도와주마!”
셋째, 영적으로 교만하지 말자(4:12-5:27)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무서운 무기는 신앙적 우월감이다.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거나 사고가 나면 가차 없이 윽박지른다. 신앙적으로 공갈 협박한다. “요즘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 주일예배 빠져서 사고 난 거야. 교회 봉사를 안 해서 그래.” 이것이 영적 교만이다.
본문 12절을 보자. 엘리바스는 자기야말로 영통한 사람으로서 욥이 왜 불행을 당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고 있다고 압도적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의 영적 권위를 은근하면서도 강하게 내세운다. 그가 계속 반복하여 사용하는 어휘가 있다. 「내가 보건대, 내가 알기로, 내 경험으로는, 나 같으면」이라는 표현을 수없이 반복한다.
특히 5:8절을 보면, 「내가 자네라면, 나 같으면, 내가 만일 너 같으면」이라는 자기중심적 우월의식으로 말한다. 이런 신앙적 우월감으로 욥을 기죽이고 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욥을 향해 「이보게」라는 비인격적 호칭으로 그를 윽박지른다(5:17). 우리는 때때로 신앙이라는 명목하에 상대방을 억지로 설복시키려고 한다. 신앙적 우월감으로 영적 권위를 남용한다. 이것이 욥기 5장 27절의 결론이다. 「보게나.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부디 잘 듣고, 너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나라 성경에서 여러 가지 표현으로 번역한다. “내 말을 잘 듣고 배우라. 명심하라. 귀담아들으라. 잘 알아 두어라.” 지금 피골이 맞닿고 만신창이가 되어 엄청난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무슨 지침이 되며 삶의 애환을 나누어주는 말이 되겠는가? 우리는 상담이나 충고라는 명목으로 자기주장이나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책망을 위한 책망으로 일관한다. 충고가 경고와 선고로 간다.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협박한다. 우리는 신앙적 우월감으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공격하는 대신 공감을 해야 한다.
욥기의 교훈은 우리에게 너무나 실제적인 가르침을 준다. 욥의 친구들의 말은 틀린 점이 하나도 없다. 다 맞다. 다 옳은 얘기다. 욥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메시지는 우리가 비록 옳은 얘기를 해도 그 말이 상황에 맞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적절한 말은 상처만 더 크게 만든다.
칼 델리취라는 구약성경 학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욥의 세 친구가 한 말들을 검토해볼 때 그들에게서 틀린 점을 찾아낼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의 지적이나 충고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옳은 말이라도 유익 되지 못할 수 있다. 맞는 말이라도 선하지 못할 수 있다. 그 핵심은 단 하나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만고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음에 불과하다. 청산유수로 말을 엮어낼수록 오히려 상처만 더 크게 만든다.
나는 이따금 이렇게 생각한다. ‘눈물 없이 하는 말일수록 눈물을 쏟게 한다.’ 우리는 일으켜주고 세워주는 말을 해야 한다. 몇 마디의 말이라도 따뜻한 가슴으로 하면 치유 효과가 있다. 현대인들에게는 이해와 격려, 그리고 특히 가슴 따뜻한 공감이 필요하다. 상처와 아픔 속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동정과 위로의 말을 목말라하고 있다. 지금 어려움을 당해 힘든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갑론을박의 설명이 필요치 않다. 공감과 위로가 필요할 뿐이다. 고통 당하는 자에게는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진정한 동정심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는 사랑 없는 공격 대신, 따뜻한 가슴으로 공감하자. -조봉희 목사(지구촌교회 담임, 디모데성경연구원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