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조어로 ‘나토족’(NATO)이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No Action, Talking Only인데, 행동은 없고 말뿐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신앙과 생활, 즉 신행 일치의 불균형과 신행 합일의 부조화 때문에 많은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는 가장 큰 이유는 ‘언행 불일치’ 때문이다. 신앙과 실천이 별개다. 말은 신앙적으로 하는데, 행동은 여전히 비 신앙적이다.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인데, 행동하는 것은 신자답지 못하다. 행함이 따라주어야 한다.
미국 IBM 회사의 슬로건이 멋지다. 「Stop talking, Start Doing(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시작하라).」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슬로건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결심을 뛰어넘어 실천해야 한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34년 동안 4천 번 이상 설교를 했다. 그런데 자기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깊은 회의를 느꼈다. 사람들이 말로는 그의 개혁운동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행동으로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몇 달 동안은 설교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야고보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동생이었기에 어려서부터 예수님께서 언행 일치로 사시는 모습을 보고 성장하였다. 그래서 신앙과 실천, 믿음과 행위의 균형을 강조한다.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고 하신 말씀을 자주 들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행동하는 믿음, 실천적 신앙생활을 간곡하게 호소한다.
바울은 구원의 뿌리로서의 믿음을 말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으로 믿음을 말한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말하고 믿음으로 내가 신자임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구원의 열매로서의 행함을 말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행함을 말한다. 예수님처럼 실천하는 행함을 말하고 행함으로 내가 신자임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믿음과 행위는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신앙과 생활, 믿음과 행동의 일관된 균형과 조화를 요구한다. 즉 사상과 행동, 기도와 노력, 은혜와 수고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양자 모두를 수반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답게 행동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도 이렇게 말한다.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행함과 믿음, 믿음과 행함은 항상 함께 있다. 믿음만 중시하게 되면 자칫 값싼 은혜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고귀한 은혜를 받고도 아무런 응답이 없이 살다 보면 그처럼 고귀한 은혜가 싸구려가 된다는 말이다. 행함이 없는 신앙일수록 싸구려 종교로 변질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병리현상이다. 은혜만을 좋아할 뿐, 행동을 소홀이 한다.
어떤 사회신학자가 한국교회가 성숙하지 못하는 근본요인을 설득력 있게 분석해준다. 가장 대표적인 요인은 우리 민족의 샤머니즘과 식민지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샤머니즘이라는 무속신앙은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이나 상식을 벗어나는 요행 심리를 근간으로 한다. 수단과 방법을 초월하여 복을 받고 성공하는 것을 지향한다. 샤머니즘은 결국 윤리와 도덕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거기다가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통치를 받다 보니 피해의식이 많다. 그래서 가능하면 국가의 법이나 원칙을 지키는 대신, 자신의 이익부터 챙기려는 습성이 몸에 배게 된 것이다. 그러니 원리나 원칙대로 수고하고 힘쓰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요령이 없다. 이런 배경 때문에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를 싸구려 신앙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고등윤리로 살아야 한다. 성경은 신앙과 생활, 믿음과 행동의 일관된 균형과 조화를 요구한다. 우리에게는 기도와 노력, 은혜와 수고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양자 모두를 수반하는 것이다.
윌리엄 버클리는 오늘의 본문을 일목요연하게 해석한다. “행위로 구원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이 구원받을 사람도 없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일화를 적용해볼 수 있다. 로미오가 애인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줄리엣, 그대의 눈동자를 보기 위해서라면 태평양이라도 헤엄쳐서 건너가고, 그대의 손을 한번 잡아보기 위해서라면 불속에라도 뛰어 들겠소. 다음 토요일에 그대를 찾아갈 것이오. 물론 비가 오지 않으면 말이오.’ 편지의 문장력은 화려한데, 그의 실천력은 얼마나 모순인가? 감언이설로 줄리엣을 꼬일 뿐, 어떤 행동도 없다. 사랑한다는 말만 할 뿐, 어떤 실제적 행위가 없다. 가짜다. 이에 대하여 20절에서는 정면도전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에게 누군가가‘웅변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행동입니다” 데모스테네스가 대답했습니다. “두 번째는요?” “행동입니다.” “그럼 세번째는요?” “역시 행동입니다.” 아무리 청산유수의 웅변가라도 본인이 실천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인디언의 격언에「행동은 말보다 크게 말한다」는 좋은 교훈이 있다.
아무런 실천이나 행함이 없는 죽은 신앙, 귀신처럼 아는 것만 많을 뿐 아무런 실천이나 행함이 없는 신앙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아는 만큼 행동하고, 들은 만큼 실천하고, 배운 만큼 따르는 신앙만이 역동적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머리로만 동의하거나, 마음으로 감동만 받는 것이 아니다. 실천하는 행동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동사이다. 믿음은 곧 행동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렇게 당부하신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저는 야고보서를 묵상하면서 행동하는 신앙의 유익을 세 가지로 압축해보았다. 첫째, 행하는 만큼 변화된다. 새로운 습관과 성품이 형성된다. 둘째, 행하는 만큼 성숙한다. 어떤 일이든지 익숙해지는 만큼 발전하고 성장한다. 셋째, 행하는 만큼 체험한다. 실행하는 만큼 많은 것들을 체험하며, 풍부해진다.
-조봉희 목사(디모데성경연구원 자문위원, 지구촌교회 담임목사)